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 불교와 욕망

1. 욕망과 삶

중국의 선사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 대답은 자명하다. ‘깨달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깨달음이라고 하는가? 그 대답도 자명하다. 그것은 열반(涅槃), 즉 ‘고(苦)로부터의 해탈(解脫)’이다. 그렇다면 선(禪)에서 우리의 해탈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라고 볼까. 그 대답도 자명하다. 번뇌(煩惱)이다. 선사들이 번뇌를 열반이라는 경지에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로 보고 있다면 그것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마음[心]’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자세에서 비롯된다고 선에서는 본다. 그렇기 때문에 선사들은 무명에서 비롯된 그릇된 가치관을 혁파하고, 그것을 통하여 오염된 삶의 방식을 정화하는 것은 마음공부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다른 한편 우리의 삶은 필연적으로 욕망을 수반한다. 그렇다면 깨달음은 욕망 속에서 욕망에 머무르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욕망이라는 것 자체를 없앰인가. 욕망은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극복되어야 하는 것인가. 깨달음의 증득이 가져오는 경지는 욕망을 활발발하게 살리는 것인가, 아니면 욕망을 절멸시키는 것인가. 대답하기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이 글은 중국 선불교를 주로 하여 이러한 참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에 대하여 검토하고 정리해 보라는 주문에 대한 필자 나름의 답이다.

2. 중국 선불교의 ‘인간해방’ 선언

중국 선불교는 기라성 같은 조사들로 점철된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선사상사적 의미에서 크게 의미 있는 인물은 혜능, 마조, 임제 그리고 대혜까지 네 선사이다. 또 그들이 표방한 성(性), 심(心) 그리고 인(人)은 선종사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성숙되고 발전되어 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거기에 대하여 대혜는 ‘방법론적인 자각’을 통하여 인간 이해에 대한 보다 빠른 경절처(徑截處)를 알려 준다. 따라서 이 네 선사를 통해서 선불교 인간 이해의 함의를 파악할 수 있다.

1) 혜능의 성(性)

중국 선종의 실질적인 창시자 혜능(六祖慧能, 638∼713)은 마음의 깨침을 중시한다. 그는 도는 오직 마음을 깨침으로만 증득된다고[道由心悟] 주장하고, 수행의 계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심지를 증오함[頓悟見性]을 말하면서, 마음이 곧 부처[心卽佛]이고,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을 갖추고 있음[一切衆生悉有佛性]을 설파한다. 혜능은 자심(自心)과 자성(自性)의 관계를 자심이 자성에 귀의하는 관계로 본다.

즉 자심은 자성을 둘러싼 심성(心城)의 역할을 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자성 가운데에 있고 지혜 그 자체는 항상 밝기 때문에, 만약 선지식을 만나서 바른 가르침을 받고 스스로 그 미망을 떨쳐버리면, 자성 가운데 모든 존재가 함께 모습을 나타내게 된다. 청정법신불이란 자심을 가진 우리가 자성에 귀의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참 부처에 귀의하는 것이 된다.

상기한 표면적인 주장 속에 놓여 있는 혜능의 중국 사상사에 대한 기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점은 중국 전통 불교의 추상적인 본체로서의 성격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인심으로 재해석한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혜능은 중국 전통 불교가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외재적 종교로서의 특징을 내재적인 종교로 변성시킴과 아울러 부처에 대한 숭배를 자심에 대한 숭배로 질적인 변화를 만들어 낸다.

그는 일체를 자심자성에 귀일시킨다. 혜능에 의하면 미망번뇌와 대혜해탈도 역시 동일한 주체의 다른 활동이며 결코 이 번뇌의 주인공인 인간을 떠나 따로 보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즉 혜능이 말하는 바의 깨달음은 ‘인간의 자성’을 몰록 발견[頓見]하는 것이다. 이것은 본체로서의 우주적 자성을 탐구하는 데 집착하지 않고, 실천적 의미를 지닌 인간 해석을 통하여 인간을 본체로부터 해방시켰다는 함의를 가진다.

혜능이 말하는 바의 자성을 돈오한다는 것은 상기한 의미 말고도, 더 나아가서 또 하나의 다른 의미를 가진다. 혜능은 ‘경계를 대하여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심불기(心不起)’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여기며 ‘경계에 대하여 마음을 일으키는’ ‘심수기(心數起)’를 강조한다. 즉 깨친다는 것은 ‘다시 마음을 일으킴이 없는’ 것이 아니라, 무여열반에 들더라도 ‘다시 마음을 일으키는’ ‘대경(對境)에서의 혜용(慧用)’이라는 것이다.
혜능은 돈오견성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만법에 모두 통하고, 만행을 모두 갖추어 일체를 떠나지 않고, 다만 법상을 떠나서 무소득을 짓는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불법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떠나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을 떠나서 깨달음을 찾는 것은 마치 토끼의 뿔을 구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것은 결국 일체의 모습[相]에 대한 집착이 없이, 일체의 모습 그 가운데서, 일체의 모습과 막힘없이 교섭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된다.

즉 돈오는 대상경계 속에서, 다시 말해서 번뇌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번뇌 속에 있으면서 번뇌에 물들지 아니하는, 자성의 활용함을 지향하는 ‘대경혜용’을 의미하기 때문에, 무소득 혹은 돈오무심이라고 불리는 돈오의 경지는 결국 대경혜용을 강조함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심불기(心不起)의 수정(修定)을 위주로 하는 선법은 경계에 대한 적극적인 활용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혜능의 선법은 단지 자성의 의미로서 정혜의 평등성을 깨닫는 것뿐만이 아니고 대상경계 속에서 그것을 활용함을 지향하는 대경혜용의 사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좌선을 통하여 청정한 본심을 관찰하고자 하는 응심입정(凝心入定)의 방법은 ‘청정함에 속박된 것’에 불과하게 된다. 즉 신수를 중심으로 하는 북종선이 ‘관조(觀照)’를 중시한다면, 혜능을 대표로 하는 남종선은 ‘활용(活用)’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종선이 수정견성(修定見性)을 특징으로 한다면, 혜능의 남종선은 돈오견성(頓悟見性)을 특징으로 한다. 따라서 남종선이라는 새로운 선사상의 출현을 북종선과의 단절이라는 시각에서 보아서는 안 된다.

남종선은 그때까지의 전통적인 선법을 북종선이라는 언명에 함의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중국 선의 흐름이라는 시각에서 그 연결 고리를 찾아야 한다. 그것은 본체를 작용보다 중시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며, 더 나아가서는 본체가 잠식한 작용의 영토를 회복하려는 문화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한마디로 ‘수정적 선법(修定的 禪法)의 약화(弱化)와 혜용적 선법(慧用的 禪法)의 강화(强化)’이다.

전통적으로 달마를 중국 선종의 초조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중국선이라는 새로운 선문을 처음으로 열어젖힌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조는 혜능이다. 그것은 실천 형태의 측면에서는 점수에서 돈오로의 변화를 의미하고, 심성관과 수증관의 측면에서는 사망귀진(捨妄歸眞)과 수인증과(修因證果)에서 일체개진(一切皆眞)과 정혜불이(定慧不二)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혜능이 새롭게 연 이러한 선법은 이후 중국을 위시하여 한국이나 일본으로 전파된 동아시아 선불교의 기본 토대가 되며, 특히 임제종의 간화선으로 계승된다. 따라서 혜능의 선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바로 중국선, 더 나아가서 동아시아의 선불교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된다.

2) 마조의 심(心)

중국 선불교는 달마로부터 시작하여 6조 혜능을 그 발원지로 한다. 그러나 사상적으로나 교단적으로 ‘중국 선종의 실질적인 형성’은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에 의하여 시작된다.

마조의 선법은, ‘지금 각자 자신의 마음이 부처이다.’라는 언구와 ‘평상심이 도’라는 표현을 통해서 잘 알 수가 있다. 마조가 표방하는 바의 ‘평상심(平常心)’은 깨달은 자의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고, ‘마음이 부처’라고 할 때의 그 마음이기도 하다. 그러기 때문에 이때의 마음, 즉 평상심은 깨친 자의 입장에서 말하는 마음이기도 하고, 만법의 근원으로서 마음이기도 하며, 동시에 일상의 평범한 마음이기도 하다.

주지하듯이 혜능 이전에는 진성(眞性)이 중생심 속에서 망상(妄想)에 가려져 있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성(自性)은 진망이원(眞妄二元) 가운데 하나가 된다. 그러나 혜능은 이러한 입장을 혁파하여 자성이 만법을 함장하고 있기 때문에, 만법이 모두 자성으로부터 생겨나고 모두 자성 속에서 나타난다고 주장하면서 자성일원적(自性一元的) 태도를 나타낸다.

그런데 마조는 ‘마음이 곧 부처’라고 말하면서 혜능의 일원론적 입장을 한층 더 발전시키고, 혜능의 성(性)에 해당하는 자리에 심(心)을 바꿔 놓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혜능의 경우 깨달음의 대상은 심(心)보다는 성(性, 眞性, 自性)에 있었다. 그러나 마조의 관심은 성이 아니라 심에 있다. 성이 일심(一心) 가운데 불변의 측면을 뜻한다면, 심은 인연 따라 변화하는 마음 그 자체를 말한다.

그렇다면 마조가 이처럼 성을 심으로 대치한 의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철저한 일원적 자세의 확립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록 혜능이 자성일원을 말하고 있더라도, 그때 성에는 여전히 상대되는 의미로서 상(相)이 있게 된다. 그러나 심일원(心一元)은 삼계유심의 의미를 지니므로 상대가 없다.

이것은 수행자가 한편으로는 미혹한 범부의 입장이 아니라 깨친 자의 입장에 선다는 것을 의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깨달음의 지혜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깨달음을 향한 수행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처럼 깨친 자의 입장에서 깨달음의 지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에서, 직지인심과 돈오견성을 표방하는 조사선이 성립하는 것이다.

마조는 심성(心性)을 진성(眞性)과 망상(妄想)으로 이분하여 사망귀진(捨妄歸眞)을 주장하는 점수법을 조작된 수행이라고 부정하면서, 도는 닦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수도(修道)나 좌선(坐禪)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설파한다. 이것은 마조가 깨달음의 전제조건으로서 수행 또는 수행을 통한 깨달음을 부정하는 ‘불수돈오(不修頓悟)’를 그의 수증관(修證觀)의 중심자리에 놓는 것을 의미한다.

마조가 유위조작(有爲造作)의 수행을 부정하여 도불용수(道不用修)를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오해의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마조의 주장이 도를 닦는 사람들이 발심하고 노력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실제로 선의 역사에서 종종 있었다.

그러나 마조의 도불용수가 가지고 있는 의미란, 도란 본래 완전히 갖추어져 있어서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므로, 유위조작을 통하여 점차적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지, 학인(學人)들의 발심노력을 부정하는 말은 아니다.

마조는, 이점은 혜능도 마찬가지이지만, 점수론자들의 결정적인 오류를 유위조작이라는 수행의 과정을 통하여 도를 얻고자 하는 데에 있다고 여긴다. 다시 말해서 선이란 도를 만들어 가는 일이 아니라, 중생의 전도된 견해를 교정하는 일이라고 보는 것이 남종 돈오선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학선(學禪)이란, 점차적으로 닦아 자신의 불완전함을 보충해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착각하고 있음을 돈오하여 자신이 본래 아무 문제가 없는 완전한 존재임을 자각하는 일이 된다.

마조가 깨침의 전제조건으로서 조작된 수행을 부정하는 것은 혜능 이전 동산법문의 수행을 통하여 깨침에 이른다는 수인증과(修因證果)를 부정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마조가 한편으로는 혜능의 정혜불이법을 계승하는 것을 의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망귀진(捨妄歸眞)·좌선관행(坐禪觀行)이라는 혜능 이전 동산법문의 선종 수행법인 좌선법을 자신의 일심법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이후 마조로부터 유래된 홍주종이 이후 백장회해―황벽희운―임제의현으로 이어지면서 중국선의 사상적 표준으로 확립된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3) 임제의 인(人)

중국선의 독자적인 개성과 가치를 구현한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의 선법은 중국불교가 개척해 온 장구한 역사적 발전 단계 가운데에서도 가장 특징적이고 진보적인 정점에 속한다. 임제는 형해화된 전통이나 사상적 권위, 형식과 타성의 굴레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인간해방의 근본 문제를 참신하게 제기하고 선 체험의 가치를 소리 높여 외친 선승이며, 지금까지도 강렬한 안광을 내뿜고 있는 정신세계의 거인이다.

임제는 마조에 의하여 대성된 남종선의 대기대용의 선법을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고 하는 절대주체 확립의 도로 완성했다.더불어  매우 날카롭고 명료한 언어와 행업(行業)으로 독자적인 선풍을 선양하였으며, 이후 그 문하가 결국 송대 이후 중국불교의 주류를 형성했다. 그렇기 때문에 후대에 우리가 선종을 말하면 그것은 모두 스님이 개조인 임제종을 말하는 것이다.

임제의 사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이 가능하다. 그 하나는 출발점으로서 무위진인이고 나머지 다른 하나는 도달된 궁극적 경계로서 평상무사인(平常無事人)이다. 무위진인이란 어떤 계위에도 속하지 않는 분별이나 차별의 위상이 없는 참사람이란 의미이다.

즉 지금 이곳 내 앞에서 설법을 듣고 있는 살아 움직이고 있는 사람이다. 인간 안에 들어 있다고 여겨지는 불성이나 여래장이 아니라, 인간 누구에게나 현현하고 있는 무위진인을 인지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집착과 탐착을 끊고 모든 것에 대한 구함이 없이 일체의 모든 분별 경계를 단정하여 진정한 견해를 가진다면 평상무사인이 되어 수처작주하고 입처개진하는 활조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임제는 오직 법을 듣는 무의도인이 모든 부처의 어머니라고 한다. 즉 부처란 의지함이 없는 곳에서 나오고, 그 의지함이 없는 것을 깨달으면, 부처 또한 얻을 것이 없게 되는 것이다.

임제에 의하면 불성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살아 움직이고 지각하고 인식하는 우리 사람 안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임제선은 지금 바로 눈앞에서 법문을 듣고 있는 듣고 말할 줄 아는 바로 그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다시 말해서 부처란 바로 면전에서 법을 듣는 이 사람이고, 깨달음이란 바로 이 사람을 깨닫는 것이다.

이처럼 임제의 지금 여기에서 살아 움직이고 인식한다는 말은, 심성설의 측면에서는 마조의 평상심을 친근하게 표현한 것이 되며, 공부법의 측면에서는 혜능과 마조의 돈오를 더욱 생생하게 나타낸 것이 된다. 또한 마조는 평상심을 조작·시비·취사·단상·범성이 없는 것이라고 다분히 소극적이고 부정적이며 관념적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임제는 지금 여기서 보고·듣고·말하고·행동하는 것이라 하여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결국 임제의 선법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선의 요체를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조계 조사선법의 한층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임제선의 또 다른 특징은 마음 또는 불성을 ‘사람[人]’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데 있다. 임제는 마음의 작용성을 극대화하고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모아서 ‘사람’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선법을 개척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마조가 혜능 자성의 추상성을 극복하면서 일심이라는 평상심의 선을 만들어서, 조사선을 보다 현실적인 종교로 만들었다면, 임제는 마음이라는 말조차도 극복하고 ‘지금 여기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하는 지극히 평범한 언어를 구사하면서, 선법을 더욱 구체화, 일상화하였다고 할 수 있다.

임제선은 한마디로 살아 움직이는 선이다. 이것은 임제가 ‘마음’이라는 비교적 정태적인 용어보다는 ‘청법인’이라든지 ‘무의도인’이라든지 ‘지금 눈앞에서 듣고 있는 것’이라든지 하는 훨씬 동태적이고 현용의 의미가 있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점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다. 결국 임제선법은 바로 ‘이 (살아 움직이는) 사람’을 파악하는 것이 목적인 선이다.

임제는 ‘이 사람’의 특징을, 만법이 생겨 나오는 바탕이며, 만법을 인식하는 주체이고, 모양도 없고 뿌리도 없이 활발하고 자재하게 작용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뿐 아니라 임제는 바로 ‘이 사람’이 조사요 부처라고 한다. 또 만법과 ‘이 사람’의 관계에 대하여서는, 만법이 ‘이 사람’을 근원으로 하여 나타나므로, ‘이 사람’이 유일하게 진실되고 만법은 공상(空相)으로서 명칭에 그칠 뿐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부처요 조사인 ‘이 사람’을 깨닫는 방법은, 밖으로 남의 말이나 언구 위에서 지해를 일으키지도 말고, 대상경계 위에서 상을 따라가지도 말며, 육도만행을 닦아서 이룬다는 생각도 버리고, 오직 지금 당장 스스로를 믿고 회광반조함을 통해서, 지금 듣고 말하고 생각을 내며 살아 움직이는 ‘이것’을 파악해야 한다.

임제는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으면서 철저히 자신의 언어만으로 자신이 체험하는 선을 말하고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임제야말로 가장 ‘중국식 선법’에 철저했던 선사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임제는 마조계 조사선의 전통 아래에서 심즉시불의 일심법을 말하고, 허공인 마음의 무한한 작용성과 만법을 인식하는 작용을 표방한다.

그렇지만 임제의 위대성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근원자인 마음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설법을 듣고 있는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우리는 “안으로나 밖으로나 만나는 것은 모두 죽여 버려라.”고 설파하면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고 사자후를 토하는 임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국선이 완성’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4) 대혜의 간화(看話)

선의 실천에는 해행(解行)의 일여(一如)가 따라야 하므로, 선적의 이해나 어록의 섭렵만으로 진실한 자아의 각증은 되지 않는다. 체험을 통하지 않으면 개념적 이해만으로 그 본질을 체득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비판적 정신이 결여된 맹목적 수행 역시 잘못이다. 자아발견의 철저한 실천에는 반드시 정신적 전환 동기가 있어야 한다. 밖으로 내닫던 의식 활동을 돌려 안으로 향할 때, 우리는 앞이 가로막히는 계기, 혹은 깊은 자기부정과 운명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가 반드시 거쳐야 할 필연이다. 따라서 의심의 뭉치[疑團]가 고의로 주어진다. 그리고 이 일전의 의단을 통하여 대오토록 하고자 한다. 이것이 곧 간화선의 실천이다.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에 의하면 화두의 본질은 의심이다. 천만의 의심이라도 단지 하나의 의심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화두란 딴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집중된 의심 덩어리[疑團]를 의미한다. 여기서 하나의 집중된 의심 덩어리란 개인의 가슴에 내재된 일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대혜가 궁극적으로 보고자[看話] 하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본체로서의 실체나 불성이 아니다. 대혜가 진실로 추구하는 것은, 의심이라는 방법적 자각을 통해서, 자기 내부에서 살아서 자기를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존재자의 자기 존재에 대한 자각으로서의 불성이다.

대혜의 주장은 다른 의미가 아니라, 실존하는 개인이 밤과 낮을 공부하면서 뚫고 지나가야 하는, 살아서 움직이는 인간의 삶 자체에 대한 방법론적인 자각으로서 화두 즉 의심이다. 다시 말해서 깨친다는 것은 인간들이 무시이래로 끊임없이 추구해 온 실체론적이고 본체론적인 의미에서의 불성이나, 우주론적인 보편성으로서의 이(理)를 증득하거나 혹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다고 여겨지는 허망하고도 근거 없는 실체를 증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삶의 순간순간마다 만들어 가는 의미에서의 불성이고 부처다움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두, 즉 의단은 방법론적인 의심으로서 우리를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자리까지 막다른 골목으로 밀고 나가는 수단이요 방편이다.

따라서 그 결과 화두는 의심과 더불어 수행의 가장 중요한 하나의 양식이 된다. 비록 의심을 타파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 화두를 팽개쳐 버리고 문자나 경전의 가르침이나 조사의 공안에 대한 의심을 하는 것은 사마(邪魔)의 권속이 된다. 즉 화두만을 의심과 더불어 수행의 방법으로 밀고 나갈 것을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화두는, 존재자가 그 자신을 실체에 연루시키고자 하는 허망하고 근거 없는 기대에 끊임없이 반하여, 그 자신을 존재의 중앙에 올려놓는 화두인 것이다. 이때 우리가 공안을 의심함으로써 객관적인 대상으로 우리 앞에 서 있던 공안은 비로소 개인의 존재 문제로 다가와서 우리에게 체증된다.

조사선에서 표방하는 ‘평상심이 바로 부처이다’라는 말의 본래 의도는 도를 다른 곳에서 구하려는 마음을 경계하는 것이다. 즉 닦아야[修] 한다는 마음 자체가 바로 조작심이기 때문에 분별심에 속박된다는 것이다. 수(修)라는 말 자체가 ‘고치고 보수한다’는 뜻을 내부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본래부터 우리가 가지고 태어나는 불성으로서 자성을 고쳐야 할 그 무엇으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 본성은 고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본각을 중심으로 도를 해석하고자 하는 의미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사선의 이러한 의도는 시대가 진행되면서 의미가 변절된다. 본각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서 시각을 무시하게 된다. 대혜는 이러한 본각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시각 즉 수행을 경시하는 풍조를 힐난한다.

따라서 대혜 간화선의 진정한 의의는 공안보다는 간화에 있다. 왜냐하면 조사들이 남긴 고칙으로서 공안은 수행하는 납자의 가슴에서 화두로 자리 잡을 때에 비로소 그 진정한 의미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화두는 존재자인 인간이 그가 주인공임을 깨닫는 계기로서 작용하게 된다. 손님을 주인으로 알고 손님에게 내주었던 방을 도로 되찾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각의 입장에만 집착하여 깨침을 무분별하고 무책임하게 수용하는 태도는, 시각의 입장에서 의단을 주요한 방법으로 하는 대혜의 간화선적인 시각에 의하면 사마외도가 되는 것이다. 결국 조주의 무자(無字)는, 그 본의가 상실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혜에 의해서 발전적으로 재해석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에게서는 일상성을 강조하고 인간을 주체적인 존재의 자유인으로 주장하는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본각적인 입장인 조사선의 건강성은 여전하고 오히려 더욱더 강조되는 면이 있다.

결국 중국의 선불교는 인간을 해석함에 있어 성(性)에서 심(心)으로 그리고 인(人)으로 발전적으로 변화시킨다. 이러한 해석이 가지고 있는 불교사적 의의는 크다. 그 의의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인간성의 해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情)에 대비되는 의미로서의 성(性)에서, 성정(性情) 모두를 포함하는 심(心)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인간 그 자체를 부처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표방하는 것으로서, 선언적이고 당위적인 의미에서, 욕망을 가진 인간이 영위하는 우리의 삶 자체가 부처의 삶이며,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우리가 사는 세간 자체가 불국토라는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3. 깨달음을 통한 욕망의 경영

깨달음은 탐욕과 미움과 무지의 소멸이다. 이때 깨달음을 무(無)나 단멸(斷滅)의 상태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치 맹인이 볼 수 없다고 해서 빛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를 적당하게 표현할 말은 없다. 깨달음은 만들어지지도 않고 형태를 이루고 있지도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과 무지의 감각적 세계와는 동떨어져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영원하고 바람직하며 행복한 최상의 가치를 지닌 삶의 목표이다. 동시에 깨달음은 어느 장소에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초월적 자아가 머무는 천국의 종류도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들에게만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깨달음, 다시 말해서 열반은 ‘불어 끄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불어서 꺼지는 것은 사람마다의 탐욕의 불꽃이다. 갈망은 계속하여 살아 있는 동안에 일어난다. 따라서 열반은 사물에 묶이는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고, 외부세계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과 욕망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깨달음은 인간의 갈망하는 경향을 불어서 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환경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환경들에 자신을 속박시킨 족쇄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내게 오는 것이면 무엇이든 한껏 받아들인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강인한 사람은 자유롭게 된다. 자유란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의해서 노예로 만들어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아무것, 아무 사람도 깨친 이를 노예로 삼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부정적인 의미의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나와 남, 이것과 저것의 경계를 깨고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세계를 체득하는 것이다. 선은 번뇌가 그대로 깨달음이고 세간이 그대로 출세간이라는 믿음 위에 서 있기 때문에 번뇌 가운데 있되 번뇌에 속박되지 않고 그것을 부처의 자리로 돌려놓는다. 세간에 있되 세간에 물들지 않고 세간에서 만행을 실천하며 교화활동을 펼친다. 다시 말해서 깨달은 이는 인연에 따라 자연스럽게 중생제도의 길을 가면서,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그때그때 저마다의 본래면목을 밝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 문제와 연관하여 대혜는 말하기를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이는 ‘대자비심’을 떨쳐 일으켜 역순의 경계 가운데 진흙을 안고 물에 합하여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구업을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것을 건져내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만약 이와 같이 깨어 있지 않다면 결코 깨달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깨어 있는 이는 보살의 길에서 물러나지 않고, 보살의 일을 저버리지 않으며, 대자대비심을 버리지 아니하고, 바라밀을 닦아 익히되 일찍이 휴식한 적도 없었다.

또한 온갖 불국토를 관찰하되 싫어하거나 태만함이 없어서 중생들을 제도하는 원을 버린 적도 없고, 법륜 굴리는 일을 끊지 않고 중생들을 교화하는 업을 폐한 적도 없었으며, 내가 가진 바의 수승한 원이 다 원만하게 되어서 온갖 국토의 차별을 분명히 알고, 부처님의 근본성품에 들어서 피안에 이르게 된다. 결국, 대혜의 언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선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요체는 깨어 있음을 반드시 수반하고, 그 깨어 있음의 증거는 공성(空性)을 증득한 ‘지혜’와 중생에 대한 보살행인 ‘자비’이다. 그렇기 때문에 ‘깨어 있음’을 수반하지 않는 ‘깨달음’은 깨달음이라고 할 수가 없다.

‘깨달음’은 자기 조직적인 창발현상(self-organized emergence)이다. 이때 깨달음을 거쳐서 나타나는 새로운 창발적 상태는 ‘깨어 있음’이다. 또한 깨달음은 삶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삶이란 생명체의 구체적 체험의 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깨어있음은 일상의 삶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아상(我相)을 지닌 생명체가 연기적 관계에 대한 철저한 자각을 통해 개체로서의 부분과 불성으로 표현되는 전체가 서로 다르지 않는 불이(不二)의 삶을 살아감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연기적 관계성에 대한 철저한 인식 전환으로부터 얻게 되는 ‘일상적 삶의 경이로운 재발견’과 그 ‘재발견의 끊임없는 확장’이 선불교의 근본적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생명체는 그 특성이 다양성과 자율성의 근간이 되는 개체고유성과 개방성이기 때문에 열린 관계에 깨어 있을 때 아상이 고통의 원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존재가 어우러지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만일 선불교가 산중의 ‘목적으로서의 관념적 깨달음’이라는 것에 가장 의미를 두고 있다면, 그것은 선가(禪家)에서 그토록 폄하해 마지않는 알음알이[知解]를 통한 관념적 깨달음일 뿐이기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선불교가 자유롭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과정으로서의 깨어 있음’과 ‘구세의식’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명심할 것은 이때 선의 구세의식은 깨달은 자의 우월의식이 아니라, 저자거리에서의 동참의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깨어 있는 선수행자는 구원이나 시혜의식이 없어야 하며, 자기희생이 전제된 채 입니입수(入泥入水) 하는 ‘더불어 삶’이라는 동류의식을 갖춘 보살이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깨달음이 곧 깨어 있음이라는 현재진행형의 바탕이 되기 위해서는 깨달음마저 놓아 버려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깨어 있음은 삶의 현장에서 갈애와 번뇌 그리고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 등이 소멸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우리의 ‘생의(生意)’ 그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생명현상이란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전체이면서 부분이고 부분이면서 전체를 유지하는 창발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더욱더 역동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이런 ‘갈애와 번뇌와 탐욕과 노여움 그리고 어리석음’들과 투쟁하게 된다.

따라서 깨어 있음은 궁극적인 의미에서 소멸의 상태가 아니다. 거기서는 지각도 감정도 정지되지 않는다. 오히려 지각과 감정은, 정신적 전환 동기를 거쳐 초감각적 차원으로, 인식의 대전회(大轉回), 다시 말해서 인식의 상전이(相轉移, phase transition)를 일으키며, 이때 강박적 충동(갈애, 번뇌, 탐욕, 노여움, 어리석음 등)들은 소멸된다. 그 결과 우리는 부정적인 의미의 욕망, 예를 들어 탐(貪)·진(瞋)·치(癡) 같은 것 등이 주는 사물의 속박들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선사들은 거의 모두가, 일상적인 현실세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표방하면서, 욕망을 가진 주인공인 인간이 영위하는 우리의 삶 자체가 부처의 삶이며,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우리가 사는 세간 자체가 불국토라고 설파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은 결코 욕망 없는 인생을 궁극적인 세계로 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지양(止揚)해야 마땅한 대상으로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선사의 깨어 있는 눈에는 우리의 삶, 다시 말해서 ‘생명(生命)의 약동(躍動)’인 ‘생의(生意)’의 활발발(活潑潑)함은 오히려 권장해야 할 사항이지 절멸(絶滅)시켜야 할 대상은 결코 아니다.

결국 선불교의 욕망에 대한 입장은, 욕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욕망 속에 있으면서 욕망에 물들지 아니하고, 대상경계 속에서 불성인 자성의 활용함을 지향하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은 현실적인 번뇌의 세계를 부정함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번뇌즉열반(煩惱卽涅槃), 다시 말해서 번뇌와 열반의 불이에 의거하여 적극적으로 번뇌의 세계에서 깨어 있음을 전개하는 작용이다.

 다시 말해서 적극적으로, 욕망을 포함한, 일상의 모든 존재 방식을 수용하여 그것을 도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장으로 삼는 태도는 선불교 사상의 시작이며 동시에 끝이 되는 것이다. ■

이덕진 
창원전문대 복지학부 장례복지과 교수.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박사과정(철학박사), 동국대 대학원 장례문화과를 졸업했다. 예문동양사상연구원 인도·불교철학 연구실장과 《오늘의 동양사상》 《보조사상》 등 여러 학술지의 편집위원 역임. 저서로 《지눌》 《한국의 대표사상가 10인−지눌》 《보조지눌의 선사상 연구》 등과 〈慧諶의 禪思想에 대한 硏究〉 〈朱熹의 佛敎 理解에 대한 一考察〉 〈知訥 禪思想에 있어서 頓悟의 含意〉 〈看話禪의 狗子無佛性에 대한 一考察〉 등 60여 편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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