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환호 원장
요즘 한국사회는 기독교의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대구 팔공산 주변에 조성될 계획이었던 팔공산 역사문화공원 조성 사업이 기독교인들의 반대로 백지화되었다. 또 KTX 울산역 명칭은 ‘통도사’가 병기될 예정이었다가 빠지는 등 정부의 기독교 편향 정책에 불교계의 심기가 좋지 않다. 정부의 종교편향적 성향 때문일까?

 모 경찰청장은 전국 경찰을 기독교화하기 위한 대회를 개최하더니, 최근에는 일부 과격 기독교인들이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봉은사를 점령의 대상으로 여겨 봉은사 땅 밟기를 하는 등 기독교의 힘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때일수록 불교를 신앙하는 불자들은 불법이 앞으로의 세상을 선도해야 하는데, 어떠한 점에서 불법이 위대한가를 깊이 생각하고 불법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는 동시에 불법을 펼쳐 나갈 방도를 모색해야 한다.

불법은 어떤 점에서 위대한가? 첫째는 어떠한 법보다 성품의 원리를 참되게 밝혔다는 점이다. 둘째는 불법을 통하여 생사대사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이며, 셋째는 인과의 이치를 밝게 드러내고 수행의 바른길을 갖추고 있다는 점 등이다.

성품에 대하여 원래 선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이도 있고, 원래 악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고, 선악이 원래 없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불법에서는 사람의 성품은 정한즉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동한즉 능히 선하고 능히 악하다고 명확히 밝혀 놓았다. 우리가 수행하는 목적은 원래 분별 주착 없는 각자의 성품을 오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는 데 있다.

성품은 무선무악, 능선능악하므로 성품에서 발현되는 마음을 단련할 수 있다. 마음을 단련하는 것은 소 길들이기와 흡사하여 잠깐이라도 마음의 고삐를 놓고 보면 일심이 흩어지니 초심자는 집심 공부에 주력하고, 어느 정도 공부가 무르익으면 경계를 대할 때마다 공부할 때가 돌아온 것을 염두에 두고 항상 끌리고 안 끌리는 대중만 잡아가는 관심 공부와 병행하여, 성품을 기르되 모름지기 자연스럽게 기르도록 한다.

본래 분별과 주착이 없는 우리의 성품에서 선악 간에 마음 발하는 것이 마치 저 밭에서 여러 가지 농작물과 잡초가 자라는 것과 같다. 밭에 잡초가 나면 매고 또 매어 잡초는 없애고 농작물만 골라 가꾸어 가는 것과 같이 마음 밭을 가꾸어야 한다.

일념미생전(一念未生前) 그 자리를 알아 항상 보존하여 모든 번뇌를 끊고 마음의 자유를 얻으면, 마음이 철주의 중심처럼 되고 석벽의 외면처럼 되어 일상생활 속에서 항상 삼매를 얻게 된다. 이렇게 성품의 원리를 확실하게 밝혀 바르게 수행 정진할 수 있도록 하는 점이 불법의 위대한 점이다.

생사의 도에 대해 불법만큼 명확하게 밝혀놓은 곳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현세에 사는 것만 큰일로 알지만 불법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죽는 일도 큰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잘 죽어야 다음 생에 잘 나서 잘 살 수 있으며, 잘 나서 잘 사는 사람이라야 잘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불법에서는 생은 사의 근본이 되고 사는 생의 근본이 되는 이치를 밝혀 놓았다. 색신의 생사라 하는 것은 사대오온의 이합집산에 불과한 것임을 알아서 항상 오고 감도 없고, 생멸도 없고, 부처와 중생이 따로 없는 그 성품 자리를 깨쳐 지키고 활용해야 한다.

사람의 나이가 40~50이 넘어가면 죽어가는 보따리를 챙기기 시작하여야 죽어갈 때에 바쁜 걸음을 치지 아니할 것이며, 나이가 들어갈수록 다음과 같이 마음을 길들여야 참되게 살 수 있다.

첫째는 물질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현대생활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미워하고, 탐욕에 사로잡히는 생활을 하기 쉬우므로 착심을 떼는 마음공부에 재미를 붙여야 한다.

둘째는 생과 사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가는 것임을 알아서 담담한 마음을 길들여야 한다. 법정 스님 임종 시에 시자에게 “원래 생사가 없다”는 말씀을 하시고 죽음을 당하여 태연하게 가시는 모습을 TV에서 보았다. 편안하고 기쁜 마음으로 떠날 수 있는 것은 생사일여의 이치를 확실히 알기 때문이다. 셋째는 평소에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멈추고 함축하여 마음을 자재할 수 있는 정력(定力)을 쌓고 원력을 철저하게 세워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중생들은 생사의 바다를 무사히 건널 수 있을 것이다.

불법을 제대로 알면 부부의 인연으로 50여 년을 같이 살다 한 사람이 열반을 당했을 때 “이생에서 당신을 만나 행복했습니다. 내생에는 법 동지로서 반가이 만나 부처님의 제자 되어 세세생생 마음공부 잘하여 새 세상의 주인이 됩시다. 편히 쉬었다가 이 회상에 다시 오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생기는 것이다.

인과의 이치와 바른 수행길을 불법처럼 깊이 있게 밝혀놓은 곳이 있을까? 부처님께서 삼천 년 전 인도에 나오시어 깨치신 진리가 불생불멸의 도와 인과보응 되는 도이다. 인과보응되는 이치에 따라 만물에 생·노·병·사의 변화가 있고, 우주의 음양 상승하는 도를 따라 인간에 있어서도 강과 약이 서로 관계하고, 선과 악을 짓는 바에 따라 진급하기도 하고 강급하기도 하며, 상생으로 맺어지거나 상극의 관계로 나타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은 일체의 업이 바로 육도 윤회의 바탕이 되어 진급이나 강급이 될 수 있으며 이러한 변화는 소소영영하게 나타난다.

각 종교마다 수행법이 있고, 종교가 아니라 하더라도 일반인이 접할 수 있는 명상법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부처님 이후 삼십삼 조사를 비롯한 수많은 눈 밝은 스님들을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 자유의 세계로 인도한 불교의 수행법만큼 확실한 수행법은 없다. 불교의 수행법은 일체유심조, 즉심즉불의 최상승선의 수행법이다.

불법의 위대한 점에 대해 성찰해보았다. 나무아미타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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