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서 50년을 넘게 사는 이래 요즘처럼 무기력하게 맥이 빠져 살맛이 안 나는 경우는 일찍이 없었다. 유신 시대, 광주 5·18, 군부독재 시대 등도 다 힘들었지만 그런 때보다 요즘이 훨씬 더 절망적이다. 그때는 싸워야 할 대상이 확실하게 ‘나쁜’ 축에 드는 것이라 이런저런 혼란을 겪을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쁜 일조차도 좋은 일로 둔갑하여 대중의 눈을 어지럽히고 있으니 기가 막힐 뿐이다.

신라 때 이야기이다. 어느 날 설총이 아버지인 원효 스님을 찾아갔단다. 다들 원효의 수행 경지를 높이 사고 있어 자식인 자기에게도 뭔가 한 말씀 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으리라.
아버지를 만난 아들이 다짜고짜 물었다.

설총: (심각하게)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입니까?

원효: (심드렁하게) 착한 일을 하지 말고 살도록 해라.

설총: (어이없어) 뭐라고요? 착한 일을 하지 말고 살라고요? 그럼 일부러 나쁜 일을 찾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요?

원효: (눈을 지그시 감은 뒤) 쯧쯧, 착한 일도 하지 말라 했거늘, 하물며 나쁜 일을 해서야 되겠느냐?

설총은 방망이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으리라.

그렇다. 불가에선 무슨 일에서든 분별심을 내지 말고, 이거니 저거니 가르지 말라 한다. 상대적인 가름은 시시비비를 낳는다. 게다가 옳고 그름의 자리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바뀌기도 한다. 그러기에 남에게 뭔가를 베풀면서도 베푼다는 마음조차 없어야 진정한 보시가 된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만심에 빠지고 말기 때문이다.

작금의 위정자들은 저마다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선전이 대단하다. 내가 좋은 일을 하고 있는데 왜 시비냐고 눈을 흘긴다. 눈을 흘기는 정도가 아니라 반대자들을 온갖 수단을 다 끌어들여 옭아맨다. 아예 드러내놓고 노골적으로 반대자들을 탄압했던 전 시대의 독재자들보다 더하면 더 했지 조금도 덜하지 않다.

특히 4대강 ‘살리기’ 사업을 보라. 애초에 흐르는 그대로 가만두었으면 시시비비가 일어날 게 아무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새로 나라의 권력을 차지한 위정자들은 힘을 잡자마자 자신의 생각이 옳고 좋다고 윽박지르며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천박하기 짝이 없는 자신들의 소신(?)을 밀어붙이기 위해 평지풍파를 일으킨 것이다. 강은 몇 천 년, 아니 몇 만 년을 그 자리에서 그렇게 살아 흐르는 동안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새삼 강을 살리겠다니…….

4대강 사업을 추진하는 위정자들은 그 사업이 착한 일이라 강변하고, 대다수 국민은 그 사업이 나쁜 일이라고 지적한다. 그런데도 힘 있는 자들은 꿈쩍도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강의 몸을 상하게 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착한 일을 반대하는 국민이 어리석어 보인다. 나중에, 사업을 다 마쳤을 때는 반대자들도 다 잘했다고 박수 치리라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원효가 아들 설총에게 착한 일을 하지 말며 살라 한 깊은 속내는 여기서도 짚인다. 착한 일 나쁜 일의 경계도 불분명하고(4대강처럼 오랜 세월 동안 형성된 자연은 그 자체로 옳고 그름의 시빗거리가 되지도 않지만), 착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탐심이 얼마나 어이없는 것인지도 알 수 있다.

착한 일일지라도 하지 말아야 하거늘, 나쁜 일을 밀어붙이는 심보는 과연 무엇일까? 자연은 이미 ‘스스로 그러한’ 것이기에 애당초 시시비비의 분별심을 갖다 붙일 필요도 없다. 그런데 그 자연을 두고 억지 분별심에 사로잡혀 뭇 생명의 터전인 강의 몸통을 훼손하는 일을 두고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무얼 해야 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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