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어울려 서산의 보현사지를 찾은 적이 있다.

주말을 틈타 차를 몰고 교통 체증이란 현대의 마군을 뚫어야 다다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도 덤으로 계곡 입구에 나타나는 마애불을 친견하고, 그 그윽한 미소에 떠밀려 조금 올라가니 옛 절터가 나타났다. 들판, 낮은 풀들이 세월의 돗자리처럼 소박하게 깔려 있는 벌판이 절터였다. 좌우의 균형이 약간 어그러진 당간지주와 형상이 뚜렷한 석탑은 그래도 의연하였다. 바닥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드러난 주춧돌의 흔적은 애써 찾아도 눈에 분명하게 들어오지 않았다. 한쪽에 쌓아 놓은 돌무더기가 그래도 천 년 전 사바세계를 위로하던 퍼즐의 조각이었음을 침묵으로 전하고 있었다.

축대의 한 부분이었을 석재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가만 눈을 감으니 송창식의 노래 가사에 나오는 천 년의 두께라는 게 이것이구나라는 느낌이 아래로부터 느껴졌다. 오래된 말씀일수록 천천히 들어야 하는 법, 혼자 그 은밀한 수십 초의 시간을 즐기고 있는데 곁의 친구가 허공의 벽을 깨뜨렸다.

“여기가 어디지?”

“보현사지, 옛 절터야.”

“그래? 난 절이 있는 줄 알았어.”

18세기 조선에 살았던 소론의 양명학자 이종휘가 기거하던 집의 당호는 함해당(涵海當)이었다. 바닷물로 적시는 집이라고 지은 데는 연유가 있었다. 스물두 살 청춘에 그는 아버지를 따라 동래의 해운대와 몰운대에서 바다를 구경하였다. 그때의 감동을 잊지 못하고, 훗날 남산 아래에 마련한 게딱지만 한 초가집 앞마당까지 그 바다를 끌고 왔다.

마당에 바닷물을 불러들여 집을 적실 수 있는 능력은 상상력이었다. 상상력을 길러 주고 도와주는 것은 작은 방에 가득 쌓인 책들이었다. 책을 읽다 사색에 잠기면, 절로 마음이 탁 트이고 정신이 상쾌해져서 자신이 좁은 방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했다.

그러다가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하면, 마치 바닷물로 가슴을 적시는 듯하다고 하였다. 선비가 처박혀 글을 읽고 세상과 인간을 생각하기에 적당한 크기의 누추한 집이었지만, 상상력을 펼치면 먼 나라 제왕의 환락궁이 부럽지 않게 푸른 바다를 정원처럼 옮겨다 놓을 수 있었다. 게다가 어디서든 떳떳하게 품위를 지키게 하여 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다 보면, 자신은 언제나 지식의 깊은 바다에 흠뻑 젖는다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끔 왜 절터를 찾는지, 이종휘의 말을 빌려 설명할 수 있겠다. 아무것도 없는 폐사지에 가서 왜 두리번거리는가? 바로 절을 짓기 위해서다. 서서 바라보고 불당을 세울 자리를 눈짓으로 표시한다. 슬슬 걸으며 귀 기울여 쇳조각의 겉면을 떠난 법성의 여운이 감도는 곳에 손짓하여 종루를 올린다. 불어오는 바람을 나직나직 맞아 보려고 퍼더버린 그 자리에 몇 칸의 요사채를 마련해도 좋다.

왜 폐사지에 절을 지어야 하는가. 그것도 상상의 절을. 우리 산천에는 좋은 절들이 그렇게 많은데 말이다. 우리가 절을 찾는 이유는 무엇인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겠지만, 절을 찾는 이유는 절을 세운 이유와 어느 정도 일치해야 그 발걸음들을 통한 공양이나 보시가 세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것이다. 그래야만 붓다의 뜻에 우리 일상의 결을 섞어 자기만의 세상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반문할지 모르겠다. 요즘의 절이야말로 찾는 사람들의 뜻에 맞추어 지은 전당이 아니겠느냐고. 돈을 많이 벌고, 좋은 학교에 입학하고, 삶을 윤택하게 하도록, 가능한 모든 경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염원에 부합하는 과시의 집이 아니겠느냐고. 많은 승용차가 드나들고, 신도 아닌 사람들이 보더라도 관심을 쏟을 수 있게, 오르는 길은 단단하고 넓게, 건물은 높고 환하게, 불상은 붓다보다 더 크고 신통하게 만들어야 현대의 정신에 부합한다고.

그래서 가끔 더 큰 절터에도 가 보는 버릇을 익히려 한다. 예를 들면 강원도의 거돈사지 같은 곳.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달려 전지전능의 붓다에게 바로 달려가는 불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어서다. 마음껏 절을 짓고, 함께 겨룰 붓다의 정신을 옮겨다 놓을 수 있는 들판은 도처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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