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 불교와 욕망

들어가면서

여기서는 ‘욕망’을 좀 더 광의적으로 해석하여, 집착, 이기심, 자의식(ego-consciousness), 자기중심주의(self-centeredness) 등을 포괄하는 용어로 파악하고, 이런 주제에 대해 세계 중요 종교에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에세이 형식을 빌려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세계 여러 종교를 살펴보면 거의 모든 종교에 표층(表層)이 있고 심층(深層)이 있다. 물론 종교 전통에 따라 그 두께의 비율은 다를 수 있다. 어느 종교는 표층이 심층보다 어느 정도 더 두껍고, 어느 종교는 표층이 심층보다 압도적으로 더 두꺼울 수 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종교는 표층 불교와 심층 불교, 표층 기독교와 심층 기독교, 표층 유교와 심층 유교처럼 표층과 심층을 같이 가지고 있다고 보아 틀릴 것이 없다.

그러면 표층 차원의 종교는 무엇이고 심층 차원의 종교란 무엇인가? 이 둘을 특징짓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지만, 표층 차원의 종교가 가지는 가장 큰 특징을 들라면, 지금의 나를 위해서 총력을 다하는 종교라 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지금의 나, 이기적인 나를 중심으로 생각한다. 종교를 가지는 것도 지금의 내가 잘 되기 위한 것이다.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말씀을 빌리면 ‘몸나’ ‘제나’ ‘좀나’를 어떻게라도 확대하고 꾸미고 연장하려는 데 관심을 가지는 종교다.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종교를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욕심이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심층 차원의 종교는 지금의 나에서 벗어나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것, 변화되는 것,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유영모 선생님이 말하는 ‘얼나’ ‘참나’ ‘큰나’로 부활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종교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렇게 새롭게 된 얼나, 참나가 바로 내 속에 계신 신성(神性) 혹은 불성(佛性)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런 측면을 강조하는 심층적 종교를 종교의 ‘밀의적(密意的, esoteric)’ 차원으로 보고, 표층적인 ‘현교적(顯敎的, exoteric)’ 차원과 대비시킨다.

표층과 심층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산타의 예를 들어 본다. 세 살이나 네 살 된 아이들은 착한 일을 하면 산타 할아버지가 벽난로 옆에 걸어놓은 양말에 선물을 많이 주고 간다는 것을 그대로 믿는다. 아이가 자라 엄마가 양말에 선물을 넣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아, 엄마가 산타였구나. 산타 이야기는 식구들과 선물을 나눈다는 뜻이구나.”라고 깨닫고, 지금까지 ‘받기만 하던 나’에서 엄마, 아빠, 동생에게 선물을 ‘주는 나’가 된다. 좀 더 크면 가족뿐 아니라 온 동네, 좀 더 자라면 나라와 사회에서 불우한 이들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 산타 이야기의 정신이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다가 정신적으로 아주 성숙하게 될 경우,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하늘이 내려오고 땅이 하늘을 영접하는 천지합일(天地合一), 신인합일(神人合一)의 뜻이 있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된다.

거의 모든 종교는 그 신도들에게 표층적 차원에서 심층적 차원으로 넘어가라고 가르치고 그 길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고 있다. 이처럼 표층적 종교인에서 심층적 종교인으로 넘어가는 ‘변화(transformation)’야말로 거의 모든 종교가 표방하는 가르침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기에 미국 종교학자 프레더릭 스트렝은 ‘종교’를 ‘궁극 변화를 위한 수단’이라 정의할 정도였다. 

표층에서 심층으로

그러면 어떻게 해야 표층적 종교에서 심층적 종교로 변화될 수 있을까? 많은 종교에서는 그 수단으로 욕심을 버려라, 의식의 변화를 체험하라, 나의 참된 정체성을 찾으라 등을 제시한다. 하나하나 단계를 거치면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라고 하기도 하고, 이런 것들이 서로 연관된 동전의 앞뒤와 같기에 선후를 분명히 할 수 없다고 보기도 한다. 아무튼 이런 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상대적인 것을 상대적인 것으로 알고 거기에 ‘집착’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종교의 길은 어느 면에서 보면 상대적인 것을 상대적으로 인정해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불교적 용어로 말하면 일체개공(一切皆空), 즉 우리가 지금 감지하는 대로의 현상세계의 모든 것이 모두 독립적인 실체 혹은 ‘자성(自性)’을 결여한 상대적인 무엇에 불과하다는 것을 통찰하는 과정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우리의 한정된 좁은 관점으로 보아 진짜라고, 진리라고 여겨 오던 것을 좀 더 높은 혹은 깊은 차원에서 관찰함으로써 그것이 궁극 실재, 궁극 진리가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깨쳐 가는 과정, 그리하여 전에 가졌던 고정된 개념들, 이론들, 관념들을 계속해서 버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으로 옮겨가는 진정한 의미의 변증법적(辨證法的) 과정을 밟으라는 뜻이다.

궁극적이지 않은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거기에 궁극적 관심을 쏟는 것을 흔히 쓰는 ‘집착’ 혹은 ‘우상 숭배’라고 한다. 절대적이 아닌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떠받들고 거기에서 의미와 보람을 찾으려 목숨을 거는 일이다. 인간이란 마음에 무엇인가 의미와 보람의 원천이 될 만한 것을 모시고 숭배하며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런 것이 없어서는 뭔가 빈 것 같고 허전해서 인생을 살아갈 맛이 안 난다는 것이다. 돈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이성(異性)이든, 무슨 주의(主義)든, 뭔가 자기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 바쳐서 경배할 대상이 있어야 하고 또 거기에서 살맛을 찾는다. 그것이 생의 의미와 목적이다. 결국 이 모두가 ‘욕심’에서 나오는 결과다.

우리를 얽매는 세 가지

이렇게 정말로 진짜가 아니면서도 절대적으로 진짜인 것처럼 여겨져 우리를 얽매기 쉬운 것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세 가지는 사실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알고 욕심을 부리고 집착하는 미망의 세 가지 측면에 불과하다.

첫째, 우리의 오관으로 감각되는 것, 다시 말해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져 볼 수 있는 것을 그대로 진짜라고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감각세계, 현상세계에 절대적 관심을 쏟고 거기에만 맹목적인 애착을 느끼는 경우이다. 이 현상세계가 전혀 실재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문제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 감각세계의 상대적 실재들을 궁극 실재라 여기고 거기에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 바쳐 섬기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노자님은 그의 《도덕경》 제l2장에서, 우리가 우리의 오관으로 감지되는 오색(五色), 오음(五音), 오미(五味) 등이 실재의 전부인 것으로 잘못 알고 거기에 집착하면 그것들의 참 근원이 되는 궁극 실재에는 장님처럼 귀머거리처럼 맛볼 줄 모르는 사람처럼 완전히 영적 무감각 상태에 빠져 버리게 된다고 했다. 허상을 좇고 있는 동안에는 실재를 생각할 수도, 그리워할 수도, 찾을 수도 없다. 이 세상의 부귀, 명예, 권력 같은 것만이 가장 실감 나는 현실이요, 삶의 보람이요, 경배를 받기에 합당한 신이다. 신학자 폴 틸리히의 용어를 빌리면 ‘의사(疑似) 종교(pseudo­religion)’에 빠진 상태이다.

둘째, 우리를 얽매는 또 하나의 그릇된 생각은 우리의 이성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우리의 머리로 사고하고, 추리하고, 논리화하고, 체계화한 것을 정말 ‘진짜’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사상이나 논리나 체계나 교리나 견해나 전통 등을 절대적인 무엇으로 여기고 거기에 부동의 충성과 정열을 바치는 것이다. 어느 특정 종교의 고정된 교리, 어느 문화의 철학 체계, 어느 사회의 정치 이념이나 제도 등을 상대적인 가변성의 무엇으로 생각지 않고, 영구불변의 ‘보편타당’한 절대적인 무엇으로 우상화하는 일이다. 우리가 이런 우상 숭배에 빠질 경우, 종파 중심주의, 교리 중심주의, 교회 중심주의, 정통주의, 보수주의, 근본주의, 계시 절대주의, 국수주의, 민족 제일주의, 공산주의 등등 소위 ‘주의’ 혹은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것을 신성시하고 거기에 궁극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틸리히는 이런 것을 ‘유사(類似) 종교(quasi-religion)’라고 불렀다.

셋째, 위에서 두 가지 종류의 집착을 예거했지만 사실 가장 근본적인 것, 모든 집착과 욕망의 바탕이 되는 것은 비본래적인 ‘나’ 혹은 ‘자기(self, ego)’를 절대적인 자리에다 올려놓고 숭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대부분의 사람은 이처럼 우리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지금의 ‘나’라고 하는 것을 최고의 현실, 가장 진실한 실재, 궁극적인 무엇으로 착각하면서 사는 것이다.

사실 너무나 가깝고, 너무나 진짜같이 보이는 이 ‘나’라고 하는 현실을 궁극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 사람에게는 정말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의심스럽다 하더라도 이 의심하고 있는 ‘나’라고 하는 존재는 아무래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현실적이고 실재적인 ‘나’를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의 중심으로 삼는 ‘자기중심주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 이 어쩔 수 없는 생래적 무지와 미망 때문에, 눈을 떠서 그 참된 궁극적 실재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자기 보존, 자기 확대, 자기 추구, 자기 영광, 자기만족 등의 본능을 충족시키려 발버둥치며 살아간다. 이런 일을 영어로 표현하면 ego­centricity, self­centeredness, egotism, selfishness, self­preservation, self­enlargement, self­seeking, self­glorification, self­gratification 등이다. 

이런 경우 나의 삶은, 내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말과 행동과 생각이 좁아터진 자의식의 소망인 욕심, 정욕, 갈구, 증오, 체면 등 자기중심적·이기적 요인들에 의해 강요당하는 삶이다. 진정한 의미의 주체적 삶이 아니라 ‘타의 아닌 타의’에 의해 지배되는 얽매인 삶이다. 내가 나의 주인으로 나를 위해 온갖 일을 해서 즐거움과 행복과 자유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국 내가 나의 정욕의 종이 되어, 목줄에 질질 끌려다니는 개처럼 그렇게 끌려간다는 어처구니없는 아이러니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삶은 그야말로 자유를 빼앗긴 얽매임의 삶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의 삶이다. 궁극실재와 분리된 상태요, 따라서 자기 동료 인간들에게도, 그리고 자기의 참 자아에서도 떨어져 겉도는 떨어짐, 소외(alienation, estragement)의 상태다.

깨달음의 길

이렇게 우리의 감각에 감지되는 현상세계, 우리 머리에 생각되는 소견들, 그리고 우리 의식 속에 박힌 ‘나’라고 하는 의식, 이런 것들이 결국 이 세상의 궁극적인 실재가 아님을 깨닫는 것이 이런 상대적인 것들에서 해방되어 궁극적인 것에 우리의 관심을 향하게 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선결 조건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궁극적인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알아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욕망과 집착, 자의식으로 찌든 마음을 깨끗이 함으로써 가능하다고 한다. 이렇게 마음을 깨끗이 하므로 마음의 눈이 뜨여 사물의 실재를 실재 그대로, 상대적인 것은 상대적으로, 절대적인 것은 절대적으로, 여실(如實)히 보게 되는 것을 일반적으로 ‘밝아짐(enlightenment)’ ‘깨침(awakening)’ ‘깨달음(realization)’ 등의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특히 이것을 ‘메타노이아(metanoia)’라고 했다. 그의 복음의 주제가 되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태복음 4:17, 마가복음 1:14)라는 말씀 중 ‘회개(悔改)’라고 하는 것은 한자(漢字)가 뜻하듯 ‘전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친다’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메타노이아’라는 희랍어 어원은 생각하고 보는 방법 자체가 바뀌는 것, 혹은 새로운 의식, 모든 형태의 자기중심적인 것에서 벗어나 완전히 다른 차원의 실재에 접함으로써 가치체계, 의식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 등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초청은 우리가 바로 이런 식의 종교적 체험을 갖도록 하기 위한 메타노이아에의 초청이다. 이처럼 마음을 비우는 것, 새롭게 하는 것, 마음의 눈을 뜨는 것, 현대 심리학의 용어로는 새로운 의식, ‘우주 의식(cosmic consciousness)’을 갖는 것, ‘의식의 변화(transformation of consciousness)’를 체험하는 것이다. 종교적 삶에서 이런 체험이 모든 일의 근본임은 기독교뿐 아니라 불교, 유교, 도교 등에서도 한결같이 제시하는 가르침이다.

자기 비움: 영적 테크닉

어떻게 해야 이렇게 청결한 마음으로 궁극실재를 꿰뚫어 보고 새사람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여러 가지 세부 테크닉의 문제는 각 종교가 각각 다른 면들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같은 종교 안에서도 사람마다 개성에 따라 다르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종교적 추구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그릇되게 생각하고 있는 이 ‘나’ ‘자기’ ‘자아’를 없애는 일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모든 종교, 모든 성인들이 다 같이 일치하여 강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기를 없애는 것, 자기를 비우는 것, 자기를 잊는 것, 자기를 부정하는 것, 무아(無我) 등으로 표현되는 ‘자아에서의 해방’, 좀 더 구체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욕심과 집착으로부터의 자유가 우리의 종교적 삶의 기본 태도가 되어야 한다. 영어로 하면 selflessness, egolessness, self-emptying, self-forgetting, self-denying, no-self 등이다.

몇 가지 구체적 사례를 들어본다.

① 노자님의 《도덕경》이라는 책 제7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하늘과 땅은 영원한데
하늘과 땅이 영원한 까닭은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참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인도 마찬가지,
자기를 앞세우지 않기에 앞서게 되고,
자기를 버리기에 자기를 보존합니다.

또, 제l6장에서

완전한 비움에 이르십시오.
참된 고요를 지키십시오.
온갖 것 어울려 생겨날 때
나는 그들의 되돌아감을 눈여겨봅니다.

제19장에는 “다듬지 않은 통나무의 질박함을 품는 것, ‘나’ 중심의 생각을 적게 하고 욕심을 줄이십시오.”라고 했다. 이렇게 자기를 비우는 것, 자기를 버리는 것, 자기의 껍데기를 뚫고 그 뿌리, 그 근원 ‘도’로 돌아가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도덕경》 전체의 일관된 중심 사상을 이루고 있다. 껍데기 자기와 거기에 관련되어 일어나는 온갖 번거롭고 산란한 마음을 없애고 고요를 되찾은 사람, 자기의 욕심이나 이기적인 생각에서 벗어난 사람, 참 실재·진리에 주파수를 맞춘 사람, 모든 잡다한 외부 조건에서 해방된 사람은 자기 스스로 하는 일이 하나도 없고 모두가 ‘저절로’ 됨을 본다. 이것이 《도덕경》에서 중심적으로 강조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 ‘자기가 하지 않고도 저절로 됨’의 뜻이다.

②예수님은 우리가 자기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해야 할 첫째 가는 일이 우리 자신을 부인하는 일이라고 말씀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태복음 16:24, 마가복음 8:34)라고 한 말씀, 너무나도 잘 알려진 말씀이 아닌가? 흔히 여기서 말하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라는 것을 가지고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려면 웬만한 고생이나 수모나 희생쯤은 각오해야 한다는 정도로 윤리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이해하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가르침에는 이런 윤리적·사회적 의미를 넘어서는 더 심오한 ‘종교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가 가져야 할 종교적 태도의 기본이 여기에 지적되어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그렇게도 중요시하고 위하고 모시고 섬기고 있는 이 ‘나’를 부인하는 것, 곧 그것을 십자가에 탕탕 못 박아 버리는 것이 종교의 기본 요건이라는 것을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죽이는 것이 바로 새로운 삶, 영원한 삶으로 부활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는 뜻이다. 지금껏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자기의 이기적 목숨만을 위하여 도사리고 챙기며 살아오던 생활 태도에서 훌훌 벗어나야만 참된 나, 참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계속하여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했던 게 아니겠는가? 이렇게 이해할 때, 예수님이 진정을 다하여 하신 말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한복음 12:24-25)라고 하신 것, 정말 의미 있는 말씀으로 들리지 않는가?

여기서도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것을 남을 위해 희생한다고 하는 정도의 윤리적 의미에서 보기보다는, 지금까지 자기중심적으로 도사리며 살아가던 이 딱딱한 껍데기 ‘나’를 두드려 부수고 내 속에 숨어 있는 새 생명이 움터 나오도록 한다는 신비스런 종교적 역설의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 우리의 참된 나, 대문자로 시작하는 Self가 아니라 소문자의 self, 이것을 중심으로 한 목숨, 생명, 이것을 붙잡고 썩게 하지 않으려고, 죽이지 않으려고, 그대로 보존하려고 발버둥치며 안간힘을 쓰고 있는 한 그것은 언제까지나 소문자의 self, 한 알의 밀 그대로 남아 있게 될 뿐이라는 것이다. 정말 새로운 목숨, 영생하는 생명을 얻으려면, 지금 이대로의 나, 이대로의 목숨, 이대로의 생명을 땅에 떨어뜨려 죽이고 그 껍데기에서 해방되는 것이 선결 조건이라는 뜻이다.

③무아(無我), 곧 내가 없다고 하는 것, 산스크리트 말로 anātman이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가 그렇게도 진짜라고 실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이 ‘나’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생각이 꾸며 놓은 허구요, 참 실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닫고, 거기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라고 하는 것이 적어도 초기불교의 기본 교리이다. 우리의 이 착각된 ‘나’에 매달려 그것을 위해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정욕의 불길을, ‘불어서 꺼 버린’ 상태가 바로 ‘열반(니르바나)’이라고 하는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욕심, 그 ‘목마름(tanha)’을 없애 버림으로써 맛볼 수 있는 시원함이다.

④자아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처럼 노자님이나 예수님이나 부처님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종교사에서 깊은 영적 심원에 접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중세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자아를 발견하고 ‘자아를 정화시키는 것(self-purification)’이 우리의 영적 성장 단계에서 밟아야 할 기본적인 단계라고 했다. 이 첫 단계가 이루어져야 둘째 단계인 ‘조명(illumination)’의 단계와 마지막 단계인 ‘합일(unity)’의 단계가 가능해진다는 이야기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영혼이 자신을 생각하는 일을 그만둠으로써만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고 하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도 “내가 말하려는 것은 만일 영혼이 신을 알려고 한다면 그것은 먼저 자기 스스로를 잊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한 결코 신을 보거나 의식할 수가 없다. 영혼이 진정으로 자신에 대해 의식하지 않고 모든 것을 버렸을 때 비로소 신 안에서 자신을 새로이 찾게 된다.”고 했고, 토마스 아 켐피스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우리가 스스로를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에 대해 더욱 완전히 죽으면 죽을수록 그는 그만큼 더 많이 신에 대해 아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수많은 성자들이 자기를 죽이는 것의 중요성을 그들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증언으로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종교의 길을 이 방면에서 요약하라면, 종교란 결국 껍데기 자기를 죽이는 체험을 통해 본래적 자기 존재의 근원, 궁극 실재를 발견해 가는 체험의 과정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짜 자기에서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는 ‘변화의 체험’이라는 뜻이고, 이 글을 시작하면서 지적한 표층 종교에서 심층 종교로 심화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자기에서 해방되면?

욕심이나 집착을 버리라, 자기를 부정하라, 자기를 비우라고 가르치는 종교의 길은 형극의 길, 희생의 길이라 한다. 어느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그것은 결코 희생의 길이 아니다. 옆에서 보면 고난의 길, 바보의 길로 보이지만 본인에게는 자유와 다이내믹스의 길이요, 창조와 발견, 자각과 성장, 평화와 기쁨의 길, 더할 수 없이 아름답고 보람된 길이다. 자기를 잊어버리는 길이 어떤 것인가를 이제 잠깐 우리의 일상생활, 윤리, 신앙의 차원에서 각각 생각해 본다.

1) 참으로 행복한 순간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정말 행복하고 기쁘다고 여기는 순간들이 언제인가? 우리 스스로를 완전히 까맣게 잊어버리는 그 순간들이 아닌가? 독서에 깊이 몰두해 있거나 아름다운 음악에 심취해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의식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때야말로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이 온몸을 감싸고 있는 순간들이 아닌가?

독서하고 음악을 듣는 데 시간과 정력을 바치는 것이 시험 점수를 잘 받기 위한, 나중에 있을 보상 때문이라면 희생으로 여겨질 수도 있고 지겨울 수도 있다. 그러나 독서나 음악을 통해 행복감에 젖어들고 그야말로 삼매지경에 이르는 사람에게는 희생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고 오로지 즐거움과 기쁨이 있을 뿐이다. 독서나 음악이 이렇게 즐겁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자기를 잊어버리는 것, 자기와 관계되는 모든 것, 예를 들어 나중의 보상이니 뭐니 하는 따위를 중심으로 하는 나의 욕심을 완전히 버리는 데서 얻어지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영화를 보고 재미있다는 것, 여행이 즐겁다는 것, 한 폭의 그림에 도취된다는 것, 축구가 재미있다는 것 등 우리를 신 나게 하는 것들은 모두 따지고 보면, 우리에게 나 자신을 잊게 하는 것들이다. 나가 다른 차원의 나로 들어가게, 혹은 나오게 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수많은 청중 앞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가수가 청중이나 기타나 악보나 자기 손가락이나 자기 자신 등 외부적인 것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몰아의 경지에서, 오로지 음악 자체와 하나가 된 상태인 ‘음악 속에서’ 연주할 때 가장 훌륭한 연주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악기를 다루어 본 사람은 누구나 잘 아는 일이다. 이뿐 아니라, 우리가 타자를 칠 때, 골프를 칠 때, 노래를 부를 때, 무슨 일을 할 때든 우리가 가장 창조적이고, 능률적이고, 생산적이고, 예술적으로 할 수 있는 순간은 우리가 ‘나’ 혹은 자의식에서 벗어난 순간들임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황홀경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ecstasy는 ‘밖에 서 있음’ 곧 나라고 하는 자의식, 우리의 일상적인 분별의식 밖에 서게 되는 몰아(沒我)의 경지를 뜻한다. 동양에서 하는 궁도(활쏘기), 검도 등의 무도나 꽃꽂이, 서예, 그림 그리기 등은 그 근본 의도가 몰아의 경지를 터득하는 훈련이다. 흥미로운 일은 서양에서도 요즘 유행하는 골프나 테니스를 통해 이런 경지에 이르려고 하는 노력이, 동양 사상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몇 가지 책에서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 예로 Eugen Herrigel, Zen in the Art of Archery; Michael Murphy, Golf in the Kingdom 같은 책을 볼 수 있다. 

2) 윤리의 완성

자기를 잊는다는 것,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종교인들의 ‘윤리’를 참다운 의미의 종교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데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나’라는 헛된 자기중심의 원리를 벗어 버려야만 우리의 욕심, 증오, 질투, 교만, 기만, 고집 등등 온갖 비윤리적인 것들에서 헤어날 수 있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심지어 윤리적 차원에서 일반적으로 건전하고 바람직한 일로 여겨지는 것들도 거기에 ‘나’라는 것을 앞세우려는 의식이 잠재해 있지 않을 때에만 비로소 진정으로 종교적 의미를 지닌 행위가 된다.

자기를 비우는 것, 자기를 죽이는 것, 자기의 욕심을 없애는 것을 적극적인 말로 표현하면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 혹은 ‘자비’가 아니겠는가? ‘사랑’이란 말 속에는 너무나도 많은 뜻이 들어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지만, 종교에서 말하는 참다운 사랑이란 결국 ‘자기를 주는 사랑’, 희랍어로 ‘아가페’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껏 ‘나’에게 쏟았던 관심을 사랑의 대상에게만 몽땅 쏟아붓는 절대적 사랑이다. 이와 반대로 남을 ‘사랑’하되 자기를 위해서 하는 ‘사랑’을 희랍어로 ‘에로스’라고 한다. 자기중심적 사랑,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사랑이다. 후일의 대가를 생각하거나 남의 칭찬이나 인정을 바라서 하는 상대적 사랑이다.

이런 에로스적 사랑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종교적 사랑과 반대되는 사랑이다. 아무리 남을 도와주고 남을 사랑한다고 해도 그것이 결국 자기를 위하려는 욕망에서 나온 행위라면, 그것은 결국 종교와는 상관이 없다고 하는 뜻이다. 흔히들 ‘내 이웃을 사랑한다’고만 하면 무조건 참으로 종교인이요 신앙인이라고 여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나의 썩어질 육신적 이해관계를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결국 나를 사랑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진정한 사랑이란 결국 자기를 죽이는 것, 자기를 버리는 것, 자기를 내어 주는 것, 자기를 잊어버리는 것에서만 우러나오는 마음가짐이요, 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웃과 사회를 위해 하는 행동이 참된 행동이 될 수 있기 위해서도 자기중심적 사욕에서 벗어나야 나야 한다. 유교의 경전 《대학(大學)》을 보면 우리 인간이 밟아 가는 여덟 가지 단계가 나온다. 거기에 따르면 사물을 궁구하고, 앎의 시야를 넓히고,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고, 인격을 도야한 사람만이 올바로 가정을 꾸리고, 사회를 다스리고, 궁극적으로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게 된다고 했다. 한자로 格物 致知 誠意 正心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이다.

예수님도 선지자 이사야의 체험을 인용하여 자신의 할 일을 말씀하실 때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18-19)고 했다. 여기서 먼저 주목되는 것은 이웃과 사회를 위한 참된 봉사의 활동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다는 체험이 있은 후에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장자》 제4장에 보면, 공자님과 그의 제자 안회의 대담이 나온다(여기서 공자님이나 안회의 이름이 쓰이긴 했지만, 역사적인 사실과는 상관없이 장자 자신의 사상을 그들의 입을 빌려 표현했을 뿐이다.). 위나라에 젊은 임금이 들어서서 폭정을 하므로 백성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 안회는 자기가 가서 어떻게 좀 해 보겠다고 공자님께 가도록 허락해 주십사고 요청을 드린다. 안회는 자신이 요즘 말로 해서 지적으로, 정치학적으로, 철학적으로, 도덕적으로 여러 가지 훌륭한 자격을 갖추었기에 가서 한번 이 병든 사회를 고쳐 봐야겠다는 결의를 표명한 셈이다.

그러나 공자님은 안회의 요청을 거절한다. 이유는 그 해박한 지식, 용기, 정의감, 도덕적 수준, 부지런함 등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안회가 그 모자라는 것이 무엇인지 자기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며 그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달라고 한다. 공자님은 그것이 바로 ‘마음을 굶기는 것(心齊, the fasting of the mind)’이라 대답한다. 이어서 마음을 굶긴다는 것은 바로 도(道)가 들어올 수 있도록 자기를 ‘비우는 것[唯道集虛 虛者心齊也]’이라고 말하고 이것이 가능하거든 그때 위나라로 가라고 한다

여기서 종교인이 사회 문제나 정치 문제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이다. 진정한 종교인이라면 관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만 우리의 현실 참여가 진정으로 사리사욕을 비우고 자기를 죽인 종교적·신앙적 무아의 경지에서 이루어진 것인가, 적어도 그런 자각 위에 기초된 것인가, 혹은 이웃과 사회를 위해 봉사한다는 미명 아래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는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의 목적을 성취하려는 것은 아닌가를 냉철히 검토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을 따름이다.

간디 옹의 “종교가 정치와 무관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종교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이 생각난다. 종교는 ‘참아라, 눈감아라, 그리고 어디 갈 꿈이나 꾸라’ 하는 식의 창백하고 얼빠진 안일무사주의, 내세지향주의로 자기를 도사리는 일이 아니다.

자기를 비운 참사랑은 온 우주를 감싸는 역동적(力動的) 힘으로 작용한다. 이렇게 자기를 비우고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 참종교의 알파와 오메가요, 진정한 종교적 삶의 바탕을 이루는 기본 원리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종교란 ‘자기중심주의의 극복(the overcoming of self-centredness)’이라고 단적으로 꼬집어 말한 영국의 유명한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Arnold Toynbee)의 말이 생각난다.

종교라고 했을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은, 우주를 초월하는 영적 실재와의 관계에 들어감으로써 그리고 우리의 의지를 그것과 조화시킴으로써 개인과 단체에서 자기 중심주의를 극복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평화를 위한 유일한 열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열쇠를 집어서 사용한다는 일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입장에 있다. 우리가 이 열쇠를 집어서 사용하게 되기까지에는 인류의 존속이 항상 의심스러운 상태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나무는 그 열매를 보고 안다. 종교인이라고 신앙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참 종교인, 참 신앙인인지 아닌지 알아보는 것은 비교적 간단한 일이라 생각된다. 아무리 청산유수로 말을 잘하고, 설득력 있고, 위세가 당당하고, 신을 사랑한다 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교회를 위하여, 사회를 위하여 훌륭한 일을 많이 하고, 심지어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이라도 아직도 그의 말과 행동과 생각이 자기중심의 원리에서 이루어지고 그 속에 ‘나’라고 하는 의식이 생생히 살아 있으면, 다시 말해서 일반적으로 쓰는 말대로 ‘사리 사욕’에 따라 움직이고 있으면, 그는 아직도 참 종교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 보아도 틀림없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요, 종교의 껍데기만 쓴 비종교인, 비신앙인이다.

3) 자유와 사랑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진정으로 자기를 비우는 것이다. 진정으로 사랑할 때, 진정으로 자기를 비울 때, 우리는 내 속에 있는 진정한 자아(自我), ‘신의 형상(imago Dei)’ 영원한 실재, 신 자신을 보게 된다. 이것이 사랑의 극치요 사랑의 신비이다. 윤리를 넘어서는 사랑의 종교적·신앙적 차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진정한 사랑, 진정한 자기 비움에 도달한 사람은, 진정한 실재인 신과 본래적인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모든 장애물을 제거함으로써 궁극실재와 내가 ‘하나’가 되는 합일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고 한 예수님의 말씀이나, “내가 내 뜻하는 바대로 따르나 [하늘이 뜻하는 바와] 어긋나게 나가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한 공자님의 ‘불유구(不踰矩)’의 경지나, 무엇이든 ‘도’에 어긋나게 나가는 일은 전혀 ‘하지 않음’의 상태를 가르치신 노자님의 ‘무위’의 체험은 모두 이 궁극실재와 하나 되는 데서 가능한 종교적 경지를 단적으로, 웅변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내 속에 신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심층적 종교에 접하게 되면, 나 스스로도 늠름하고 의연한 삶을 살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되고 내 이웃도 하늘 모시듯 하는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시천주(侍天主), 인내천(人乃天),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이상이 실현되는 셈이다. 

결국, 욕심을 버리고, 지금의 나를 비우고, 의식의 변화를 얻어, 사물의 참된 실재(眞如)를 보고, 참나를 찾아, 그 참나가 바로 신성, 불성임을 발견하여, 자유를 누리고, 이웃과 내가 다를 바가 없다는 자각에서 이웃을 내 몸처럼 여기고 그 이웃과 아픔을 같이하는 자비심을 갖는 것―이것이 세계 주요 종교에서 가르치는 바의 큰 틀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선 허망한 욕심을 다스리는 것이 선결조건이라는 이야기이다. ■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학교(University of Regina) 비교종교학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캐나다 맥매스터(McMaster) 대학교에서 화엄의 법계연기 사상에 대한 연구로 종교학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저서로는 《길벗들의 대화》 《도덕경》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장자》 《예수는 없다》 《예수가 외면한 그 한 가지 질문》 《세계종교 둘러보기》 《또 다른 예수》, 번역서로는 《종교 다원주의와 세계 종교》 《살아 계신 붓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 《귀향》 《예언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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