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 불교와 욕망

1. 들어가는 말

에리히 프롬은 〈선(禪)과 정신분석〉에서 불교와 정신분석은 인간 내면을 깊게 성찰하면서 심리적 갈등의 원인을 진단하고 평안한 상태(well-being)에 도달하기 위한 실천적 방안을 제시하는 치료의 담론이라고 평가한다. 담론의 기원이나 이론적 지형이 전혀 다른데도 두 이론은 인간 영혼의 안정을 위한 실천 방안을 제시하고 행복한 삶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것에서 통하는 점이 있다는 것이다.

불교와 정신분석은 공통으로, 사회나 제도가 아니라 육체를 지니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면서, 끝없이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 현존재가 당면하는 고독, 불안, 고통에 더 관심을 갖는다. 라캉은 《불안》이라는 제목이 붙은 1962-1963년 세미나 10권에서 불교에 대해 자세하게 논하면서 불교와 정신분석의 친화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불교와 정신분석이 함께 만나는 지점은 어디이고, 둘의 차이는 어떤 것일까? 불교나 정신분석은 둘 다 서구 사상에 뿌리 깊은 주객이론이나 의식의 표상 논리에 기초한 이성 중심주의를 거부하면서 그릇된 집착이나 나르시시즘에 물든 정념을 벗어나 존재의 비실체성, 즉 무(無)에 관한 사고를 적극적으로 개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불교가 말하는 해탈이나 정신분석이 말하는 욕망의 윤리는 삶에 대한 현명한 태도를 확립하고 소외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한다는 면에서 거시적으로 보면 분명 치료의 담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이론의 차이점도 많은데 그것은 인간 본성에 대한 상이한 진단과 처방에서 기인한다. 깨달음을 통해 무명의 혼돈을 벗어나 인간 본성에 내재한 불성을 재발견하고 해탈에 도달하는 것이 불교의 입장이라면 존재결여에서 비롯되는 욕망의 절대성을 정언적 윤리명제로 강조하면서 욕망을 긍정하는 것이 정신분석의 특이성이다.

이하에서 우리는 세 가지 논점을 중심으로 정신분석과 불교 이론을 함께 고찰해 보려고 한다. 편의상 세 논점을 구분했지만 결국 욕망을 중심으로 두 이론의 접점을 살펴보면서 그것이 오늘의 우리 삶에 어떤 실천 방향을 제시하는지 생각해보는 것이 이 글의 목표이다. 짧은 시론에서 동서양의 대표적인 두 사상을 함께 다룬 다는 것이 여러 한계가 있겠지만 욕망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에게 성찰을 위한 나름의 화두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2. 무아론과 상상계 이론

무아론(無我論)은 갈애(渴愛)의 소멸과 해탈(解脫)을 주장하는 불교 이론의 출발점이자 이론적 근거라고 할 수 있다. 모든 번뇌와 윤회가 자아라는 고정된 실체를 가정하고 자아에 귀속되는 탐심에 집착해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무명(無明)이란 자아가 오온(五蘊)의 산물이며 우리가 접하는 세상 만물은 상호작용하는 일체 원인들에 의한 부단한 생성과 소멸의 현상임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상태를 말한다.

무아론은 거울에 비친 내 신체 이미지에 대한 나르시시즘 동일시를 통해 만들어진 자아가 오해의 산물이라는 라캉의 상상계 이론과 통한다. 불교가 경험적 현상에 불과한 자아에 매달리는 아집을 벗어나 진여(眞如)의 본질을 깨달을 것을 주장하듯, 라캉은 주체의 분열을 인정하고 자아가 아닌 진정한 주체성의 회복을 욕망의 윤리에서 강조한다. 이제 좀 더 자세히 불교의 무아론과 정신분석의 자아이론을 살펴보면서 두 이론이 만나는 지점도 찾아보자.

불교의 무아론은 붓다의 가르침인 《무아상경(無我相經)》을 비롯한 많은 경전에서 언급되는데 우리가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 실상 오온의 작용에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오온이란 물질적인 것을 지칭하는 색(色)과 심리적인 것을 일컫는 명(名)으로 나뉘며, 명은 다시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집합이다. 오온에서 말하는 색은 질료적 의미의 육체뿐 아니라 우리 몸의 감각기관과 그것에 상응하는 대상을 포함하는 것으로 나머지 네 가지와 분리해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또한 심리적 과정인 명의 작용에서 수는 감각적인 작용, 상은 지각 혹은 표상작용, 행은 의지와 행동, 식은 식별 작용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동일한 실체처럼 지속하는 자아는 존재하지 않고 계속해서 작용하는 행(行)의 덩어리로서 오온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모든 행동과 의지의 근거로서 설정될 수 있는 하나의 단위이자 인격적 존재인 자아가 아니라 오로지 이 다섯 가지 요소만 있다는 것이다.

“오온이 있다. 어떤 다섯인가? 색수상행식 오온이다. 만일 모든 사문이나 바라문으로서 자아가 있다고 본다면, 그것은 모두 이 오온에서 자아를 보는 것이다.”

내가 내 몸을 통해 감각을 느낄 수 있고 의지를 통해 무언가를 움직이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데 왜 자아가 오온에 불과하다는 것인가? 붓다가 설법하는 무아론의 근거는 다음에서 보듯 스스로를 온전히 주관하고 무상의 존재로 만들 수 있는 진정한 자재력(自在力)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색은 자아가 아니다. 만일 색이 자아라면 이 색은 소멸하지 않을 것이며 색에 대해 ‘나의 색이 이와 같이 되어라.’ 또는 ‘나의 색이 그와 같이 되지 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색이 자아가 아니며 따라서 소멸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그것에 대해 ‘나의 색이 이와 같이 되어라.’ 또는 ‘나의 색이 그와 같이 되지 마라.’고 말할 수 없다.”

불교에서는 자아가 오온에 선행한 실체로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변화하기 때문에 진정한 내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결국 일체의 작용은 오온의 상호 연기적 작용의 산물에 불과한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헛된 자아 관념에 매일 때, 모든 감각기관과 그 대상이 부딪치면서 일으키는 온갖 괴로움에 시달리게 된다. 괴로움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무지가 더 근본적인 번뇌의 원인이다.

무아론은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 일체를 12처와 18계로 보면서 그것의 작용에 따른 만물의 소멸과 순환을 ‘12지 연기설(緣起說)’의 메커니즘으로 설명하는 사상으로 구체화된다. 12지 연기설이란 인연에 따른 생성의 사슬법칙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모든 존재가 계속해서 변하고 소멸한다면 항구적인 존재는 있을 수 없다는 이론이다.

우주는 무명(無名)→행(行)→식(識)→명색(名色)→육입(六入)→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우비뇌고(老死憂悲惱苦)의 순환에 다름 아니다. 이 순환은 일회적이 아니라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끊임없는 연기의 사슬이다.

물론 불교의 무아론은 심리적인 인과성 전체나 세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회의주의나 허무론이 아니다. 불교는 단지 동일성, 자족성, 실체성으로 파악되는 자아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지 인간의 모든 행위나 경험세계가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밀린다왕문경》에서 나가세나가 오온과 경험적 자아의 관계를 램프의 비유를 통해 설명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나가세나의 설명에 따르면 오온이 연료라면 경험적 자아는 이 연료에 기대어 타오르는 불빛과 같다. 불빛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결국 연료이며 불빛은 시시각각 변하는 하나의 현상이지만 지속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불교가 선악의 근거를 자업자득과 업을 통해 설명하면서 법(달마)에 대한 바른 깨달음과 수행을 통해 해탈의 경지에 들어갈 것을 강조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삼매를 닦고 마음에 내재한 본성을 깨달아 부처가 된다는 가르침은 진리의 여정에서 주체의 행위를 전제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음으로 라캉의 자아 이론을 살펴보자. 라캉은 인간은 상상계의 산물인 자아와 상징계에 자리 잡는 주체로 분열되어 있으며 언어 속에서 근본적인 존재결여를 느끼면서 살 수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플라톤 이래 철학자들은 언제나 인간이 세계의 본질과 불변하는 진리인 이데아를 꿰뚫어보는 이성적 능력을 선천적으로 소유하면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강조했지만 라캉은 사물을 직관하는 의식 작용이 실은 거울 이미지의 착각에서 기원한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어떤 개념을 만들고 이해하거나 분석할 때 이미지의 작용이 불가피하게 개입하는데 이것의 기원은 ‘거울단계’이다.

생후 6~18개월 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면서 기뻐한다. 그리고 자신과 마주한 이미지를 자신의 실체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기준 삼아 세상과 관계를 맺는다. 예컨대 아기가 손에 뭔가를 쥐고 거울을 보다가 자신을 알아보면 손에 든 물건과 거울 속에 그것을 쥐고 있는 자신의 이미지를 번갈아 보면서 대상관계를 터득하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

이때 거울에 비친 응결된 이미지가 자아의 원형이다. 여기서 자아는 내 것이면서도 가시적 장에 투영된 시각 이미지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실은 나와 대립하는 것이기도 한데 라캉은 이것을 ‘타자-자아’(alte-ego)라 부른다. 주체가 그것을 이미지가 아니라 존재처럼 수용하는 것은 그것이 타자는 물론 대상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존재한다는 의식을 확신하게 하는 주체성에 대한 확신을 지지해주기 때문이다. 인간은 상상적 매개를 거치지 않고서는 세계에 대한 표상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데 자아의 기능은 한편으로는 타자적인 질서에 대한 예속을 가져온다.

“우리가 말하는 자아는 상상적인 예속과 절대로 분리되지 않는다. 상상적 예속은 자아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그의 지위에서 기원, 그리고 그의 현실태에서 그 기능까지 온통 타자를 통해 그리고 타자를 위해 구성한다.”

주체는 이렇게 타자 속에서 스스로를 알아보면서 존재에 대해 확신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타자−자아’라는 매개물 없이는 우리는 대상을 객관화하고 마음에 표상하면서 주체의 입장에서 사유를 전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거울 이미지를 자신의 모습이라고 확증해 주는 것도 자신의 옆에 있는 엄마라는 타자다.

이처럼 우리가 자아에 고착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이미지에 대해 나르시시즘과 타자의 인정이 동시에 작용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자아는 주체의 본질을 오인하게 하고 소외시키는 근본 원인이다. 라캉은 자아와 주체의 근본적 균열이 봉합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자신과 타인에 대해 공격적인 성향을 띤다고 설명한다. 자아가 나면서 동시에 타자라는 이러한 불일치가 주체를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주체가 자신의 욕망을 상상적 방식으로 추구하면서 타자의 인정을 통해 그 정당성을 구하는 것도 거울단계에 그 뿌리가 있다.

이렇게 자아를 중심으로 구성된 세계가 바로 상상계다. 상상계는 언어에 의해 기호화되고 구조화되면서 주체가 삶을 영위하는 현실(reality)의 중심 내용이다. 그리고 자아는 현실의 주인이자 준거점으로 세계를 표상하고 의식 가운데 환원시키면서 망상적 구조를 심화하는데 이것이 바로 라캉이 말하는 근원적인 소외 상태다. 불교가 무아론을 통해 자아의 비실체성과 욕망의 헛된 속성을 비판한다면 라캉은 주체성에 내재한 구조적 분열을 통해 욕망이 소외되는 사태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과 사유의 명증성을 인식과 실천의 출발점으로 삼은 모든 철학적 경향을 편집증적 세계관이라고 비판한다. 철학은 참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인식에서 주관성과 감각적 불확실성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자신을 모든 것의 기원으로 설정하려는 나르시시즘 성향과 주체−객체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게 라캉의 비판이다.

그러나 비록 상상계에 예속된 자아가 우리를 소외시키고 타자의 인정을 향한 끝없는 욕망의 순환 속에 가두지만 자아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고 라캉은 말한다. 소외야말로 주체의 본질적 사태인데 이로부터 존재와 대상 사이에서 분열되는 욕망의 여정이 시작된다.

3. 갈애(渴愛)와 욕망

사성제(四聖諦)에서 보듯 한갓 그림자인 자아에 매달리는 집착은 인간에게 고통과 업(業)의 영구한 순환을 가져오고 모든 불행의 원인이 된다. 불교에서는 자아에서 비롯되는 탐욕을 갈애라고 부르며 경계하는데 그것이 우리 마음을 어지럽히면서 미망의 악순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불교는 인간이 자신의 참된 본성과 참된 법을 알지 못하는 마음의 오염에서 갈애가 비롯된다는 주지주의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참된 깨달음을 강조한다.

반면에 라캉은 순수 욕망과 자아가 주인이 된 소외된 욕망을 구분하면서 욕망을 윤리적 지평까지 확장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불교는 욕망을 부정하고 정신분석은 욕망을 긍정하면서 두 사상이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양자가 맹목적인 탐심을 경계하고 존재의 순수성을 회복할 것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먼저 불교의 갈애에 대해 살펴본 후 라캉이 말하는 욕망을 이것과 비교해 보자.

불교는 오온을 우리 신체의 감각기관을 포함하는 6근과 이것에 반응하고 작용하는 6처의 상호작용을 아우르는 것으로 설명하면서 여기에 6식을 더한다. 이런 작용은 서로 연결되고 결합하면서 세계를 끝없는 연기 작용과 생성−소멸 속에서 구성하는데 이러한 상의연관성과 순환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의 경계에 집착하는 식이 바로 무명이다.

갈애는 이러한 무명의 상태에서 감각적인 것을 탐하면서 경계 즉 자아의 욕탐에 매여 해탈로 나아가지 못하는 질곡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고통과 그 원인, 그것의 소멸과 그것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한 무지인 무명”이 갈애의 원인으로 사성제를 올바로 깨우친다면 갈애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에리히 프롬이 《서양철학과 선》에서 강조했듯이 불교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satori)과 이를 통한 존재 회복을 강조하는 선적 경향이 강하다.

갈애를 보통 세 가지 양상으로 설명하는데 “욕망의 대상에 대한 갈애(欲愛),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비존재에 대한 갈애(非有愛)”(Vinaya I. 6.20)가 그것이다. 욕애는 탐욕과 탐심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대상을 좇는 것이며 성적 욕망과 같은 쾌락의 추구를 포함한다. 유애는 생명을 보존하려는 욕망과 관련되며, 비유애는 생의 소멸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이라 할 수 있다.

갈애는 쾌락의 대상에 탐닉하는 욕탐을 말하며 근본적으로는 내가 존재한다는 그릇된 집착에서 비롯된다. 갈애는 일체(一切)가 무아(無我)라는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감각적 대상을 통해 만족을 추구하면서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다.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데 나의 욕망을 채우려고 하니 번뇌가 생기는 것이다. 인간이 유기체인 이상 대상에 대한 욕애는 어찌 보면 필연이다.

그러나 문제는 욕애가 우리를 끊임없는 긴장과 갈애의 악순환 속에 밀어 넣는다는 것이다. 설사 일시적으로 대상을 통해 만족을 해도 우리의 마음과 몸은 계속해서 새로운 쾌락의 대상을 갈망하기에 해소되지 않는 욕망이 계속되면서 괴로움을 주는 것이 첫 번째 갈애의 효과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갈애는 대상 자체가 아니라 영겁의 윤회 속에 지속하는 존재 자체의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대상에 매이지 않아도 생로병사를 경험하면서 사는 것 자체가 괴로움의 원인이 될 수 있는데 미망에 현혹되어 그러한 감각적 존재를 지속하고자 갈망하는 것이 유애와 비유애의 상태다. 이런 뜻에서 갈애는 근본적으로 명명하는 존재인 육체와 자아에 대한 부정을 전제한다고 할 수 있다.

불교는 두 가지 종류의 열반을 구별하는데 유여열반(有餘涅槃)은 이러한 탐욕이나 어리석음을 제거하지만 여전히 오온의 토대가 남아 있는 상태다. 무여열반(無餘涅槃)은 그 오온조차 사라지고 열반만이 남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오온의 원인이 아니듯이 오온의 소멸도 사실은 불가능하다.

갈애가 번뇌의 원인이라고 해서 자살과 같은 방법으로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라는 말이다. 근본적인 것은 나와 우주가 일체를 이루며, 자아의 망집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잘못된 윤회의 사슬에 매여 고통을 당하면서 생사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명의 상태를 벗어나는 것이다.

“비롯됨이 없는 나고 죽음에서 무명에 덮여 애욕의 결박에 묶여, 긴 밤 동안을 쳇바퀴 돌 듯 돌면서 괴로움의 근본 끝을 알지 못한다.”

결국 불교의 갈애 이론은 무명에서 벗어나 진여를 회복하기 위해 바른 성찰과 지혜, 즉 반야를 강조한다.
여기서 불교가 말하는 갈애(渴愛)와 정신분석이 말하는 욕망(desire)의 차이점과 정확한 의미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 프로이트를 계승한 라캉은 욕망이 인간의 본질이며 “프로이트가 발견한 세계는 사물들의 세계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욕망의 세계”라고 말하면서 욕망을 정신분석의 핵심 범주로 설정한다.

라캉은 프로이트가 히스테리 환자의 꿈, 정상인들의 농담, 망각, 실착 행위를 통해 분석한 무의식의 역동성이 결국은 욕망의 표현이라고 해석하면서 ‘욕망의 주체’를 정신분석 탐구의 출발점으로 설정한다.

그런데 라캉이 말하는 욕망은 우리가 통속적으로 이해하는 그런 욕망이나 갈애가 아니다. 라캉은 욕망을 대상에 대한 탐욕이 아니라 ‘존재결여(lack of being)’의 표현이라고 정의한다. 욕망은 겉으로 보면 불교가 부정하는 갈애처럼 어떤 대상에 대한 집착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존재 결여에서 비롯되기에 본질상 잃어버린 존재를 되찾고자 하는 열정(passion of being)으로 정의된다.

존재결여는 언어 때문에 발생하는데 언어는 헤겔이 강조한 것처럼 ‘사물의 살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사물을 기표로 바꾸면서 개념을 통해 사유하고 의사소통을 하지만 이것은 사물에 대한 직접적인 접촉을 박탈하는 것을 대가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말하는 주체는 늘 상실과 구조적인 공허에 시달린다. 라캉은 언어와 결여의 상관관계를 욕구(needs), 요구(demand), 욕망(desire)으로 구별하면서 설명한다.

욕구는 순수한 생물학적 결핍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대상에 의존적이며 필요가 충족되면 해소된다. 예컨대 갈증이라는 욕구가 있을 때 물이라는 대상을 통해 이를 충족하는 과정을 떠올리면 된다. 욕구는 불교가 말하는 욕애에 가깝다. 그런데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장기간의 양육기간을 거치며 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타자에게 의존한다. 이러한 의존성 때문에 욕구는 언어를 매개로 타인에게 전달되는 요구로 바뀐다. 아이의 욕구는 타자인 어머니를 통해 인정되고 말로서 표현될 때 비로소 의미가 생긴다.

이때 아이의 욕구를 요구로 바꾸도록 강제하고 언어적으로 개입하는 타자(어머니)의 기능을 라캉은 대타자(Other)라고 부른다. 대타자는 언어를 통해 아이의 욕구를 기호화하고 상징계에서 소통되게 하며 아이를 주체로 인정해주는 타자의 본질적 부분이다. 반면에 소타자(other)는 주체가 마주하는 타자로 주체의 파트너처럼 상상적으로 가정되는 존재다.

대타자, 소타자의 구분은 상징계와 상상계의 차이를 통해 이론화된다. 아이는 대타자의 법에 따르고 자신의 요구를 인정받고자 하면서 언어에 더욱 종속된다. 그런데 욕구가 요구로 바뀔 때 불가피하게 어떤 간격이 발생한다. 아이가 실제로 원하는 것은 욕구를 해소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무한정 공급해 주고 인정해 줄 대타자의 무제약적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제약적 사랑은 실제 삶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언제나 요구 속에서 전달되지 못하거나 왜곡되는 부분이 발생하는데 라캉은 이 틈에서 욕망(desire)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욕망은 욕구가 요구로 바뀔 때 충족되지 못하고 부족함처럼 남는 결여이며, 이것은 주체의 욕망이 타자의 인정에 의해 승인된다는 조건에서 발생하는 괴리다. 욕구와 요구의 차이가 라캉이 말하는 근본 결여이고 욕망은 이 속에서 대상이 아니라 대상 너머에 있는 결여 자체를 겨냥한다. 언어 때문에 만들어진 결여의 효과는 어떤 대상을 통해서도 채워지지 않기에 욕망은 끊임없이 이 대상에서 저 대상으로 옮겨가면서 끝없이 되풀이된다.

라캉은 욕망은 어떤 경험적인 대상에 의해서도 절대 충족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욕망의 유일한 대상을 ‘오브제 a’로 부른다. ‘오브제 a’란 주체의 결여를 충족시켜 줄 것처럼 작용하는 환상의 기능으로 욕망의 원인이자 동시에 환상에 의해 욕망의 조준점에 놓이는 대상이다. 환상이 중요한 것은 언어 속에서 결여되는 것은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라 존재 자체이기 때문이다. 채울 수 없는 결여에 직면하여 주체는 환상을 통해 자신을 지탱한다. 그렇기 때문에 환상은 욕망의 절대적인 버팀목이다.

라캉은 ‘불안(Angoisse)’이라고 제목이 붙은 세미나에서 욕망의 망상적 성격을 불교가 강조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라캉은 욕망은 환상이기에 언제나 덧없고 괴로움을 준다거나 그것을 깨뜨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환상에 의해 감춰지면서 욕망을 추동하는 근본적인 결여를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라캉이 소외된 욕망과 참된 욕망을 구분하고 욕망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대상과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라캉은 욕망을 주체가 자신의 존재를 정립하고자 하는 의지로 정의하면서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정신분석의 윤리라고 말한다. 라캉이 욕망을 삶의 근본적 지평에 놓는 이유는 이 때문이며 정신분석은 이 점에서 불교와 차이를 보인다. 갈애의 소멸을 주장하는 불교와 달리 라캉은 환상을 통해 존재로 향하는 욕망의 승화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4. 해탈과 진리

이제 마지막으로 두 사상이 강조하는 궁극적 목표와 실천적 대안을 해탈과 진리를 중심으로 정리해 보자. 갈애가 일으키는 삶의 고통을 얘기하고 무아론을 통해 불교가 강조하는 바는 결국 해탈이다. 불교는 미망에 현혹되지 않는 개오(開悟)를 통해 열반적정(涅槃寂靜)의 경지에 도달할 것을 강조한다. 모든 것은 결국 갈애와 무명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인과의 사슬에 매인 집착을 끊고 단박에 깨달음을 얻는 돈오(頓悟)의 진리를 얻어야 한다. 돈오란 우리 안에 내재한 불성을 발견하고 상호의존성[相依性]이라는 제법의 규칙성[法決定], 즉 연기성(緣起性)을 발견하는 것이다.

라캉은 분석이 종결될 때 주체는 욕망 가운데 작용하는 환상 자체를 가로질러 환상이 무대화하는 것이 결국 자신의 존재임을 알면서 욕망에 대한 바른 태도를 정립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1959-1960년에 진행한 ‘정신분석의 윤리’라는 제목의 세미나에서도 윤리는 실재를 그 자체로 겨눠야 한다고 말한다. 실재는 언어에 대해 언제나 ‘탈존(ex-istence)’하는 주체의 진정한 자리를 뜻한다. 두 사상의 차이점은 있지만 속박의 조건들을 적극적인 자유의 조건으로 만드는 주체의 태도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불교에 따르면 개체가 겪는 모든 고뇌와 고통의 원인은 사물의 진정한 본성을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발생한다. 무지를 벗어나 해탈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깨달음의 지혜가 바로 ‘반야(般若)’다. 반야는 법(法, 다르마)의 이치에 계합한 ‘더없이 완전한 지혜’인 ‘반야바라밀’로 부르며 반야를 얻어야 성불하게 된다. 반야는 자아의 실체성과 항존성을 부정하는 무심(無心)의 마음일 뿐 아니라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견성성불이란 본래적인 인간의 성품에 불성이 이미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깨닫는다면 도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본래 성품이 바로 부처이며 이 본래 성품을 떠나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본래 마음은 청정했지만 거짓 의식과 염오에 의해 무명의 상태에 처해 있기 때문에 반야를 통해 무명을 깨뜨리고 번뇌의 원인인 집을 벗어나야 한다고 불교는 강조한다. 정신분석이 욕망의 윤리에 대한 충실성을 그 자체로 강조한다면 불교는 올바른 지혜의 획득을 목표로 한다. 불교의 한 종파인 선불교(禪佛敎)는 특히 깨달음을 통한 해탈을 강조한다. 선이란 무엇인가? 선은 일종의 수행 방법이자 수행의 목표, 즉 가장 완전한 상태의 마음에 도달한 상태이기도 하다. 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야가 필수적이다.

“선은 그 본질에 있어서 자기 존재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기술이며, 속박으로부터 자유로 향하는 길을 가리킨다.”

깨달음이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 안에 내재한 불성을 재발견하는 것이며, 팔정도(八正道) 같은 수행을 통해 획득할 수 있다. 해탈의 경지를 가능하게 하는 반야는 경험적 지식이나 사물을 변화시키는 실천적 앎이 아니라 나 자신이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꾸는 것이기도 하다. 다음 어느 선사의 말을 보자.

“내가 깨닫기 이전에는 강은 강이었고, 산은 산이었다. 내가 깨닫기 시작할 때는 강은 강이 아니었고, 산은 산이 아니었다. 이제 내가 깨달았을 때는 강은 다시 강이고, 산은 다시 산이다.”

이러한 수수께끼 같은 말은 모든 것이 내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반야란 결국 사물의 궁극적 본성과 법을 깨닫고 하나하나의 번뇌를 끊으면서 열반에 이르는 실천적 앎이다. 불교는 해탈과 성불을 강조하고 깨달음을 통해 모든 고통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고 보는 점에서 낙관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욕망의 무한성과 실재의 불가능성을 말하는 라캉의 비관적 사상과 대조되는데 불교는 결국 궁극적인 번뇌의 소멸을 겨냥하는 종교적 사유이기 때문이다.

욕망을 존재결여로 바라보는 라캉의 사상은 존재의 무(nothing)적 본성과 그것을 욕망을 통해 드러내는 진리 개념을 강조한다. 라캉이 말하는 진리는 반야와 같은 초월적인 지혜가 아니라 욕망의 길에서 불가능한 대상인 실재를 그 자체로 직시하면서 실재와의 관계로 욕망을 정립하는 것이다. 욕망이 존재결여라고 할 때 결여는 경험적인 결핍과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상징화와 상상적 작용을 벗어나는 실재(real)의 본성과 관련이 더 많다.

여기서 실재는 언어 너머에 존재하는 본질이기도 하고 언어 속에서 소외되는 우리 존재를 뜻하기도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언어와 이미지가 만드는 현실(reality)임에 반해 실재는 그것에 포함되지 않지만 언제나 지속하면서 현실을 뒤흔드는 원인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라캉은 실재는 불가능한 것이고 욕망은 궁극적으로 실재를 향한다고 말한다. 실재에 대한 라캉의 설명을 보자.

“주체가 걸어가는 길은…… 불가능한 것의 두 벽 사이를 통과한다. ……불가능한 것은 반드시 가능한 것의 반대가 아니다. 혹은 오히려 가능한 것의 대립물이 당연히 실재이므로 우리는 실재를 불가능한 것으로 정의해야 할 것이다.”  

이 불가능성이 언제나 상징계의 구멍으로 남는 존재의 본 모습이다. 이러한 불가능성을 전면화하고 주체 스스로 이 불가능성과 마주하는 것이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진리개념의 본질이다. 실재의 불가능성은 오히려 지식과 과학의 실패로 나타나기에 라캉이 보기에는 무지나 환상이 진리에 더 가깝다.

라캉이 욕망의 환상적 성격을 강조하고, 욕망은 언제나 무의식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욕망이 되찾고자 하는 대상이 실재에 속하기 때문이다. 실재가 언어화에 저항하기에 의식적인 주체는 결코 그것에 도달할 수 없으며 오히려 말실수, 거짓말, 알 수 없음 같이 의식의 한계와 통제를 벗어난 무의식 효과들이 실재가 존재함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실재에 대해 혹은 존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진리는 우리가 실재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언어의 한계가 역설적으로 그것을 벗어나는 대상이 존재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재의 불가능성에 직면해 주체는 환상을 통해 그것에 도달하고자 한다. 여기서 환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실재의 빈자리를 감추면서 그 속에서 욕망을 지속시킨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라캉은 《세미나 10권 불안(Angoisse)》에서 “욕망은 망상이다”라는 깨달음이 불교가 주는 진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라캉은 욕망이 근본적으로 망상이기에 그것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욕망이 어쩔 수 없이 환상과 맺는 구조적 연관성을 더 강조한다.

이것은 욕망의 망상적 성격을 경계하면서 갈애의 소멸을 주장하는 불교와 많은 차이가 있다. 라캉은 망상이 근본적으로 존재의 무적 본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진리 개념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 욕망이 존재결여라고 한다면 올바른 욕망은 결여를 다른 대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불가능성을 그 자체로 보여줄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환상을 지속적으로 무대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라캉이 욕망의 환상적 성격을 긍정하는 것은 그것이 실재의 무적인 성격, 즉 결여에 대응하는 일종의 전략이기 때문이다. 라캉의 말을 보자.

“문제가 되는 진리는 최후의 진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망상의 옆에서 존재의 기능을 엄밀하게 할 것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욕망이 망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욕망이 이 아무것도 아닌 것(rien) 위에서 어떤 지지물, 어떤 출구, 어떤 목표를 갖지 않는다는 말이다.”

라캉은 선불교가 강조하는 무(無)에 대한 적극적인 부정의 사고를 높이 평가하면서 선불교의 진리는 ‘대상을 갖지 않음(ne pas avoir)’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실재계에 남겨진 결여는 어떤 대상으로도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욕망은 대상에 대한 탐심처럼 흘러서는 안 되며 오히려 무에 대한 태도로 정향되어야 한다. 이것은 대상과 관계에서 욕망은 언제나 망상이라는 구조로 정식화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욕망이 환상 가운데서 마주하는 것, 즉 대상이 아닌 그 너머를 바라볼 때 대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 자신의 존재이다. 그러나 자칫하면 환상 자체에 매몰될 위험도 있는데 특히 상상계적 자아가 주인 행세를 할 때 그런 일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소외된 욕망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환상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취해야 한다.

라캉은 불교가 욕망과 망상을 연결하는 것이 정신분석이 말하는 환상이론과 통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환상은 맹목적으로 그것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결단에 의해 존재에 대한 열정처럼 재정립될 때만 우리 삶에서 긍정적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미래를 전혀 알 수 없지만 미래에 대한 긍정적 기대와 낙관적인 환상은 현재의 삶에 희망을 주는 활력소가 된다. 착각이 사람에게 해가 되지만 자신에 대한 긍정적 착각이 자아존중감을 심어 주는 것도 비슷한 이치다.

라캉은 욕망에 대한 윤리적 충실성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존재결여를 벗어날 수 없는 근본 조건으로 인정하면서 실재에 대한 열정으로서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는 말이다. 욕망이 결여라는 것은 이처럼 주체가 자신의 삶을 실재와 관련하여 실현하는 윤리적 삶의 조건이 되는데 이것이 라캉 사유의 특징이다.

5. 나가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불교와 정신분석은 인간 본성에 대한 설명이나 욕망 이론에서 많은 차이점을 보이면서도 의외로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불교가 반야의 지혜를 통해 자아의 무상성과 상호연기적인 우주의 법을 깨닫고 무명의 맹목성에 휘둘리는 갈애를 벗어날 것을 강조하는 것처럼 정신분석도 소외된 욕망에서 탈피하여 진정한 존재를 회복하라고 권면한다.

또한 모든 것을 개념과 도식으로 설명하려는 서구의 수학적이고 합리적인 사유의 함정을 경계하고 나의 본성을 그 자체로 바라보는 지혜를 강조하는 불교나 언어를 벗어나는 실재의 진리를 실천적 맥락에서 강조하는 라캉의 사유도 비슷한 점이 있다.

하지만 깨달음을 통해 무명을 완전히 제거하고 해탈의 경지까지 도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에서 우리는 불교가 가지는 종교적 목표, 즉 초월적 경지인 열반을 탐색하는 구도적 열정을 볼 수 있다. 불교도 어찌 보면 해탈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데 불교가 가지는 종교의 기능적 차원을 고려할 때 이는 당연한 귀결이다.

반면에 정신분석은 말하는 존재인 인간의 실존적 한계인 결여를 그 자체로 인정하고 오히려 욕망을 존재 회복의 의지로 긍정한다. 신경증을 비롯한 정신장애를 치료하는 임상에서도 치료의 끝에서 ‘환상 가로지르기’를 제시하는데, 환상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역설적 운명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분석의 끝은 프로이트가 불안의 출발점이라고 했던 근원적인 분리, 즉 출생과 비슷하다.

분석이 성공한다면 존재의 비어 있음과 주체의 궁핍함을 그 자체로 인정하면서 대타자의 과도한 향유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상징계나 상상계를 초월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속박의 조건들을 적극적인 자유의 조건으로 만드는 주체의 윤리적 태도와 연관된다.

불교와 정신분석 이론의 차이점이나 공통점을 보여주는 것보다는 서두에서 제시했듯이 그것이 우리 삶과 관련해서 가지는 실천적 유용성에 더 주목해야 할 것이다. 진리는 어느 한 사상에 의해 독점되지 않으면 삶 자체가 진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

 

김석
건국대학교 자율전공학부 강의교수. 프랑스 파리8대학 철학박사(2005년, 박사논문 〈라캉의 욕망하는 주체개념에 관한 연구〉). 철학아카데미, 건국대, 고려대, 시립대, 충북대 등에서 철학과 교양을 강의했다. 주요 저서로 《에크리, 라캉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 《프로이트 & 라캉, 무의식에로의 초대》 등이 있고 역서로 《라캉, 주체개념의 형성》 등이 있으며 〈욕망하는 주체와 욕망하는 기계〉 〈시니피앙 논리와 주이상스 주체〉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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