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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버릴 수 없는 화두 《조선불교유신론》/ 석길암
조선불교유신론 집필 100주년 기념논단
[45호] 2010년 12월 05일 (일) 석길암 huayen@ggu.ac.kr

1. 만해 그리고 《조선불교유신론》

시대가 변했다. 500년 가까이 억제되었던 승려들의 도성 출입이 가능해졌다. 억불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도성 출입 금지가 풀리면서, 승려들 역시 도성에 드나들게 되었다. 그 도성을 통해서 그리고 또 다른 경로로 이웃의 대국이었던 대청(大靑)을 무너뜨린 서구인들의 문물과 사상을 맛볼 수 있었다. 뒤늦게 그들에게 알려진 세상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리고 그 전혀 다른 세상은 그들이 발 딛고 있던 세상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예기치 않은 변화였다. 그들은 고민한다. 저 변화의 물결에 몸을 내맡길 것인가, 저 변화의 물결에 몸을 내맡기면 우리 불교의 살길이 열릴 것인가, 아니면 저 변화가 우리를 죽일 것인가. ‘근대’ 혹은 ‘서구’라는 것은 조선의 불교인, 특히 승려들에게는 이처럼 예기치 않은 변화였다.

다행히 그들의 고민을 앞서서 간 자들이 이웃에 있었다. 중국불교가 그랬고, 일본불교가 그랬다. 그들은 ‘근대’ 혹은 ‘서구’라는 새로운 변화를 ‘우리’보다 앞서 고민하고 변화를 모색했다. 그들이 고민한 결과, 그들이 모색한 변화를 탐독했다. 그들이 고민한 결과, 그들이 모색한 변화의 결과를 눈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고민과 모색이 전적으로 ‘우리’의 길일 수는 없었다. 그들과 우리의 처지가 달랐기 때문이다. 일본불교는 연속된 전통이라는 바탕 위에서 ‘근대’와 ‘서구’를 만나고, 중국불교가 전통과 일정 부분 단절한 상태에서 ‘근대’와 ‘서구’에 대응하여 새로운 거사불교, 학문불교의 전통을 주체적으로 재생산하는 길을 걸었지만, 조선불교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우리’에게 전통은 있으나 마나 한 미약한 숨결만 남은 존재였고, 국권을 상실해 가는 혹은 상실한 나라에서 주체적 재생산이란 말은 어쩌면 공허한 화두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래도 새로운 길은 필연적으로 모색되어야만 했다.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1944). 승려, 시인, 독립운동가, 항일지사, 급진적 개혁가, 혁명가, 유가적 불교인 등 수많은 수식어가 당연한 듯이 따르는 인물. 그렇게 암울했던 시대를 살아내야만 했던 대표적인 조선불교인. 그의 이력에 대한 많은 이들의 묘사를 따라가다 보면, 첫머리에 등재한 수식어 ‘승려’는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시인이며 항일독립운동가였으며, 급진적인 개혁가였던 인물만 덩그러니 남게 된다.

근대 인물 중에 가장 많이 회자되고, 가장 많은 연구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이기도 하지만, 막상 그에 대한 연구에서 ‘불교’를 발견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연구 대부분은 《님의 침묵》을 대상으로 한 문학적 연구, 항일독립운동가로서의 만해와 사회개혁 및 불교 개혁가로서 만해라는 부분에 초점이 맞추어진 역사적 시각에서의 접근이다.

만해 한용운의 ‘불교사상’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한 연구 성과는 그리 흔치 않은 편이다. 그나마 불교사상에 대한 연구의 많은 부분은 《조선불교유신론》(이하 《유신론》)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리고 《유신론》을 대상으로 한 연구 성과들은 대부분 만해를 불교개혁운동가로 자리매김하는 결론을 내린다.

물론 《유신론》을 통한 ‘만해 보기’가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신론》이 ‘만해 보기’의 결정판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시대의 질곡을 출발점으로 삼았던 만해에게 있어서, 그리고 그 출발점에서 내놓은 것이 《유신론》이라는 점에서, 《유신론》이 만해의 이후 행로에서 주요한 이정표였다는 시각은 당연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만해의 전부인 양 간주하는 것은 위험하다. 출발점은 출발점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출발점이 일생을 좌우한다고 해도.

그것은 만해의 불교개혁사상을 말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만해는 1930년대 이후에도 꾸준히 불교와 사회에 대한 논설들을 발표하고 있고, 그중에는 불교개혁에 대한 논설 역시 적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들이 《유신론》의 논조와 전적으로 동일한 것도 아니다. 따라서 《유신론》만 가지고 만해를 이야기하거나 혹은 만해의 불교개혁을 전부인 양 논하는 것은 위험할 수밖에 없다. 《유신론》은 만해의 생애, 한정하여 승려로서의 생애에서 극히 초반부의 시점에 쓰인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유신론》을 읽을 때, 또 신중해야 하는 부분은 전통과 근대를 어떻게 구획 지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른바 ‘개화기’ 혹은 사회변동기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군상이 그러하겠지만, 한 사람이 가진 사고의 체계가 명료하게 구획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근대’와 ‘서구’라는 경이로운 문명과 낡은 전통이 교차하고, 근대와 서구를 어느 정도는 차용하고 있는 일본이라는 이미지와 침략자라는 일본의 이미지 그리고 전통과 침략자에 대한 저항의 이미지가 서로 교차하는 복잡한 시대였다. 《유신론》은 그러한 시대를 등지고 태어난 산물이다. 따라서 단순히 어느 한 이미지만을 차용하여 흑백으로 갈라서 바라보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시각이다. 더구나 그것이 반세기가 지난 이후에 형성되고 덧칠된 민족주의의 시각을 차용한 것이라면, 또는 전통과 근대의 갈등이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을 차용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따라서 우리는 《유신론》을 읽을 때, 그 배경이 되었던 시대의 복잡다단한 교차점을 먼저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위에서 혼란한 시대를 헤치고 나가자고 마음먹은 만해의 지향점이 무엇이었는지를 읽어내야 한다. 다만 《유신론》에서 보이는 만해의 지향점은 최종적인 지향점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만해는 《유신론》에서 “이 ‘유신론’이 문명국 사람의 처지에서 보기에는 실로 무용지장물(無用之長物)로 비칠 것이다. 그러나 조선 승려의 전도를 생각하는 처지에 선다면 반드시 조금은 채택할 것이 없지도 않으리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시절인연에 따른 유효성을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신론》은 여전히 그 유효성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유신론》 이후에 수많은 불교개혁론이 당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하지만 왜 그 유효성이 아직도 진행형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만해가 기대했던 ‘《유신론》이 거짓 유신의 구실을 하게 되는 후일’은 왜 아직 도래하지 않았던 것일까?

논자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한다. 만해의 시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먼저 《유신론》에서 말하는 ‘파괴’와 ‘유신’의 대상은 무엇이었는지 하는 것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2. 파괴와 유신의 대상

1) 만해가 생각하는 파괴와 유신 그리고 불교

《유신론》을 초한 직후인 1910년 9월 중순경, 만해는 승려의 결혼을 허용해 달라는 내용의 이른바 〈통감부 건백서〉를 올린다. “국권상실에 즈음하여 어느 지사는 음독자결을 하였고, 일제의 타도를 위해 목숨을 걸고, 친일파 처단을 맹서하고, 이국땅의 독립운동가들은 국권회복을 위해 총을 들었는데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모순에 빠진다. 그에 대한 설명은 매우 어렵다. 일단 우리는 만해가 이 단계에서는 민족의식이 매우 투철하지 않았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라는 이 사건에 대한 어느 학자의 고민에서처럼, 1910년을 전후한 시기에 보이는 만해의 행로를 두고 그의 민족의식을 생각할 때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라는 시각이 만만치 않다.

이것은 ‘왜색’으로 간주되는 ‘승려의 가취(嫁娶)’ 문제에 대한 의구심과도 맞물려 있다. 《유신론》의 다른 부분은 다 이해하겠는데, 승려의 가취 허용만큼은 왜 주장했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투의 의견들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문제는 사실 하나의 목적에 맞물려서 이루어진 것이다. 《유신론》의 〈포교를 논함〉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조선불교가 유린된 원인은 세력이 부진한 탓이며, 세력의 부진은 가르침이 포교되지 않은 데 원인이 있다. 가르침이란 종교의 의무의 선과 세력의 선이 함께 나아가는 원천이다.

……세력이란 자유를 보호하는 신장(神將)이니, 세력이 한번 꺾이면 자유 또한 상실되어 살아도 죽은 것과 다를 바 없어지게 마련이다. 아, 뒤집혀진 보금자리 밑에서는 성한 알을 기대할 수 없고 가죽이 남아 있지 않으면 털을 어디 가서 구하랴. 불교가 망해도 승려는 홀로 남아 있겠는가. 불교가 쇠미해져도 승려는 홀로 번성할 수 있겠는가. 불교의 흥망은 실로 승려의 흥망을 예고하는 사전선고인 것이다. 그렇다면 승려가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는 것도 간접적으로는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이 될 따름이다. 세력으로 나를 이롭게 하는 것 외에 한 걸음 나아가 목숨을 던지고도 사양치 않을 것 같은 행동은 오직 중생을 제도코자 하는 까닭이니, 자리이타가 아울러 포교에 있다고 해야 한다.

이 부분에서 만해는 조선불교가 쇠잔해진 원인을 세력이 부진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세력이 부진한 이유는 포교의 부족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세력을 일으켜서 나를 이롭게 하고 나아가서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포교가 중요한 연유를, 만해는 ‘세력이 자유를 보호하는 신장(神將)’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면 수긍이 가는 말인 듯도 하지만, 조금만 고민해 보면 그것이 실은 ‘강자생존’의 논리를 설파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강자생존의 논리는 쇠잔해진 조선불교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당시의 조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인용문에서 ‘[조선]불교’를 ‘조선’으로 ‘승려’를 ‘조선백성’으로 바꾸어보자.

‘조선’이 유린된 원인은 세력이 부진한 탓이며, 세력의 부진은 가르침이 포교 되지 않은 데 원인이 있다. ……세력이란 자유를 보호하는 신장(神將)이니, 세력이 한번 꺾이면 자유 또한 상실되어 살아도 죽은 것과 다를 바 없어지게 마련이다. ……‘조선’이 망해도 ‘조선백성’은 홀로 남아 있겠는가. ‘조선’이 쇠미해져도 ‘조선백성’은 홀로 번성할 수 있겠는가. ‘조선’의 흥망은 실로 ‘조선백성’의 흥망을 예고하는 사전선고인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백성’이 ‘조선’을 일으키고자 하는 것도 간접적으로는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이 될 따름이다.

이렇게 보면 만해에게 있어서 조선불교와 조선은, 승려와 조선백성은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만해에게 있어서 자유를 보호하는 신장(神將)인 ‘세력’의 양성은 대단히 중요한 일인 것이다. 세력을 양성하지 못하면, 조선불교의 부흥은 그리고 조선의 부흥은 불가능하게 된다. 건백서의 제출도 승려의 가취(嫁娶) 허용도 만해에게는 세력을 양성하기 위해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아래에서 살펴보겠지만 만해가 불교의 이념으로 ‘구세주의’를 내세우는 것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다.

또 《유신론》에서 ‘자유’란 하나의 키워드 기능을 한다. 〈불교의 성질을 논함〉에서 만해는 불교의 철학적 성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님의 말씀에 소위 진여란 것이 있는데, 진여란 곧 칸트의 진정한 자아여서 자유성을 지닌 것이며, 또 소위 무명이라는 것이 있는데 무명이란 칸트의 현상적인 자아에 해당하는 개념이어서 필연의 법칙에 구속되어 자유성이 없는 것을 뜻한다.
……칸트의 본의에 의하면, 진정한 자아는 결코 다른 무엇에 의해 구애되든지 가리어지든지 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구애를 받고 가림을 받으면 그것은 자유를 상실한 것이라 하였다. 양계초가 부처님과 칸트의 다른 점을 언급한 것을 보건대 반드시 모두가 타당하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왜 그런가. 부처님은 천상천하에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 하셨는데, 이것은 사람마다 각각 하나의 자유스러운 진정한 자아를 지니고 있음을 밝히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진정한 자아와 각자가 개별적으로 지닌 진정한 자아에 대해 미흡함이 없이 언급하셨으나, 다만 칸트의 경우는 개별적인 그것에만 생각이 미쳤고, 만인에게 보편적으로 공통되는 진정한 자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못하였다. ……사람마다 지닌 불성이 같고 진리가 원래 하나인 까닭에 방법과 과정이 달라도 동일한 결론으로 돌아가고 만 갈래가 하나를 받들게 되는 것이니, 불교는 철리의 큰 나라라 하겠다.

만해는 진여를 ‘칸트의 진정한 자아’ ‘자유성을 지닌 것’이라는 양계초의 말을 인용하고, 그것에 의지하여 사람마다 지닌 불성에 대해 ‘사람마다 각각 하나의 자유스러운 진정한 자아를 지니’고 있다고 설파한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불교의 주의(主義) 곧 추구하는 바, 이상은 무엇인지 논한다. 다음은 〈불교의 주의를 논함〉 중에서 평등주의에 관한 부분이다.

요컨대 소위 평등이란 진리를 지적한 것이며 현상을 말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이 불평등한 거짓된 현상에 미혹하여 해탈하지 못함을 불쌍히 여기신 까닭에 평등한 진리를 들어 가르치셨던 것이니, 경에 “몸과 마음이 필경 평등하여 여러 중생과 같고 다름이 없음을 알라.” 하셨고, 또 “유성(有性)ㆍ무성(無性)이 한가지로 불도(佛道)를 이룬다.”고 하셨다. ……근세의 자유주의와 세계주의가 사실은 평등한 이 진리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만해는 불교의 평등을 말한 다음, 그것을 다시 근세 곧 서구의 자유주의와 세계주의를 끌어와서 평등주의를 설명한다. ‘자유란 남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것으로 한계를 삼는다’는 자유의 법칙을 끌어와서 “사람들이 각자 자유를 보유하여 남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다면” 남의 자유와 나의 자유가 서로 동일해져서 수평선처럼 가지런해지는 것이 자유주의라고 한다. 반면 세계주의는 “자국과 타국, 이 주(州)와 저 주, 이 인종과 저 인종을 논하지 않고 똑같이 한집안으로 보고 형제로 여겨, 서로 경쟁함이 없고 침탈함이 없어서, 세계 다스리기를 한 집을 다스리는 것같이 함”이라고 정의한다.

온전한 불교의 입장보다는, 불교에서 말하는 평등을 자유주의와 세계주의로 치환한 것에 가깝다. 불교에서 말하는 평등은 ‘남의 자유와 나의 자유가 서로 동일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같고 다름이 없음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유성중생(有性衆生)과 무성중생(無性衆生)이 한 가지로 불도를 이루는 것’이 평등이지 ‘일종의 사해동포주의에 의해 상호 간의 경쟁이 사라지는 것’이 평등의 진면목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해는 이 부분에서 평등의 상동(相同)이라는 의미를 강조하여 취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진 상동성(相同性)은 만해가 불교의 구세주의 이념을 제시하는 전제로 사용된 듯하다. 구세주의를 설명하면서 구세주의의 당위성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이 《화엄경》의 “나는 마땅히 널리 일체중생을 위하여 일체 세계와 일체 악취(惡趣) 중에서 영원토록 일체의 고통을 받으리라.” “나는 마땅히 저 지옥·축생·염라왕의 처소에 이 몸으로써 인질을 삼아 모든 악취의 중생을 구속(救贖)하여 해탈을 얻게 하리라”는 구절을 인용하고는, 그것으로써 부처님의 말씀이 한 게송도 구세의 일념에서 벗어남이 없다고 선언하는 데 그치기 때문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만해가 생각하는 불교의 지향점이 ‘자유’에 있고, 그 ‘자유’는 구세를 통해 중생을 이끌어야 하는 지점으로 설정된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양계초의 말을 빌려서 ‘진여’는 ‘칸트의 진정한 자아여서 자유성을 지닌 것’으로 정의하는 만해의 서술에서도 확인된다. 그렇다면 만해에게 있어서 유신해서 도달해야 할 지점은 ‘자유’에 있을 것이고, 파괴해야 할 대상은 ‘그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지나친 비약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된다.

2) 파괴와 유신, 구체적 대상과 목적

여기에서 《유신론》에서 만해가 말하는 폐단과 그 폐단의 이유들을 대략이나마 훑어 보자.

만해는 〈불교의 유신은 마땅히 먼저 파괴함으로부터임을 논함〉에서 ‘구습 중에서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을 고쳐서 이를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함’을 파괴와 유신이라 말한다. 그럼 파괴의 대상이 된 그 구습, 불교 전래 후 1,500년이 지나면서 극치에 이른 폐단은 어떤 것일까?

〈승려의 교육을 논함〉에서는 ‘지혜와 박학과 아울러 사상의 자유가 결핍한 것이 우리 승려의 학문이 타락한 까닭’이라고 지적하면서, “청년들이 저들에게 무슨 원한 살 일을 했기에 이들로 하여금 배우지 못하여 같이 멸망의 길로 들어가게 하는 것인가”라고 일갈한다. 그리고 보통학(普通學), 사범학(師範學), 외국유학을 통해서 후생에 대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참선을 논함〉에서는, 옛사람들은 마음을 고요히 하여 움직이지 않았는데 요즘 사람들은 그 처소를 고요한 데 가지고고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것을 참선으로 여겨서, 염세와 독선에 빠졌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것은 불교가 구세의 가르침이며, 중생제도의 가르침임을 잊은 처사이기에 고쳐야 한다고 지적한다.

〈사원의 위치를 논함〉에서는 “나는 일찍부터 불교의 세력을 확장하고자 마음먹어 왔으나, 항상 승려의 사상 정도가 다른 사람들만 못함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무교육자이면서도 그 자연스러운 사고력이 [승려가] 남보다 떨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 원인은 처소를 택함이 적절치 못함에 있다.” 왜인가. 절이 산간에 있다 보니 진보의 사상, 모험적인 사상, 구세의 사상, 경쟁의 사상이 없게 되기 때문에 뒤떨어진다는 것이다.

〈불교의 앞날이 승려의 가취(嫁娶) 여부와 관련이 있음을 논함〉에서는 “나에게 ‘불교는 무슨 방법으로 장차 부흥시킬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반드시 이렇게 말하겠다. ‘승려의 결혼 금지를 푸는 것도 중요하고 시급한 대책의 하나일 것이다.’라고.” 그럼 왜 결혼 금지가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가. 만해는 네 가지를 들고 있는데, 앞의 윤리에 해롭다는 것과 국가에 해롭다는 것은 계율로 본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것이 불교의 앞날과 직접 관련되어 있지는 않다. 불교의 앞날과 직접 관련되는 것은 뒤의 두 가지이다. 포교에 해롭다는 것과 교화에 해롭다는 것. 만해는 포교에 해롭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우리는 승려로 하여금 결혼을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불교로 하여금 장차 세계에 퍼지도록 해야 할 것인가”라고 묻는다.

〈포교를 논함〉 부분은 앞서 첫 번째 인용 부분에서 언급한 바 있으므로 재인용하지는 않겠지만, 조선불교의 쇠락 원인을 세력의 부진에서 찾고, 세력의 부진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포교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둔다.

이상 제시한 몇몇 부분을 통해서 그 구습의 구체적인 모습은 대략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흥미로운 것은 조선불교의 쇠잔 원인과 파괴하고 유신하는 목적에 대한 만해의 관점이 서로 대응한다는 것이다. 왜 쇠잔해졌는가? 만해의 언급들을 보면, 조선불교의 쇠잔은 대부분 구세, 교화, 중생제도의 정신이 없어서 포교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며, 이 포교에 대한 무관심은 다시 불교의 각 부분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낡아서 구습이 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진단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파괴하고 유신하는’ 목적이야 당연히 ‘조선불교의 부흥’에 있다. 그런데 왜 조선불교는 부흥되어야 하는가? 본 장의 첫 번째 인용문에 그 답이 있다. ‘세력’은 ‘자유’를 보호하는 신장(神將)이다. 이때의 자유는 만해에게 있어서 불교인이 도달해야 할 지점이다. 그러나 만해가 보기에 조선불교는 이 ‘세력’이 약하기 때문에 유신해서 도달해야 할 지점인 ‘자유’를 보호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해는 유신을 통해서 조선불교의 세력을 키우는 것이 간접적으로는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중생을 제도함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3. ‘유신’의 구체화와 실천

앞서 살펴본 것처럼 《유신론》은 사회진화론적 인식을 저변 삼아 불교계몽적인 입장으로 읽히는 부분이 적지 않다. 서론과 결론을 제외한 《유신론》의 나머지 15장을 논자는 다음과 같이 분류해본다.

①서론/ 불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 ; 〈불교의 성질을 논함〉 〈불교의 주의를 논함〉 〈불교의 유신은 마땅히 먼저 파괴함으로부터임을 논함〉

②불교의 지신(智信)과 교육 분야에서의 파괴와 유신 ; 〈승려의 교육을 논함〉 〈참선을 논함〉 〈염불당의 폐지를 논함〉 〈불교에서 숭배하는 소회(塑繪)를 논함〉 〈불교의 각종 의식을 논함〉

③포교 관련 분야에서의 파괴와 유신 ; 〈포교를 논함〉 〈사원의 위치를 논함〉 〈승려의 인권회복을 논함〉 〈불교의 앞날이 승려의 가취(嫁娶) 여부와 관련이 있음을 논함〉

④불교의 세력 분야에서의 파괴와 유신 ; 〈사원 주직(住職)의 선거법을 논함〉 〈승려의 단체를 논함〉 〈사원의 통할(統轄)을 논함〉

①은 불교의 본지(本旨)를 사회진화론을 비롯한 서구사상을 활용하여 해명한 부분이고, ②는 교육과 계몽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③은 ①에서 불교의 지향점으로 제시한 구세주의의 1차적 실천 단계로서 포교 관련 분야의 유신을 다룬 것이고, ④는 ③을 전제로 ‘세력’을 부흥하기 위한 유신을 다루는 부분에 해당한다.

불교의 본지에 대한 설명은 물론, 각 분야에 대한 유신에 있어서도 만해는 불교 내적인 근거와 근대 혹은 서구와의 비교 혹은 지향점의 일치를 제시함으로써 유신의 타당성을 담보하려는 노력을 보인다. 그러나 교단의 병폐를 피상적, 관념적으로만 제시한다든가, 승려의 가취(嫁娶)와 같은 계율의 문제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세속적인 관점에서 논지를 전개한다든지, 불교의 성질이나 주의를 서양철학과 비교하여 설명하면서 양자의 근본 입각점을 도외시한 채 지나치게 단순화시켜서 그 상동(相同)함을 주장한다든지 하는 한계점을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의 노정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조선불교에 있어서 ‘근대’와 ‘서구’는 아직 낯선 것이었고, 전통은 아직 오랜 세월의 억압으로 인한 쇠잔함을 벗어나지 못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유신론》의 대상이자 주체라 할 조선불교는 잠에서 깨어나 쇠잔한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일본제국의 침탈과 근대라는 격변과 그 격변의 힘을 등에 업은 서구 종교의 강렬한 기세에 주눅이 든 상태였다. 더군다나 만해 역시 출가한 지 5년여밖에 되지 않는 32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의 승려였다. 근대로 대변되는 서구의 사상이든 전통으로 대변되는 불교이든, 그 어느 쪽도 농익지 않은 상태였다고밖에 볼 수 없다. 하나의 전통 안에 있는 것도 아닌 전혀 이질적인 두 사상이 하나로 녹여지면서, 높은 수준의 사상세계를 표출해 내기에는 아직 일렀다.

하지만 그 어색한 융합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요청에 과감히 응하여 답변을 제출하고, 그 답변 역시 단순하고 명쾌하며 구체적이었다는 점에서, 설익은 논변은 역사 속에서 그 존재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유신론》의 광고 문안에 “일면으로 막대한 찬상(讚賞)을 득(得)하고 일면으로 무한한 타격(打擊)을 수(受)”하였다는 것은 그러한 사정에서였을 것이다. 《유신론》은 당시의 여타 개혁론들과 비교할 때 투박했지만 명료했고, 어색했지만 구체적이었다. 명료한 만큼, 구체적인 만큼 그에 대한 호불호 역시 더욱 뚜렷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세세한 분야를 망라하는 개혁안의 구체성은 당시 불교개혁파의 인사들에 의해 다양하게 제기되었던 불교개혁론들을 대표하는 자리에 《유신론》을 올려놓게 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게다가 만해는 《유신론》 집필과 간행을 전후한 시기에 진행되었던 임제종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유신론》의 간행과 임제종 운동을 계기로 한 민족의식의 고양은 이후 만해의 삶의 향방을 결정하는 계기가 된다. 이후의 만해에게는 불교개혁운동가, 항일운동가, 독립지사라는 호칭이 늘 따라붙게 된다. 하지만 3·1 독립운동과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늘 불교계에서 불교단체의 조직과 그를 통한 포교와 교화의 현장에 서 있는 만해를 발견하게 된다. 만해에게는 유신을 통한 조선불교의 부흥이 조선불교만의 부흥이 아니라 조선의 부흥과 동일시되었던 까닭이다. 이후에도 만해의 논설이 늘 구세(救世)와 입니입수(入泥入水)의 화두를 놓지 않는 것 역시 동일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만해의 생애를 일관하고 있는 구세주의의 실천은 ‘세력’을 일으키기 위한 노력으로 구체화된다. 《유신론》 이후 만해가 거의 전 생애를 불교단체 활동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단순히 그가 불교개혁가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세력’을 일으키는 구체적인 방법론으로서 불교의 부흥, 조선의 부흥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해의 그 지속적인 실천을 1938년에 쓴 〈불교청년운동을 부활하라〉에서 한눈에 볼 수 있다.

그 남상(濫觴)으로 말하면 지금으로부터 26년 전 조선 불교의 역사적 페이지를 돌려놓은 유명한 임제종 운동 때에, 그 기치가 호남 일우(一隅)로부터 영남 일대에 날리면서 점점 전 조선의 불교계를 풍미하매, 전국 사찰에는 크게 초목개병(草木皆兵)의 세가 있어서 불교청년은 누구든지 피가 튀고 주먹이 쥐어져서, 일호백낙(一毫百諾)·일파만파로 보종운동(保宗運動)의 예비병으로 대기의 자세를 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잠재 세력으로 십 년의 성상을 지나다가, 경신년 6월에 불교 중앙학림 학생을 중심으로 경성에서 조선불교청년회가 성립되어, 유수한 각 사찰에 지회를 두었으니, 이것이 구체적 형식으로 나타난 불교 청년 운동이었다. 그리하여 각종의 활동을 진행하다가, 그 재익년(再翌年)인 임술년에 불교청년회의 동근이지(同根異枝)인 조선불교유신회가 설립되었으니, ……유신회의 업적은 실로 찬연한 바 있었으니, 당당히 정교의 분립을 주창하여 사찰령의 철폐를 요구하고, 중앙의 불교기관을 각성시켜 불합리한 법규를 정정하며, 산간의 도피적 불교로서 사회적ㆍ대중적 불교를 건설하기를 진력하여 적지 아니한 공적을 쌓았다. ……청년회나 유신회를 막론하고 운동자금이 결핍할 뿐 아니라, 마침내는 간판까지 유지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설립한 후 3년 만에 자연히 소멸하였고, ……그리하여 위미부진(萎靡不振) 4, 5 성상을 지나다가 정묘년경에 불교청년회를 부흥하였고, 그 후 5년을 경과한 신미년에 조직을 변경하여 청년동맹으로 하였다.

불교청년운동 하나만을 예로 든 것인데, 1912년 이후 약 26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늘 청년운동의 중심에서 움직이고 있는 만해를 발견할 수 있다. 꼭 청년운동만이 아니다. 이 기간 동안 만해는 교육, 종단, 독립운동단체 등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고, 그 와중에 다시 시와 소설은 물론 불전의 번역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유신과 부흥에 관련된 일이라면 관여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이다.

그러한 만해의 지향은 1931년 10월 《불교》 88호에 발표했던 〈조선불교개혁안〉에서 다시 한 번 정리되어 제시된다. 〈조선불교개혁안〉은 크게 일곱 가지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 요지는 조선불교를 총괄하는 통일기관을 설치하여 집단적 운용이 가능하도록 할 것, 산간 사찰을 폐하고 도시와 촌락 중심의 대중 불교를 건설할 것, 경론을 번역하고 선교(禪敎)를 진흥할 것 등이다. 만해의 지향점이 여전히 포교와 교육, 그리고 불교의 세력을 부흥하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 같은 만해의 지향은, 그것이 근대를 향한 전통불교의 개혁이라는 측면에서 근대적이라 해야 할 것이다.

4. 전통의 복고와 근대의 단절, 그리고

만해가 줄곧 주장하고 현장에서 실천해 나갔던 ‘유신불교’는 그의 사후, 해방된 공간에서 일시적으로 실현의 기회를 맞게 된다. 만해를 당수로 했던 만당(卍黨)의 구성원으로 활약하고, 만해의 영향을 받았던 김법린 등이 일시적으로나마 1945년 새롭게 출범한 불교교단의 집행부를 맡았기 때문이다.

조선불교 중앙총무원이 설치되고, 총무원장에 김법린이 선출되었으며, 교단의 집행부에 최범술, 박윤진, 박윤희, 장도환 등 만당의 당원을 지냈던 이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산간사원의 불교를 도시 대중의 불교로’를 구호 삼아 불교의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교구제의 실시, 재산의 통합, 교도제의 실시, 역경사업의 발기, 일제 세력의 숙청 등이 제1회 전국교무회의에서 논의되었다. 만해가 《유신론》을 통해서 〈조선불교개혁안〉을 통해서 바라마지 않던 것들이 해방공간의 불교교단에서 구체화되는 듯했다.

하지만 좌우대립과 교도제 시행을 둘러싸고 대처승의 지위 문제에서 대립이 발생했을 때 혁신파는 비구승 중심의 교단 건설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법린은 “불교가 비구승단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시대의 역행으로서 대승불교 해방불교의 승단은 아직 만해 선생의 불교유신 정신에 입각하여 대변동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오래가지 못했다.

1950년대에 등장한 정화운동이 흐름의 많은 부분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 김광식은 “8ㆍ15 해방 이후 특히 1950년대에 등장한 정화운동(법난, 분규 등)에서는 한용운의 불교 대중화 논리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물론 당시 일부 세력(대처승, 태고종)은 한용운 노선을 지지한 경우도 있었지만 기본 흐름은 만해 노선의 거세였다고 본다”고 지적하고 있다. 김상현은 정화운동과 그 이후의 변화를 “대중불교를 지향하는 총무원 측과 비구승단을 지향하는 혁신세력 간의 심한 갈등을 거쳐, 1950년대에는 이청담 등이 주도하는 정화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에서는 만해가 선창하고 김법린 등이 계승했던 불교의 근대적 변용, 즉 대중불교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그리고 반세기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한국불교는 승려 중심으로, 그리고 종교적 근본주의로 전개되었다.”고 지적한다.

논자는 많은 부분 이 지적에 동의한다. 논자 역시 봉암사 결사로부터 정화를 거치는 과정이 전통의 복원이라기보다는 전통의 선택에 가까우며, 그 전통이 선택되는 과정에서 ‘근대적’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불교의 많은 부분이 배제되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봉암사 결사는 ‘부처님 법대로’라는 기치를 내걸고, 그 ‘부처님 법대로’가 ‘출가승 위주의 수행종풍이라는 전통’에 있음을 규정했다. 최근의 조계종단이 강조하고 있는 것에서 보듯이, 출가승 위주의 수행종풍이란 것은 선종 실은 그중에서도 임제종의 ‘간화선’ 종풍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것이 개화기와 국권 상실기에 상실해 버렸던 ‘전통’으로 규정되었다. 그것이 바람직한 선택이었느냐는 질문은 이 경우 별로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전통으로의 복귀’를 선택한 행위 그 자체가 이미 전근대로부터 근대로 나아가는 행보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곧 ‘전통으로의 복귀’는 이미 복귀가 아니라 또 다른 방식의 나아감이었다.

논자의 생각으로는, 이 단계까지만 하더라도 봉암사 결사에 의해 선택된 전통은 해방 이후의 공간에서 선택된 지향점의 한 갈래였을 뿐이라고 본다. 실제 봉암사 결사에서 선택된 공주규약의 상당 부분은 만해가 지향했던 바와 공통된다. 하지만 봉암사 결사가 정화운동으로 이어지면서 그 ‘전통에 대한 선택’의 의식이 강해졌을 때, 양자는 공유하고 있는 부분들에 불구하고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만해에게는 개혁이었던 것이, 정화운동에서는 ‘전통’과 ‘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선택과 파괴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선택된 전통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수많은 불교의 근대, 만해 혹은 《조선불교유신론》으로 표상되던 수많은 불교의 근대는 묻혀 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전통의 복고, 아니 전통의 선택은 반작용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개화기 이후 전통의 보존 혹은 계승을 위해 행해진 노력이 자그마한 역류였다면, 억압받고 정체되었던 조선의 불교 현실을 극복하려는 숨 틔우기의 노력과 근대화의 시대적 대세가 합쳐져서 만들어낸 변화는 거대한 격랑이었기 때문이다.

정화운동이라고 하는 새로운 단절에도 불구하고, 만해가 생각했던 개혁은 많은 구체적인 시안들은 시대의 역류를 비집고 다시금 하나 둘 새로운 물줄기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실상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제안된 많은 개혁안들은 만해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당시 조선불교인들이 공감하고 있던 현실을 되짚는 반성 위에서 기획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구체적인 개혁 방안들 역시 전적인 동의를 받는 것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인 그림들은 이미 형성된 공감대를 반영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일례로 산간불교로부터 도시불교로의 변화 같은 것들은, 만해의 ‘승려가취론(僧侶嫁娶論)’에 극력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용성 같은 이들이 만해보다 오히려 앞장서서 실천했던 방안들이기도 하다. 정화운동이 수행승들의 산간수행 공간을 되살리고 보존해 내는 데는 성공적이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불교와 급변하는 사회의 간격을 더욱 벌려 놓는 결과를 초래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불광사를 필두로 하여 수많은 도심포교 공간의 건설이 시도되었던 것은 정화운동의 선택이 초래한 단절을 극복해야 한다는 새로운 인식의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후 약 40여 년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일부 도심포교 공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산간사찰은 낡은 수행 공간, 전통보존 공간으로서의 기능만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듯 보인다. 오히려 시대로부터 멀어져서 현시대와의 시간적, 공간적 간격을 확대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간격이 확대될 때마다 개인 차원의 혹은 종단 차원의 개혁이 거세게 요구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5. 맺는 말

《조선불교유신론》은 아직도 꿋꿋하게 살아 있다. 안타깝게도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것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인구에 회자된다. 뿐만이 아니다. 만해가 《유신론》에서 제안했던 개혁안의 구체적인 조목들 역시 거개가 아직도 새로운 개혁론들 속에 포함되어 제기된다.

한국불교는 수많은 전통사찰이 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수행공간이나 교육공간, 혹은 신행공간으로서 제대로 기능하는 전통사찰이 몇이나 있는가? 거개의 전통사찰은 짧게는 몇십 년 전의 과거부터 길게는 몇백 년 전의 과거를 복원해 놓은 문화재 전시관일 뿐이다. 거기에 신행이나 수행, 교육이나 교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해가 말한 산간불교에서 도심 대중불교로의 전환은 사찰의 위치를 도심으로 옮기라는 것이 아니다. 시대와 사회와 함께 호흡하는 공간으로서 사찰을 거듭나게 하라는 것이다. 그나마 최근에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되는 전통 사찰 활용 프로그램 중의 하나인 템플스테이가 바로 그런 예이다. 그러나 그 역시 아주 일면적인 기능만을 수행하는 예일 뿐이다.

포교를 핵심 기능으로 하는 도심의 몇몇 대형 사찰이나 승가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사찰이 아니라면, 대부분 사찰은 고요하기 그지없다. 스님들의 처소가 고요하기 짝이 없는 셈이다.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법을 가르치느라 몸을 움직이지 않는 법을 가르치는 데 열심이다. 만해는 “그 처소를 고요하게 가지면 염세(厭世)하게 되고, 그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독선(독선(獨善)이 된다.”고 하였다. 처소가 고요하니 불교는 세상 밖의 종교가 될 수밖에 없고, 몸이 움직이지 않으니 세상을 몰라 제 잘난 줄만 알 뿐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런 지엽적인 것들에 있지 않다. 만해의 《유신론》을 말하면서 《유신론》을 제대로 보지 않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만해의 《유신론》은 《유신론》 그 자체에 본래면목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해 나갔던 만해의 삶에 그 본래면목이 있다. 그리고 그 실천의 결과가 대중불교라 일컬어졌다.

동시에 《유신론》은 만해만의 《유신론》이 아니었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유신론》이 비록 만해의 안목과 필력을 빌어서 세상에 등장한 것이기는 하지만, 당 시대를 헤쳐나갔던 불교계의 중심 인물들이 대부분 공감하던 내용들을 담아낸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시대가 요구한 산물이고, 시대를 따라잡기 위한 기획이었으며, 시대를 앞서 가기 위한 설계시안이었던 것이다.

이미 해방 이후에만도 정화운동과 1994년의 종단개혁운동 등 종단 차원의 개혁운동만 해도 두 차례이며, 개인 혹은 개별 집단 차원에서 제기된 개혁론은 그 수를 헤아리기가 쉽지 않을 정도이다. 그렇게 수없이 개혁론이 제기되고 개혁운동이 행해졌지만, 아직도 만해의 《유신론》이 유효하다고 말하는 것은, 실은 정화운동의 지속적인 효과 아래 단절되었던 ‘근대’를 아직도 제대로 복원해 내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단절된 것은 지엽적인 것들이 아니다. 《유신론》이 지향했던 본질에 대한 복원과 계승이 이루어지고 난 뒤에야, 그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다시 말하면 《유신론》이 의도했던 것처럼 시대를 따라잡고 앞서가는 ‘불교’의 건설이 목전에 이르기 전에는 《유신론》을 지향하는 새로운 ‘개혁론’이 끊임없이 제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석길암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인문한국연구센터 교수. 외국어대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한국불교연구원 전임연구원을 역임하였다. 《불교, 동아시아를 만나다》 《지론사상의 형성과 변용》(공저) 등의 저서와 〈원효의 보법화엄사상 연구〉 〈금강삼매경의 성립과 유통에 관한 재고〉 〈지론종 남도파의 아리야식 이해에 대한 일 고찰〉 등 논문 다수.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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