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 불교와 욕망

1. 욕망이 긍정되는 현대사회

현대사회는 욕망의 긍정과 함께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역설적 주장과 함께 인간의 욕망 추구가 현대 자본주의를 이끄는 동력으로 작용해 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냥 욕망 추구가 아니라, 너도나도 누구나 할 것 없이 이기적으로 욕망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경제법칙이 작용하여 결과적으로는 누구나 다 잘살게 된다는 신념이 오늘날 자본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힘이 되고 있다.

동양이건 서양이건 중세사회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지나치리만큼 금제적인 태도로 일관해 왔던 데 반해서, 현대 사회는 그러한 금제를 풀어헤치고 자유롭게 욕망을 추구하도록 금욕의 고삐를 풀어버리면서 태동하여 온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그러한 금욕적 이데올로기가 특히 하층민들의 욕망 추구를 죄악시하면서 탄압하는 구실로 작용해 온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지배층들은 어느 시대에나 온갖 수단을 강구하여 자신들의 욕망을 추구하면서 종교의 금욕적 이데올로기를 확대하고 과장하면서 피억압자들의 한숨을 억누르고자 애써 왔다고 할 수 있다. 종교는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언명도, 피억압자의 욕망을 부정하며 억압하는 종교의 잔혹한 역할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나 지나친 욕망 추구는 오늘날 과도한 지구에 대한 착취와 함께 환경의 파괴를 가져오고 있으며, 이는 인류 자체의 생존을 위협할 상황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 욕망에 대한 긍정이 어느 정도까지 타당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반문하게 된다.

특히 이 문제가 심각한 것은, 가령 지금 소위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생활을 중국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누리게 될 때 지구라는 행성이 그 부담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는 데에서도 느낄 수 있다. 여기에서 과학기술의 지속적인 발전이 환경파괴의 진행을 어느 정도 경감시키면서 여전히 물질문명의 발전을 보장할 수 있다는 희망을 견지하고자 하는 입장과 그에 대한 비판과 함께 소비문화의 종언을 고하고자 하는 입장이 대립하게 된다. 또한, 인간의 욕망 추구를 정당화하면서 어느 정도는 하층민들의 생활이 나아졌다고 할 수도 있으나, 여전히 빈부격차의 문제, 특히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 문제는 자본주의도 여전히 또 다른 종류의 차별적 체제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만들고 있기도 하다.

불교에서는 계율을 통하여 우리의 욕망에 대해서 절제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러한 절제가 불교의 근본 목표인 깨달음의 추구에서 하나의 중요한 전제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불교의 태도는 오늘날 욕망의 문제에 대하여 대안적 관점이 될 수 있는 것인가? 마르크스의 표현대로 아편의 구실을 하면서 하층민들의 곤궁한 삶을 정당화하는 노릇밖에 못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욕망에 대한 절제가 어떻게 해석되느냐에 따라서 달리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욕망은 기본적으로 나의 욕망이다. 이기적인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욕망은 좌절을 겪으며, 그곳에서 계율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만을 생각하는 차원이 가장 저급한 차원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한 욕망이 남에 대한 배려에 의하여 그 한계성을 인식하게 되면서 다소 절제되는 단계를 겪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계율은 세간적(世間的) 차원에서, 나와 너의 대립 관계에서 준수된다는 한계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곧 깨달음의 차원에서는 계율도 넘어서야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계율은 깨달음의 인도를 받을 때에 그 의미가 적절성을 갖는다고도 할 수 있고, 깨달음 앞에서 그 역할을 다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욕망에 이끌리는 이기적이고 유아독존적인 탐욕적 삶, 계율에 입각한 자타병립적인 윤리적 삶, 깨달음에 입각한 무아적인 종교적 삶의 세 가지 수준에서 우리의 삶을 반성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세 수준이 서로 개별적으로 존재하기만 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나의 욕망이 타인 앞에서 그 한계를 드러내게 되는 것은 타인에 의하여 제지되는 차원에서 이야기될 수도 있지만, 나에 맞서는 그 타인도 나와 마찬가지로 욕망을 지닌 존재이고 그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존재라는 이해와 배려를 하게 되면서라고 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나의 욕망이 부정되는 좌절을 겪는다기보다는, 상호 서로의 욕망을 인정하는 차원에서 나의 욕망을 적절히 제어하는 차원에서 서로 양보하는 길을 택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욕망을 세간적 욕망과 출세간적 욕망으로 나눈다면 깨달음의 추구 또한 출세간적이라고는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의 욕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간적 욕망은 세상 안의 것을 놓고 다투는 것이기에 그 추구를 무한정 방관하게 되면 욕망을 달성하는 사람과 남에게 내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생기게 되는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출세간적 욕망은 세간의 한계를 벗어나 있기에, 가령 누군가가 깨달았다고 해서 내가 깨닫지 못하게 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서로의 세간적 욕망을 인정하고 양보하는 가운데 세간적 계율의 질서가 이루어지고 공동체가 유지된다고 한다면, 깨달음이라고 하는 초세간적 욕망에 눈뜨게 되면서 승가라는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고 유지되어 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계율은 유아독존적이고 이기적인 탐욕적 삶을 극복하고 무아적인 종교적 삶으로 인도하는 가교적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깨달음에 의하여 승화되지 않는 계율은 형식적 율법주의로서 속 빈 강정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으며, 깨달음에 의하여 인도되면서 그 의미가 심화되고 궁극적으로는 초극되어 가는 것이라고 하겠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의미를 불교의 기본적인 계율인 오계와 삼독의 맥락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에서는 그 간의 관련 연구를 망라해서 정리한다기보다는, 필자의 고민 흔적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이야기를 전개해 보고자 한다.

2. 불살생(不殺生)−생존에 관한 욕망의 갈등
 
기본적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욕심은 생존욕과 번식욕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서 불살생의 계율이 의미를 갖게 된다고 할 수 있겠다. 나 자신이 생존을 원하는 만큼 타자도 생존을 원한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는 데에서 불살생은 우리의 욕망에 제동을 가하게 된다. 다른 생명체도 생존을 원한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면서, 내가 생존하기 위해서 다른 생명체를 해할 수 있는가 하는 반성적 성찰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윤리적 성찰은 절대적 만족을 줄 수 있는 해결책을 적어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제시받을 수 없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죽여야 하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자이나교에서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해서 남을 죽이는 것을 포기하는 극한까지 나아가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죽음에 이르는 것을 이상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누구나가 그러한 선택을 하기는 어렵다.

불교에서는 그러한 자이나교의 길과는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동물과 식물을 나누어서, 모든 존재를 생명체로 보는 자이나교와 달리 식물을 생명체로 여기지 않는 불교의 특성이 일면 작용하기도 하지만, 동물에 있어서도 사람들 사이의 화합을 위해서 어느 정도의 희생은 어쩔 수 없이 묵인하게 된다는 불교의 입장이 작용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은 생명체들 사이에 다소의 위계가 있다는 입장을 전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또한 인도 종교들의 공통적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죽음이 그것으로 끝나는 절대적 죽음이 아니라 윤회를 통해서 환생으로 이어지는 것이기에, 살생이라는 것이 절대적 범죄라기보다는, 남의 생명을 끊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생명에 다소의 위해를 가하게 되는 것이라는 상대적 입장이 용납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생명에 위해를 가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그 자체로  정당화하기 어렵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불살생의 계율은 계율 그 자체로서는 현세에서는 불완전한 계율일 수밖에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점에서 현세는 또한 불완전한 세상일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현세에서의 생존은 불완전한 생존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불교에서 열반을 둘로 나누어, 현세에서의 생존에 있어서의 열반은 유여열반이라고 그 한계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완전한 열반 곧 무여열반은 현세를 넘어서야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3. 불투도(不偸盜)−소유에 관한 욕망의 갈등

세계 질서가 자본주의로 통합되어 가는 것이 기정사실로 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어쩌면 가장 강하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욕망이 소유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법정 스님의 입적에 즈음하여 《무소유》라는 그분의 수필집이 새삼 베스트셀러로 주목되기는 하였으나, 그러한 주목이 얼마나 오래갈지 기대하기는 어렵다. 불교에서 불투도가 의미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주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 소유권을 주장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의 본생담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보면, 누구든 달라는 이에게 무엇이든 넘겨주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다른 사람이 확실히 준다는 의사를 표시하는 것만 받아서 소유할 수 있다는 선에서만 이 문제가 거론된다면 적당한 의미에서 소유는 허락될 수 있으니 별 고민이 없을 수 있겠다.

하지만, 누구든 달라는 자에게는 다 내주라고 한다면 이러한 가르침은 따르기가 쉽지 않다고 하겠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불교의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 무아사상이 갖는 함의는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이 세상에 도대체 아무것도 없다는 데에서 찾아질 수 있다는 점에서, 무소유는 불교의 트레이드마크라고도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무소유가 철저하게 지켜질 수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재가자뿐만 아니라, 출가자에 있어서도 소유의 문제는 비켜가지 않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사찰 운영권을 둘러싸고 갈등이 두드러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 오늘날의 현실인 것을 그저 눈감고 있기는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유권을 주장하는 측을 무조건 무소유라는 불교적 원리에 불충실한 사람들이라고 비난하기도 어려운 것이 공정한 현실인식이라고 할 수도 있다. 다소 현실타협적인 태도라고 힐난을 받을 수도 있지만, 무소유라는 태도에 입각하여 다 내주겠다는 태도를 견지하기에는, 달라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의 복잡한 면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본생담 이야기에서는 주로 그렇게 집요하게 달라고 해서 받아가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지를 시험해보기 위해서 가장한 천신이었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기에 더욱더 우리의 현실에서 문자 그대로 그렇게 처신하기가 어렵다.

우리가 임시로나마 소유권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하여 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무턱대고 응했을 경우, 우리는 그저 덧없는 물건에 대한 소유권만을 넘겨주었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 물건을 소유하게 된 사람들이 그러한 소유로 인하여 오히려 삶이 망가질 수도 있고, 인성이 황폐화될 수도 있는 염려도 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남방불교 스님들은 무소유의 계율을 지키기 위하여 버스비도 갖고 다니지 않으며, 혹시라도 버스비를 내게 되면 옆에 재가자가 따라다니면서 대신 내준다는 이야기를 간혹 듣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렇게 철저하게 무소유를 실천하기도 어려울뿐더러, 그런 식의 실천이 다소의 의미는 있다고 할 수 있어도, 일면 편법에 불과하다.

자본주의 사회 자체를 거부한다면 다른 일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일단 자본주의 사회하에서 사는 이상 임시적이나마 소유의 문제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또한 출가자의 입장이든 재가자의 입장이든, 그 소유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의미 있게 활용하느냐는 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현실적인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약간 의미를 다르게 부여한다면, 나에게 소유권이 인정되는 것들에 대하여, 그것들이 사적으로 나의 소유로 인정되는 것들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나에게 임시로 맡겨진 것으로서 나에게는 그러한 것들을 활용하여 불국토를 이루어 갈 책임과 사명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가령 급여나 재산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더 큰 규모로 불국토 건설에 참여할 책임이 있다. 그저 사유재산으로 생각하고 내 재산이니 내 마음대로 쓴다고 하면 진정한 불자로서의 자세가 아니다.

적게 버는 사람은 적게 버는 만큼 불국토 건설의 책임이 덜 무거워진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무소유의 이념을 자의적으로 적용하여 저임금 노동자나 사회적 취약 계층에 대한 배려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이는 오히려 부처님의 법을 훼방하는 태도다. 가장 이상적으로는 누구나가 부처님의 법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불국토 건설의 올바른 태도라고 할 때, 복지국가의 이상은 불국토 건설의 이상과 그다지 어긋날 것이 없다. 가장 잘나간다는 삼성반도체의 근로자들마저 심각한 건강상의 위협을 받으며 일하고 있는 오늘날 한국의 현실은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

4. 불사음(不邪淫)―감각적 욕망의 갈등

현대사회는 또한 감각적 욕망이 극한으로 분출되는 사회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소유욕을 무한대로 증폭시키는 한편, 온갖 감각적 쾌락을 극대화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한 감각적 쾌락을 가장 퇴폐적으로 부각시킨다면 그것이 바로 삿된 음행이다. 삿된 음행을 금하는 불사음의 계율은 직접적으로는 성적인 쾌락에 대한 지나친 탐닉을 경계하는 것이다. 비교적 가장 이른 시기의 경전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되는 《숫타니파타》에는 다음과 같이 심각하게 음행을 경계하는 내용도 실려 있다.

슬기로운 사람은 음행(淫行)을 회피하라.
타오르는 불구덩이를 피하듯.
만일 불음(不淫)을 닦을 수가 없더라도
남의 아내를 범해서는 안 된다.

참으로 부담스러울 정도로 지독한 언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성적인 쾌락은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에 대한 욕구가 자손을 통한 생존이라는 2차적 욕구로 발전하는 가운데 성립한다고 할 수도 있다. 성적인 쾌락에 대한 욕구가 없다면 성행위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그렇게 된다면 자손을 통한 인류의 생존은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그 성적인 쾌락에 대한 욕구가 지나치게 추구될 때, 온갖 문제를 불러오게 된다.

그렇지만, 범위를 보다 넓힌다면 온갖 감각적 쾌락에 대한 경계를 함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적인 욕망을 색욕(色慾)이라고 하는 데에서도 추측할 수 있듯이, 성욕은 색(色) 곧 물질의 세계에 대한 욕망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온갖 물질문명의 이기들을 광고하는 데 인간의 성욕을 활용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시각적 즐거움, 청각적 즐거움, 후각적 즐거움, 미각적 즐거움, 그리고 촉각적 즐거움의 온갖 감각적 즐거움을 보다 더 여실하게 느끼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현대 산업사회를 이끌어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통·통신 수단의 급격한 발달이나 액정 텔레비전의 발전에서 더 나아가 3D 입체텔레비전의 발달, 그리고 냄새를 맡을 수 있는 텔레비전의 개발 등은 모두 인간의 감각적 욕망을 어떻게 더 잘 충족시키는가에 대한 열망의 산물이다.

이러한 현실을 부정적으로만 본다는 것도 어쩌면 시대적 현실에 등을 돌리는 처신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비판받을 수 있다. 오늘날 환경파괴가 급격하게 일어나면서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도 등장하고, 아예 발전을 멈추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현대 산업문명이 가져다준 온갖 편리함은 그 모든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는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오늘날 대중화하고 있는 휴대전화를 아예 사용하지 않겠다고 하거나, 3D 텔레비전의 도입이나 구매를 거부하는 것은 능사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역설적으로 불교에서 깨달은 사람이 얻게 되는 능력으로 이야기되는 천이통이나 천안통이 이러한 기술발달 덕분에 누구에게나 가능한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이다. 우리의 오감이 우리의 신체적 한계를 벗어나서, 수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공간의 사물을 느끼는 것을 감각적 타락으로만 볼 수는 없다.
다만, 여기에서도 빈익빈 부익부의 심각성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는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대처가 필요하다. 인터넷이나 휴대전화나 3D 텔레비전은 공공재라는 인식이 확산되어, 정보 차원에서의 소외 계층이 생겨나는 것은 막아야 한다. 경제학의 기본적인 전제로서 재화의 한계는 어느 시대에나 있을 수밖에 없지만,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정보 접근에 있어서는 누구도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

5. 불망어(不妄語)−종교적 깨달음의 권위에 대한 욕망의 갈등

어쩌면 다섯 가지 계율 가운데 깨달음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이 불망어의 계율이리라.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그리고 불음주는 깨달음에 직접 연관된다기보다는, 깨달음에 이르는 데 있어서 갖추어야 할 자세로서 요구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불망어는 환언하면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를 대면하는 태도, 다시 말해서 진리에 대하여 자신의 양심을 속이지 않는 태도를 시사한다는 점에서, 깨달음에 보다 직접적으로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공동체 생활을 하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기본적 문제 가운데 하나가, 그 공동체 내에서 자신이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이다. 두 사람 이상이 모이게 되면,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는 말에서처럼, 중요도가 달라지는 현실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종교적 차원, 특히 불교적 차원에서는, 세속적 재산이나 지위나 연령에 상관없이, 그 사람이 얼마나 깨달음에 가까이 가 있느냐는 관점에서 그 사람의 위치가 정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상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이미 깨달아 있다거나, 적어도 누구나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 사회의 질서는 여전히 위계적인 질서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 좀 더 높은 권위를 부여받고자 자기 과시를 하는 것이 불망어에서 기본적으로 경계하는 문제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본인의 위치를 잠시나마 끌어올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속언대로 결국은 들통이 날 수밖에 없으며, 거짓말이 통하는 동안에도 남과 자신을 속이는 대가는 심각하다. 조급한 마음에 자신의 실력이나 경지를 부풀려서 일시적인 이득은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길게 보면 자승자박이요 스스로 족쇄를 차는 꼴이 되고, 한 번 거짓말을 하면 그 거짓말을 덮기 위해서 다시 일곱 가지의 거짓말이 필요하게 되어 걷잡을 수 없는 악순환에 떨어진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6. 불음주(不飮酒)―자아해체 욕망의 갈등

불교에서 음주를 경계하는 것은 그 인연담에서도 이야기되듯이, 음주를 함으로써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사람들의 조소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불음주의 계율은 제 정신줄을 놓아 버리지 말라는 경계다. 특히 재가자들에 해당되겠지만, 출가자들도 가끔은 인사불성이 되어버리고 싶은 욕망에 빠질 수가 있다. 어쩌면 격의 없이 사람들과 어울리고자 하는 욕망이니 탓하기보다는 어여삐 보아주어야 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불음주는 그저 ‘격의 없이’ 어울리고자 하는 욕망을 금하는 차원이 아니라, 무책임하게 고주망태가 되는 것에 대한 경계라고 하는 것이 상식적인 판단일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언제든 사회인으로서의 책임을 망각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법에서도 심신미약자에 대하여 죄와 벌을 경감해 주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심신이 미약해지도록 자신의 처지를 방치한다는 것은 종교적으로는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 상황은, 누구에게나 그러한 상황을 벗어나고픈 욕망을 한 번쯤은 품게 한다. 지나친 스트레스 상황이 자아 해체의 욕망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 개인에게 책임을 일방적으로 전가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각자 스스로 알아서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스트레스 상황을 잘 판단해야 하겠지만, 공동체 전체에 있어서도 과도한 스트레스 상황을 가급적 감소시키고자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어쩌면 물질문명이 이렇게 발달한 근본적인 동기는 더 편리하게 살자는 데에서 출발했는데, 오히려 역으로 지나친 스트레스 속에서 자아 해체에 대한 욕망을 품게 된다면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예를 들면, 직장 환경에서도, 급여를 인상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의 부하를 적당하게 줄이고 여가 생활을 정말 여유롭게 보낼 수 있도록 보장하는 방안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 특히 휴대전화의 발달과 함께 직장에서 멀리 떨어져서도 여전히 회사일에 매달리는 상황이 확대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하다.

불교는 어쩌면 세속 생활의 정신없음에서 한 걸음 물러나 삼림욕을 제공할 수 있는 이점을 지니고 있다고 비유적으로 말할 수 있다. 마음속에 텅 빈 여유의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 불교가 할 수 있는 역할이다.

7. 욕망의 절제가 갖는 의미에 대한 성찰

불교에서 욕망 그 자체를 제거해야 하느냐, 아니면 욕망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탐진치의 삼독심을 제거하는 것이 관건이냐 하는 문제는 여전히 논란이 다소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체로 불교의 경향은 삼독심을 제거하는 차원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의 지나친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문제이지, 욕망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현대 산업사회에서 부추기고 있는 욕망이 과연 적절한 욕망인가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반성이 필요한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불교의 근본적인 문제가 오늘날 욕망을 긍정하는 시대에 있어서 어떤 차원에서 성찰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새삼 의문시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으나, 여전히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불교의 입장은 유효하다. 다만 어떠한 욕망을 추구할 것인가에 대해서 스스로 성찰하려는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 내가 지금 품고 있는 욕망이 그 자체로서 선한 것인가, 보다 원대한 깨달음의 목표를 향한 하나의 사다리로서 그 의의를 참되게 갖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다는 식으로 진정한 깨달음에는 관심이 없고, 세속적 풍요에만 관심이 있는 것인가 늘 스스로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스스로 온갖 욕망을 추구하면서 매 순간 자신의 추구가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서 한 걸음이나마 전진하는 노력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 성찰이 필요하다. 자신의 욕망이 상대적인 욕망으로서 유한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가고 있다는 자각이 있다면, 다소 에둘러 가더라도 마침내는 바른길에 들어서게 될 것이요,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보아서 그저 잿밥에만 관심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철저하게 반성하고 길을 돌이켜야 한다.

인간의 고통의 근원은 욕망 그 자체보다는 탐진치 삼독심의 발동에 있다. 요컨대 삼독심을 극복하는 차원에서의 욕망이라면 깨달음에 있어서 장애라기보다는 사다리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하겠다. 여기에서 욕망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하는 노력은 바른길이라기보다는 어리석은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욕망 자체보다는 자신의 욕망에 삼독심이 어떻게 개입하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노력이 요청된다. 인간 삶의 모든 고통의 근원도 욕망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삼독심에 있다고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도 달리 이야기하자면, 자신의 욕망 추구가 순수한 이기심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는가, 상대방에 대한 배려에 의하여 절제되고 있는가, 무아적 깨달음에 의하여 승화되고 있는가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긴요하다.

거듭 말하건대, 욕망이라는 한 단어를 너무 포괄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문제로 지적될 수도 있지만, 세간적 욕망과 출세간적 욕망을 나누어 보는 관점이 요긴하다. 깨닫고자 하는 것도 하나의 욕망이다. 세간적 욕망은 깨달음에 장애가 될 수 있겠지만, 그러한 세간적 욕망에 있어서도 삼독심이 어떻게 개입하고 있는가를 주시할 필요가 있으며, 그 개입 정도에 따라서 깨달음을 방해하는 정도가 달라진다.

우리가 정진을 하고자 한다면, 정진의 목표가 뚜렷해야 하고, 그 목표에 대한 욕망이 긴요하다. 그러나 그 욕망이 냉철한 자기 인식을 수반하지 않을 때에는 불망어의 계율을 어기는 사태를 초래할 수도 있으므로 뚜렷한 자기 성찰이 언제나 요구된다. 요컨대, 후학을 인도하거나 또는 스스로의 정진에 있어서도, 어떠한 욕망이 발생할 때 그냥 억압하기보다는, 깨달음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떻게 인도할 것인가를 지혜롭게 성찰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세간적 욕망에서도, 선한 욕망이란 자각각타의 대보리심에서 비롯하는 욕망인 반면에, 악한 욕망이란 출세간에 대한 의식적인 지향이 전혀 없이, 타인에 대한 배려도 없이 삼독심에서 비롯하여 이기적인 추구만을 일삼는 것이라고 구분할 수 있다.

본론에서 살펴보았거니와, 계율은 우리의 이기심을 제어하여 타인을 배려하고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나룻배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 계율의 의미를 깊이 있게 이해할 때, 계율은 억압으로 다가오기보다는 삼독심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갑옷이나 방패와 같이 여겨질 수 있으며, 진정한 자유를 위한 수단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다. 깨달음이 온전히 이루어진 경지에서는 《논어》에서 공자가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의 경지를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계율이 더 이상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것이다.

일체 욕망을 끊고자 한 의상의 수행도, 욕망의 범위를 위에서와 같이 포괄적으로 이해한다면 모든 욕망을 끊고자 한 것이라기보다는, 세간적이고 감각적인 욕망을 끊고자 한 것이라고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인데, 서양적인 비유를 통해서 이야기한다면, 자칫하면 아기를 목욕시키고 난 뒤에 그 구정물을 버린다면서 아기까지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문제가 될 수도 있기에 섣불리 모방할 문제는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이는 물론 원효의 수행 방식도 마찬가지일 수 있을 것이다. 원효를 모방한다고 하면서 온갖 방약무인한 짓거리를 거리낌 없이 하는 것이 오히려 오늘날 욕망 긍정의 시대에 더 문제가 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불교는 어떤 행동을 하는 데 있어서 그 근본적인 동기가 무엇인가를 성찰하는 데에 강점을 가지고 있는 종교라고 할 수 있고, 그러한 차원에서 자신의 욕망이 어떠한 맥락에서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한 차분한 성찰이 긴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삼독심, 곧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은 모두 적절한 한계를 넘어서는 데에서 문제가 되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깨달음에 다가감에 따라서 삼독심을 적절히 통제하게 된다고 할 수 있지만,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삼독심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불교에서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을 나누어서 완전한 열반은 차안을 완전히 떠난 상태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현대 물질문명의 무절제한 발전에 대한 반성이 확산되고 있는 시대에, 우리나라애서 최근 진행되고 있는 4대강 사업이 생태계 파괴라는 비판을 호되게 받고 있고,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은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 물질문명의 혜택을 부정하기에는 이미 세상은 너무 변해버렸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면서도, 자본가들의 무절제한 욕심이 오히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여 버리는 우를 범할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착잡한 심경이 드는 것은 필자만이 아닐 듯하다. ■

 

류제동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 서강대 종교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저서로 《하느님과 일심》 《인간본성에 관한 철학이야기》 《구원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사람의 종교 종교의 사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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