기획특집 : 불교와 욕망

프로이트는 〈욕동과 그 운명〉에서 “욕동(drive)은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의 경계 개념으로서, 유기체 내에서 시작되어 마음에 이르는 자극의 정신적 재현체로서 우리에게 드러난다”(SE 14: 121-22)라고 말했다.

이 유명한 말 속에서 욕동을 정신과 육체의 경계 개념으로 뜻매김한 것은 욕동의 재현 문제를 풀어가는 데 결정적 단서를 제공해 준다.

정확하게 정신적인 것(the mental, the psychic)이 재현적인 것이고 육체적인 것(the somatic)이 비재현적인 것이라면 이 둘 사이에 위치한 욕동의 자리는 반(半)재현적, 불완전한 재현의 자리임에 틀림없다. 라캉이 말하는 비(非)전체(pas-tout/ not-all)의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라캉은 그의 유명한 성 구분 공식에서 여성을 정의하면서 Φx라는 표기를 했고 그것은 ‘여성이 모두 팰러스 함수에 예속되는 것은 아니다(A woman is not all-together subject to the phallic function)’라고 읽혀 여기서 보여준 비전체의 의미가 재현과 관련된 욕동의 정의에도 어떤 관련성이 있어 보인다.

라캉은 프로이트를 따라 욕동은 항상 부분욕동(partial drive)이고 그것의 대상 a는 부분대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부분적인 것은 그것이 육체의 일부분(예컨대, 육체의 안과 밖이 만나는 경계 지점인 성기, 입, 항문, 눈, 귀 등)이라는 프로이트적 의미를 넘어 ‘오직 부분적으로만 재현한다’는 뜻을 가진다고 라캉은 강조한다: “대상이라는 개념 속에 제대로 강조되어 온 이러한 양상, 이러한 부분적 특성은 그 대상이 육체라는 전체 대상의 일부라서가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 내는 기능을 ‘오직 부분적으로만 재현하기(represent only partially)’ 때문이다.”(É, 315)

〈거세 콤플렉스의 주체적 의미〉에서도 라캉은 같은 말을 강조하고 있다: “욕동은 정신계에서 성욕(sexuality)을 ‘재현’하는데 ‘오직 부분적으로만’ 그렇게 한다.”(FS, 119) 이러한 욕동의 부분 재현성의 가능성은 앞에서 본대로 육체와 정신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그것의 위상으로 설명될 뿐만 아니라 프로이트-라캉이 강조했던 본능(Instinkt)과 욕동의 구별을 통해서도 설명된다.

잘 알려진 대로 프로이트 전집의 제임스 스트래치 영역본에서 독일어 ‘Trieb’가 영어 ‘instinct’로 번역된 것을 놓고 라캉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욕동이 재현의 세례를 받아 순수 생물학적 개념인 본능과는 확연히 구별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오직 부분적으로만 재현한다’는 위 인용문을 통해서 라캉이 또다시 강조한 것은 욕동이 자연의 질서로부터는 떨어져 있으나 상징질서로 진입에는 한계성이 있다는, 다시 말해서 “그것이 기표의 회로에 완전히 기입된 것은 아니다.”(UMBR(a) 1: 141)라는 것이다. 영어로 이러한 ‘not-entirely’ ‘not-all’의 개념이 욕동의 부분 재현성을 잘 드러내 주는 것으로서 이것은 그대로 트라우마의 부분 재현성과 연결된다.

욕동의 부분적 재현성이 함축하는 중요한 의미는 그것의 반(半)동물적 성격에 관한 것이다. 재현, 상징화, 혹은 상징적 재현이라는 개념은 주체의 사회화, 인간화에 대한 다른 이름이다. 그러므로 욕동의 개념이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중간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동물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혹은 자연과 문화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현대 지성 담론에서 욕동 이론은 생물학적 본질주의와 역사적 구성주의를 동시에 거머쥐는 포괄이론으로, 혹은 그 둘의 극단론을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Shepherdson 2000, 2008 참조).

욕동의 이러한 육체적, 본능적 성격 때문에 제임스 스트래치가 독일어의 ‘Trieb’를 본능을 나타내는 영어 단어 ‘Instinct’로 번역한 것도 일견 이해가 간다. 라캉의 막강한 반대 견해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 전집의 영역본 완성에 평생을 바친 스트래치가 프로이트가 ‘Instinkt’와 ‘Trieb’를 구별해서 썼으며 후자에 상응하는 영어가 ‘drive’라는 사실을 왜 몰랐겠는가. 아마도 프로이트의 욕동에 관한 많은 설명에서, 특히 에너지와 경제론적 관점에서 그것을 논할 때의 프로이트 입장이 상당한 정도로 본능 쪽에 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런 번역어를 선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욕동의 준본능적 성격은 그것의 강박성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지젝이 지적하고 있듯이 “욕동은 정확하게 욕망의 변증법에 갇혀 있지 않은, 변증법화에 저항하는 요구이다”(Žižek 1991, 21). 이 말은 라캉이 왜 욕동을   ◇D라는 공식으로 표현했는가를 알게 해 준다.

여기서 ‘D’는 요구(demand)를 나타내는데 그 요구는 ‘변증법적 중재’가 가능한 보통의 상징적 요구가 아니라 무조건적(unconditional), 기계적(mechanical), 제어할 수 없는(intractable) 요구이다: “욕동은 어떤 것을 끈질기게 주장한다. 그것은 변증법적 유연성에 사로잡힐 수 없는 ‘기계적’ 주장이다. 어떤 것을 요구하기 시작하면 그것을 끝까지 주장한다”(21).

예컨대, 안티고네가 왕의 칙령에도 불구하고 자기 오빠 폴리네케스의 시체가 적절히 매장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할 때, 그리고 이미 죽은 햄릿의 아버지가 무덤에서 망령으로 돌아와 그에게 자신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할 때 ‘욕망 없는 순수한 욕동’의 출현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보듯이 프로그램화된 자동 인간이 아무런 타협이나 주저함 없이 기계적으로 그의 적수를 추적할 때 여기서도 ‘욕망 없는 욕동의 화신’을 보게 된다. 그런가 하면 영화 〈로보캅〉에서는 ‘두 개의 죽음’ 사이에서 사는 기계적 주인공이, 죽은 상태에서 그가 전에 살았던 ‘인간적인’ 삶의 파편들을 기억하기 시작하고 재인간화 과정을 겪으면서 “순수하게 성육신화된 욕동에서 욕망의 존재로 점차 변해 가는”(22)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러면 도대체 욕망과 욕동은 어떻게 다르며 그 둘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름도 비슷하고 뜻도 비슷하여 글 쓰는 사람마다 이에 대한 해석이 구구하다. 어떤 사람은 이 둘을 거의 같은 것으로 생각해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개념으로 보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이 둘 사이에 도저히 건너뛸 수 없는 차이의 벽이 존재하는 것처럼 다룬다. 입담 좋은 지젝도 이 문제에 시달리다가 ‘욕망: 욕동=진리: 지식’이라는 수학 공식을 통해 이 문제를 풀려고 시도했으나(UMBR(a) 1: 147-53)

내가 보기에 그것이 문제를 해결했다기보다는 독자를 오히려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 것 같다. 지젝과 같이 슬로베니아 학파에 속해 있는 A. 추판치치도 《실재의 윤리학》에서 이 문제와 씨름하다가 《위험한 관계》의 발몽(Valmont)을 욕망의 인물로, 《돈 후안》의 동명의 주인공을 욕동의 화신으로 분석해 냄으로써(Zupančič, 106-136) 허구를 통해 이론의 차이를 실천적으로 보여주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와 혼란에도 불구하고 라캉이 이 두 개념에 대해서 견지해 온 논지는 의외로 명료하고 투명하다. 범주론적으로 욕망이 상징계에 속하고 욕동은 실재계에 속한다. 이것은 상징화 시대라는 1950년대에 욕망의 문제가 가장 많이 거론되었고 실재계 시대의 서막이라는 세미나 XI에서 정신분석의 네 기본 개념 중에 욕망이 아닌 욕동이 채택된 연유에서도 짐작되는 대목이다.

그리고 “욕망은 대타자에서 나오고 주이상스는 사물의 편에 있다”(É, 853)는 말 속에는 그러한 차이가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다. 욕망이 기표들의 총화인 대타자에게서 온다는 말은 그것이 상징 질서의 산물이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다.”라는  라캉의 또 다른 말은 욕망의 문제가 언어, 상징, 재현, 법, 질서의 문제와 동일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다른 한편 “주이상스는 사물의 편에 있다.”는 것은 욕동이 실재계의 범주에 속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주이상스, 욕동, 사물(das Ding)이 모두 실재계에 속한 개념들이다.

그러면 욕망과 욕동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라캉은 ‘분열된 주체가 오브제 a에 대해 맺는 관계’라고 정의되는 판타지 공식(  ◇a)과 오브제 a=욕망의 대상−원인(object-cause of desire)이라는 등식 관계 속에 전달하고 있다. 라캉의 설명으로 욕동은 오브제 a 주위를 선회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이 둘이 모두 실재계에 속한 개념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위 등식에서 욕동=욕망의 원인이라는 또 다른 등식이 자연스럽게 도출되어 욕망과 욕동의 관계를 말해준다. 욕동과 욕망이 오브제 a를 합집합으로 해서 구성된 다음 도표는 이러한 관계를 잘 보여준다(Fink 1997, 211).

                            주체     대타자

                          욕동     a    욕망


앞에서 비친 지젝의 욕망: 욕동=진리: 지식이라는 등식 관계도 바로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작성된 것이다.
핑크 교수는 욕망과 욕동을 프로이트의 자아(ego)와 이드(id) 개념에 대입하여 설명한다: “욕망하는 주체는 어떤 의미로는 자아(부분적으로 의식이고 부분적으로 무의식인)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자아는 이드가 추구하는 종류의 만족에 대해서 방어적 입장에 있다. 자아는 이드의 만족 추구를 못마땅하고 위협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이드가 그 대상을 선택함에 있어 사회적 규범과 이상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241).

이렇게 욕동의 동물적 만족 추구에 방어적 입장에 있는 욕망에 대해서 “욕망은 주이상스에 대한 방어로서 만족 대신에 존재한다. 이것은 욕망이 그 성격상 왜 만족―실제적, 성적 만족을 타매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욕망은 욕동의 만족보다는 판타지의 쾌락을 선호한다. 욕망은 그러한 만족을 제지하고 욕동에 재갈을 물린다. 왜냐하면 욕동이 추구하는 만족은 위압적이고 정도가 지나치며 가공스럽기 때문이다(만족은 욕망을 죽이고 질식시킨다). 여기서 욕망은 방어에 다름 아니다”(241).

한마디로 말해서 법과 질서, 규범의 틀 속에서 생성되는 욕망은 ‘인간적’인 것이고 그러한 법(the Law)이 부여하는 구속력과 억제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욕동은, 그 추동력의 무조건성, 야만성으로 인해 ‘동물적’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적절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이 둘의 인과론적 관계는 전자에 의한 후자에 대한 ‘방어적’ 관계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는 라캉의 분석 지침과 관련된 발언에 대해 지젝이 ‘약간의 수정’을 요구하는 대목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욕동과 욕망의 관계에 대하여 우리는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는 라캉의 격문에 약간의 수정을 가해야 할 것 같다: 욕망이 그 자체로 하나의 양보이고 일종의 타협하기이며 환유적 치환이고 물러섬이며 어찌할 수 없는 욕동에 대한 방어가 아니겠는가?

욕망한다는 것은 욕동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 한다’. 우리가 안티고네를 따라 욕망을 포기하지 않기를 고집한다면 정확하게 우리는 욕망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며 욕망의 모드에서 욕동의 모드로 방향 전환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Žižek 1991, 172; 강조 원문).

여기서 특히 지젝이 강조하고 있는 ‘욕망이 욕동의 포기를 의미한다’는 대목을 주목해 보자. 왜냐하면 그것이 정신분석이 목표로 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욕동, 특히 외상적 실재로서의 욕동은 정상적인(즉 규범 ‘norm’을 지키는) 인간 주체의 관점에서 볼 때는 ‘병리적’이다. 앞에서 본대로 비전체적(not-all) 부분 재현 상태의 욕동은 상당한 정도로 본능적, 동물적 성격을 띠어 상징적 통제력을 쉽게 벗어나고 일탈적 위반(transgression)의 개념에도 무감각하다.

정신적 병리는 이러한 외상적 실재로서의 욕동의 영향하에 있는 상태를 일컫는다. 분석치료는 이런 병리적 상태를 법과 질서가 지배하는 ‘인간적인’ 욕망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라캉은 이것과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말을 《에크리》에 남겨 놓았다.

주이상스가 욕망의 법의 거꾸로 된 사다리에 도달될 수 있도록 우리는 그 주이상스를 거부해야 한다. 이것이 거세가 의미하는 것이다.(É, 324)

여기서 ‘주이상스’라는 단어를 욕동으로 바꾸어 놓는다면 ‘욕망은 욕동의 포기를 의미한다’는 앞의 진술과 거의 동일하다. 그리고 주이상스라는 라캉의 개념이 프로이트의 정동(affect)과 같이 유쾌하거나 고통스러운 강렬한 실재계적 감정이라는 점에서 욕동과 그것과의 상호 교환적 사용은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문제는 욕동이 욕망에 자리를 내주는 것이 거세(castration)의 의미라는 대목이다.

정신분석적으로 말해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아버지 이름의 기표’를 통해 상징적 재현 체계에 안착한 인간 주체는 거세의 임무를 완수한 주체이다. 그러나 이 통과의례에서 실격했거나 재현 체계에 균열을 가져오는 외상적 경험을 한 주체는 정상인의 조건인 거세 임무에 문제점을 남기고 병리적 신경증의 상태로 추락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세가 모든 다른 정신 현상과 마찬가지로 전체(all)와 비전체(not-all)의 이분법적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전체를 획득한 사람만이 정상인이다. 비전체에 해당하는 모든 사람은 신경증 환자이다. 분석치료는 바로 이 비전체를 전체로 끌어올리기 위한 작업이다. 그 작업은 비전체를 구성하는 욕동의 차원에서 전체를 구성하는 욕망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분석적 노력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 위의 인용문을 통해서 라캉이 전달하는 메시지이다.

프로이트의 사유체계는 근본적으로 이원론이다. 그것은 인간의 갈등 구조를 설명하기 위한 기본 원리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이원론적 생명관은 그의 전 저작물을 통해서 일관되게 주장되고 있는데, 지형학 이론에서는 (전)의식/무의식의 이원 구조로, 그리고 제2기의 구조 이론에서는 (초)자아/이드라는 대극 구조로도 잘 나타나고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그의 욕동에 관한 이론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처음에 프로이트가 내세운 대극적인 두 욕동은 ‘성욕동(Sexualtrieb)’과 ‘자아 욕동(Ichtrieb)’이었다.

그의 성욕동에 대한 생각은 끝까지 별로 바뀌지 않았지만 자아 욕동에 관한 생각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일명 ‘자기 보존 욕동’이라고도 불리는 자아 욕동은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대변되는 인간의 생존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서 성적 욕망의 추구를 지향하는 성욕동과 충돌하게 된다. 이에 따라 프로이트는 이 두 욕동 사이의 갈등과 타협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의 갈등 구조를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1914년에 나온 〈나르시시즘 소론〉을 시작으로 나르시시즘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면서 이러한 구도에 큰 차질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에 그는 자기애, 혹은 자신에 관한 관심으로 특징지어지는 나르시시즘을 당연히 자아욕동의 표현으로 생각했다. 그것이 자기 보존과 자기 학대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르시시즘이 성적 리비도의 상대적인 결핍을 가져오고 또한 그 반대의 경우도 사실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기존의 이원론을 근본적으로 회의하기 시작했다. 만약 성욕동과 자아욕동이 진정으로 독립된 상태로 존재한다면 그런 문제가 발생하지 말아야 했다. 그래서 그는 성적 리비도가 외부의 대상을 향하느냐 혹은 내부 자아를 향하느냐에 따라 각각 ‘대상 리비도’와 ‘자아 리비도’로 구분했다.

이 대극적 구도는 형태상으로는 성욕동과 자아욕동의 구도와 비슷하나 자아 리비도와 대상 리비도가 다 같이 동일한 성적 에너지의 다른 표현으로서 서로 교환 가능하다는 사실은 기존의 이원론적 욕동설을 근본적으로 뒤엎는 것이다. 그것은 두 개의 상이한 욕동이 아니라 하나의 욕동이 엮어낸 두 가지 표현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자아욕동도 사실은 성욕동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이제 프로이트의 이원론은 일원론으로 변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새로 얻게 된 욕동의 일원론을 내심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것은 당시 그와 불화 관계에 있었던 융의 일원론을 인정하는 결과가 될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서는 임상 경험을 통해서 목격하게 되는 두 힘, 혹은 두 세력 간의 갈등과 타협이라는 현상을 설명하기에 부적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fort/da’ 게임이나 외상성 환자들의 행위 등에서 나타나는 ‘반복 강박(compulsion to repeat)’ 속에서 어떤 욕동적 성격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새로운 이원론적 가능성을 보게 된 것은 그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프로이트는 반복 강박 속에서 어떤 저항할 수 없는 ‘악마적인’ 힘이 작동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힘은 추동력을 지니고 있어 욕동적 성격을 띤다. 그는 이것을 ‘죽음욕동(Todestrieb)’ 혹은 죽음의 신인 ‘타나토스(Thanatos)’라고 이름 붙여 기존 성욕동의 연장선에 있는 ‘생명욕동(Lebenstrieb)’ 혹은 ‘에로스(Eros)’와 대비시켜 원래의 그의 지론이었던 본래의 이원론에 화려하게 복귀한다.

[에로스]의 목적은 더 큰 통일체를 결성하고 보존하는 일, 간단히 말해 묶는 일이다. 반면에 [파괴욕동]의 목적은 기존의 관계를 해체시키고 파괴하는 것이다.(SE 23: 148)

이와 같이 프로이트가 그의 말년까지 변함없이 지지했던 욕동 이론은 생명/죽음, 건설/파괴, 묶기(Binding)/풀기(Entbinding), 동화작용(anabolism)/이화작용(catabolism), 성욕동/공격욕동, 성/폭력이라는 이원론적 구도를 충실하게 이어간다. 이 중에서 성/폭력의 쌍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병리현상, 특히 성의 타락과 학교 폭력과 같은 ‘야만의 흔적’을 설명하는 데 효과적이다.

20년 전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김부남 여인 사건’의 경우를 보자. 어린 9세 때 동네 어른에게서 성폭행을 당했고, 25년이 지난 어느 날 폭행 당사자를 찾아가 살해한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된 김부남 여인은 법정 최후 진술에서 “나는 사람이 아닌 짐승을 죽였다.”라고 일갈하여 세상을 경악게 했다.

이 성폭행자의 짐승과 같은 악마적인 충동이 어디서 왔을까? 정신분석 이론에서는 바로 위에서 말한 욕동/충동/본능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것의 일그러진 표상, 왜상(anamorphosis)인 것이다. 프로이트의 욕동의 이원론은 욕동혼합(Triebmischung)의 법칙에 따라 이합집산하기도 한다. 내적 공격성과 성이 결합하여 마조히즘(masochism)을 연출하고 타자를 향한 공격성이 성과 결합하여 사디즘(sadism)을 형성하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욕동의 이원론은 그것과 동족 관계에 있는 주이상스 이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고통을 수반한 쾌락이라고 정의되는 주이상스도 그 근원을 에로스와 죽음이라는 근본적으로 대치되는 두 성향에 두고 있다. 성적 주이상스, 혹은 팰러스 주이상스라는 것이 전자에 속하고 불안, 공포, 증오, 분노를 수반한 죽음의 무도인 가학적/피학적 주이상스는 후자에 속한다.

 그리고 정신계의 하부구조를 형성하는 또 다른 현상, 오브제 a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라캉이 오브제 a의 아바타로서 제시한 여러 부분 대상들 중 구순적 욕동(oral drive)의 대상, 유방과 유두(mamilla)는 대표적 에로스의 표상이다. 또한 항문욕동(anal drive)의 대상인 똥(feces)과 같은 배설물은 인간의 공격성, 파괴성과 관련된다. 그리고 시각적 욕동(scopic drive)의 표현인 응시(gaze)와 청각적 욕동(invocatory drive)의 대상인 목소리(voice)는 이 양쪽 속성을 포함한 것이다.

학교 폭력이나 ‘이지메’ 현상에 노출된 피해 학생(victim)은 그 가해 학생(bully)의 괴롭힘이 죽음/공격/파괴 욕동의 현현으로 경험될 것이고 이때 경험의 주체인 피해 학생이 느끼는 부정적 강렬한 감정(affect)이 바로 주이상스라는 것이다. 이 말은 주이상스(J-factor)가 단순히 ‘즐거운 감정’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교정하는 데 효과적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사항은 인간 정신의 하부구조를 형성한다는 실재계의 세 개념, 주이상스/오브제 a/욕동의 운행 방향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는 두 방향, 즉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실재계의 이원론적 현상들이 상징계에서는 어떻게 자기표현을 획득하는가?

실재계는 원칙적으로 비재현계에 속하므로 이미지로 재현하는 상상계나 언어로 재현하는 상징계와는 뚜렷이 구별된다. 그러나 그것이 엄격한 의미에서 ‘재현(representation)’은 아니지만 어떤 형식이든 의식계에 ‘현현(presentation)’한다는 점에서 실재계의 ‘자기표현’은 논할 수 있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을 통해서 가설적으로 존재하는 미지의 세계 탐색이라는 정신분석의 기본 방향과도 일치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실재계의 욕동(drive)은 상징계의 욕망(desire)의 형태로 자기표현을 시도한다는 것이 이 글의 논지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제1차 과정의 잠재적 꿈의 사고(latent dream-thought)가 꿈의 작업(dream-work)이라는 일정한 변형 과정을 거쳐 검열선을 통과하여 의식계에 떠오른 것이 명시적 꿈(manifest dream)이다. 이때 동원된 수사적 변형 과정이 압축(condensation), 치환(dis-placement), ‘재현 가능성의 고려’ ‘제2차 수정작업’ 등이다. 특히 압축과 치환은 라캉에 의해서 은유와 환유로 동일시되었다.

잠재적 꿈의 내용이 이와 같은 변형 과정을 겪는 것은 중앙에 위치한 검열선을 통과하기 위해서이다. 사르트르가 그의 《존재와 무》에서 이른바 ‘검열과 비판’을 통해 프로이트의 검열자(censor) 설정 문제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라캉의 검열/거세 라인의 존재에 대한 확신은 불변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아버지 이름의 기표’를 입력받아 상징화, 주체화 과정에 합격한 사람은 의식/무의식, 자아/이드, 제2과정/제1과정, 재현계/비재현계 사이에 생명선과도 같은 탄탄한 중앙 가름대의 존재를 부여받는다는 것이다. 정신의 불건강성은, 트라우마의 경우에 잘 나타나 있듯이 이 온전성(all)이 파괴되어 비온전성(not-all)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것(das Es)’ 혹은 ‘이드’ 세력의 의식계로의 범람을 막아 준다는 의미에서 ‘보호 방패(protective shield)’ 혹은 ‘국경수비대’라는 메타포를 사용한 바 있다.

이렇게 일정한 변형 과정을 거쳐 검열선을 통과한 이드의 내용물은 법과 질서가 지배하는 프로이트의 현실 원칙(reality principle)에 맞게 지젝이 말하는 사회·상징적 현실(social-symbolic reality)에 자리를 잡는다. 이것이 바로 욕동의 욕망으로 변신 과정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욕망은 [상징적] 대타자에서 나오고 주이상스 [욕동]은 사물(das Ding)의 편에 있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우리는 욕동이 욕망으로 변신하는 과정에 ‘거세(castration)’가 작용한다는 라캉의 발언이 바로 이 검열의 중앙 가름대의 존재성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인간화, 주체화, 상징화 과정에서 이 상징적 거세가 완전하게(all) 이루어진 사람만이 ‘정상(normal)’인이고 그런 사람만이 보호막인 생명선을 보장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상징적 거세의 논리가 전체(all)/비전체(not-all)의 이분법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전체’에 속한 모두가 ‘비정상적’ 신경증자로서 탄탄한 생명선을 보장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분석치료가 목표로 하는 것은 바로 이 비전체의 상태를 전체로 끌어올리기 위한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거세를 통한 욕동의 욕망으로 전환’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all’의 상태에 도달한 ‘행복한’ 사람들뿐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욕동의 ‘야만적’으로 몰아붙이는 힘(Drang)으로부터 언제나 자유롭지 못하다. ‘동물적’ ‘본능적’ ‘즉흥적’ ‘기계적’ ‘무조건적’이라는 관형적 수식어가 욕동에 따라붙는 말이라면 욕망은 상징적 대타자와 관련하여 발생하기 때문에 법과 질서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

J.-A. 밀레르가 말하고 있는 욕동과 욕망의 구별법은 명쾌하다. “욕동은 금지(prohibition)의 문제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욕동은 금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거나 그것을 위반(transgression)하는 꿈을 꾸지 않는다.

욕동은 자기 성향을 따라 언제나 만족을 취한다. 반면에 욕망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며 자제력을 발휘한다. 즉 ‘그들은 내가 그것을 하기를 바라므로 나는 그렇게 안 할 거야.’ ‘나는 그쪽으로 가기로 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그쪽으로 가려 한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나는 아마도 그렇게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Miller 423). 한마디로 말해서 욕동에게는 금지와 위반의 개념이 없는 반면, 앞뒤를 가리고 논리를 따지는 욕망에는 왜(why)와 어떻게(how)의 개념이 있다.

라캉의 말대로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다.” 인간은 대타자를 욕망하고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헤겔 욕망론의 해설자로 유명한 A. 코제브는 ‘동물적 욕망’과 구별되는 인간적 욕망을 ‘인류 발생적 욕망(antropogenetic desire, Kojève 62)’이라고 뜻매김하고 있다. 동물적 욕망이 즉물적인 데 비해 인간의 욕망은 반드시 타자의 욕망에 의해 매개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라캉의 논지와 같은 맥락이다. 욕망은 환유이다. 한 단어에서 다른 단어로의 인접성(word-to-word)에 따라 욕망은 변증법적으로 펼쳐진다. 이 ‘변증법’이라는 표현은 욕망에만 있고 욕동에는 붙일 수 없는 이름이다. ‘욕망의 변증법과 주체의 전복’은 《에크리》에 실린 중요한 에세이 중의 하나이다.
이상의 논리를 입증하기 위해서 하나의 구체적인 분석사례를 도입한다.

여름휴가차 멀리 나가 있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이 너무 비대하다는(독일어로 ‘dick’) 생각과 따라서 ‘살을 좀 빼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래서 그는 푸딩이 나오기 전에 식탁에서 벌떡 일어나 8월의 태양이 작열하는 열기 속에서 모자도 쓰지 않은 채로 도로를 따라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는 단숨에 산으로 뛰어오르다 마침내 땀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멈춰 서야만 했다. (……) 우리의 이 환자는 이러한 지각없고 강박적인 행위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자기 여자가 그때 바로 그 휴양지에 머무르고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여자는 한 영국인 사촌과 같이 있었다. 그 남자는 그녀에게 대단히 많은 관심을 보였고 따라서 이 환자는 그에게 강한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 사촌의 이름이 리처드였다. 그리고 그는 영국의 통상 관례대로 ‘디크(Dick)’로 알려졌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이 환자는 이 디크를 죽이고 싶었던 것이다.(SE 10: 188-89)

프로이트의 〈쥐인간〉에 나오는 이 에피소드는 이미 다른 데서 꽤 상세하게 분석한 바 있으므로(《기호, 주체, 욕망》 28, 239) 여기서는 욕동의 욕망으로 변신 과정과 관련하여서만 언급하겠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텍스트의 이원론적 구조이다. 심층적 텍스트에 있는 리처드에 대한 욕동적 살해의지(killing Richard)가 어떻게 해서 표층 구조에는 지방 제거(killing fat)의 욕망으로 변형되어 나타났나 하는 것이다.

두 텍스트를 연결하는 열쇠기표(key signifier)는 ‘Dick’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를 영어로 읽을 때 그것은 바로 주인공 ‘쥐인간’의 연적 리처드(Richard)의 아명(雅名)이다. 따라서 ‘killing Dick’라고 표현했을 때 그것은 바로 ‘killing Richard’로 연결되어 그의 연적에 대한 욕동적 살해 의지를 드러낸 것이 된다. 그러나 그 기표 ‘Dick’를 독일어로 읽었을 때 그것의 기의는 지방층이라는 뜻을 얻어 ‘killing Dick’는 결국 지방 제거, 살 빼기라는 조깅의 목적에 부합하는 현실적 욕망의 표현이 된다.

열쇠기표 ‘Dick’를 지렛대로 하여 욕동 차원의 리처드에 대한 살해 의지가 욕망 차원의 지방 제거를 위한 달리기 운동으로 변신한 것이다. 이 변신 과정에는 앞에서 말한 검열자와 같은 중앙분리선의 기능이 작동했을 것이다. 타인에 대한 살해 의지는 ‘현실 원칙(reality principle)’에 어긋나고 주체의 행복 조건에도 역행하므로 즉각적으로 검열의 대상이 되고 그것의 의식계로의 진입 시도는 좌절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살해 의지가 ‘살 빼기’ 혹은 ‘지방 죽이기’로 변신하고 변장한 것이다.

이쯤 되면 검열자가 보기에도 현실적으로 별로 위해를 주지 않는다고 판단되어 의식계로 진입을 위한 검열선을 통과시킨 것이다. 비록 8월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식사도 거른 채 그렇게 강박적으로 조깅을 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건강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말한다면 누가 그것이 현실 원칙에 위배되고 그의 행복조건에 반(反)하는 처사라고 나무라겠는가?

 ‘쥐인간’은 조깅을 하면서 내심 희열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겉으로는 ‘살 죽이기’를 하지만 속으로는 ‘리처드 죽이기’를 무의식적으로 실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소원이 간접적으로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꿈은 ‘소원 성취(wish-fulfillment)’라는 말이 들어맞는 대목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주목할 사항은 욕동의 욕망으로 변형 과정을 통해서 그 형태가 운행 방식(vehicle)은 변해도 그 취의(tenor)는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killing Richard’가 ‘killing fat’로 바뀌었지만 표층구조와 심층구조가 다 같이 어떤 ‘killing’에 관심하고 있다는 점은 동일하다.

이 같음과 다름의 변증법은 오브제 a가 욕망의 대상-원인이라는 말 속에 함축된 욕동과 욕망의 인과론적 관계에서 유추되는 결론이다. 그리고 ‘보존’과 ‘들어 올림’의 뜻을 동시에 품고 있는 헤겔의 ‘지양(Aufhebung)’의 개념도 이 두 측면을 설명하는데 효과적일 것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또 하나 언급해 두어야 할 사항은 “욕망은 방어이다. 주이상스가 일정 수준을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방어이다.”(É, 322)라는 라캉의 진술이 갖는 함의이다.

욕망이 주이상스, 혹은 욕동에 대한 방어라는 개념은 이미 변형을 위한 방어선 설치라는 메타포 속에 반영되어 있다. ‘동물적’ 살해 충동이 ‘인간적’ 살 빼기 운동으로 변신하는 과정에 적정의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가 작동한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N. N. 홀란드 교수는 이미 그의 역저 《문학적 반응의 역동성》(1968)에서 텍스트 이론과 독자 반응 이론을 결합하여 ‘형식으로서의 방어(defense as form)’ ‘의미로서의 방어(defense as meaning)’라는 말로 명쾌하게 설명한 바 있다.

쥐인간의 분석 사례 보고서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교훈은 텍스트의 이원론과 욕동의 이원론과의 관계 맺음에 관한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프로이트의 욕동이론은 근본적으로 이원론이다. 성욕동/자아(자기보존)욕동, 에로스/죽음, 성/폭력 등 이분법적 구도가 그것이다. 욕동이 변형 과정을 거쳐 욕망의 형태로 ‘들어 올려질’ 때 헤겔적 지양(止揚)의  논리에 따라 그것의 이원론적 구도는 변하지 않고 욕망 속에 ‘보존’되리라는 생각을 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므로 다양하게 전개되는 욕망의 파노라마 속에서도 에로스적 흐름과 죽음, 파괴, 공격적 경향을 구별하여 범주화할 수 있을 것이다. 윗글에 나타난 쥐인간의 욕망의 구도는 단연 후자 쪽이다. 그러므로 욕동과 욕망이 빚어내는 범주론적 이원론은 욕동의 내재론적 이원론과 교차하면서 다양한 결합 관계를 산출할 것이다. ■

 

박찬부 
경북대 영문과 교수. 서울대 문리대 영문과, 동 대학원 졸업. 하버드 옌칭연구소 장학금으로 미국 뉴욕주립대학교(버펄로)에서 영문학 박사학위 취득. 예일대학교 영문과 객원교수, 한국비평이론학회와 라캉과 현대정신분석학회 회장 역임. 주요 저서로 《현대정신분석비평》 《라캉: 재현과 그 불만》 《기호, 주체, 욕망: 정신분석학과 텍스트의 문제》 등이 있고, 역서로 프로이트의 《쾌락원칙을 넘어서》 등이 있다. 재남우수논문상, 경북대학술상, 대구광역시문화상, 우호학술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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