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해스님- 일행의식으로서의 청규

1. 서론

본 논문에서 청규라고 하면 별도로 언급하지 않는 한 선종의 청규, 즉 ??백장청규??를 말한다. 그리고 ??백장청규??는 계율과는 다른 제도이고, 중국 선종교단에서 제정된 독창적인 제도이며, 선종 총림의 일상 행사 의식집이라는 것을 전제로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 즉 계율을 강조하면 할수록 청규의 특성은 감소하고, 계율적인 요소를 배제하면 할수록 청규의 특성은 더욱 들어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일상 행사 의식(일행의식)의 예법을 강조하면 할수록 더욱 청규답다고 할 수 있으며, 일상 행사 의식의 예법이 배제되면 될수록 청규의 성격은 소멸된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청규는 선종 총림을 이끌어가기 위한 총림 수행자들의 독특한 제도라고 할 수 있으며, 한국 선종교단에서는, 설령 청규의 유풍이나 흔적이 조금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청규가 무엇인지조차도 모를 정도로 오랫동안 잊혀져있었던 제도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청규의 행례를 실행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며, 또한 청규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스님도 거의 없으리라고 생각이 되는데, 하물며 일반 불자들이 이 글의 내용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 간다.

이러한 청규는 소위 ??백장청규??라고 일컬어지는 ??선문규식??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고, 이후 북송 대에 저술된 종색선사((宗?, 생몰연대 미상, 입멸 년대는 1103년~1111년으로 추정)의 ??선원청규??와, 원나라 때에 저술된 덕휘선사(德輝, 생몰연대 미상)의 ??칙수백장청규?? 등이 중요시 되는 청규서(淸規書)이다.

이 모든 선종의 청규서는 그 내용에 있어서 가감이 있다고 할지라도, 주지설법에 관한 행례와 대중수행(방부, 좌선, 식사 등)에 관한 행례와 직책과 노동에 관한 행례가 그 핵심이 되고, 그 외 이·취임식에 관한 행례, 차 모임에 관한 행례, 결제·해제에 관한 행례, 순료·영접에 관한 행례, 염송에 관한 행례, 소향법·예배법에 관한 행례, 방(?)·장(狀)의 고지 방법에 관한 행례, 법기의 기능과 용법에 관한 행례 등이 청규행례의 기본이 된다.

후대에 이르러서는 토지신(혹은 용신)의 가호로 국가의 융성과, 불법의 번창과, 대중의 안위와, 그리고 모든 시주자에게 복과 지혜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염송축원의 행례가 도입되었다. 남송이후의 청규서에서부터는 상례·제례뿐만 아니라, 황제의 생일에 황제의 수명장수와 왕도융창을 기원하는 축원 행례와, 그리고 황실의 안위에 관한 기도 행례가 행하여졌고, 혹은 불생일·성도절·열반절이나, 달마조사의 기일(忌日)이나, 백장선사의 기일이나, 역대조사의 기일이나, 전법사의 기일에 관한 행례도 행하여졌다.

또한 새해·동지·단오 등의 세시 풍습에 관한 행례도 청규에 포함이 되었으며, 원(元) 대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기청(祈晴) 기우(祈雨) 기설(祈雪) 견황(遣蝗) 일식(日蝕) 월식(月蝕) 등이 청규행례에 도입이 되어 있다. 이는 산신·칠성 등에 올리는 예불·불공 등이 불교의 행례인지 혹은 불교적인지에 관하여 논란이 되고 있는 것처럼, 과연 그러한 행례를 청규행례에 포함시켜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도 또한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다만 오늘날의 입장에서 본다면 버려야 할 행례는 배제하고, 시대에 합당한 행례는 다른 종교 혹은 다른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과감히 도입하는 결단이 요구된다.

이러한 중국 청규의 행례가 나말여초(羅末麗初)에서부터 현재까지의 한국 선종교단에 어떻게 수용되고 발전되었는가에 관한 연구는 아직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있으므로, 그 상호간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비교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청규 제정의 문제가 현 대한불교조계종의 종단적 과제로 되어있고, 이를 위한 위원회도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먼저 청규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청규와 계율과의 관계를 검토해 보고, 그 다음으로는, 청규 제정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제기될 수 있겠지만, 특히 주지설법가운데 상당에 관한 행례를 중국의 선종 청규서에 기준하여 검토하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는 ‘청규는 일행의식집’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다.

2. 청규의 특성

청규에 관한 일반적인 오해 가운데 하나는 계율과 청규를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인도에서 제정되었던 대·소승 계율이 중국에 이르러서는 중국의 풍토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그 계율을 대체하기 위한 방법으로 청규를 제정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더더욱 근래에 이르러서는 “중국 선종의 계율”이라고 하거나, “청규는 선종교단의 제2율장”이라고 하기에 이르렀다. 시대 상황에 따른 이러한 계율의 문제들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청규와 계율을 연속과 단절의 입장에서 논의한다면 많은 모순이 발생하리라고 생각한다.

백장선사(720~814) 당시의 선종 수행자들은 여전히 계율의 학습과 실천을 중시하였으며, 다만 서로 상충되는 부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청규 시행으로 인하여 계율이 무시되거나 폐기된 것은 아니었다. 청규와 계율은 제정된 역사적 배경이 다르고, 의도하는바 목적이 다를 뿐만 아니라, 그 특성과 역할에 있어서 서로 독립적인 제도이기 때문에, 계율은 계율로써 논하면 되는 것이고 청규는 청규로써 논하면 되는 것이지 억지로 견강부회하여 일치시키려고 할 필요가 없다. 물론 서로 융섭(融攝) 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여전히 중요한 과제가 될 수 있다. 청규와 계율의 상이점에 대하여 서로 비교해 본다면 아래의 표를 참고할 수 있다.

계율과 청규의 상이점
계 율 청 규 제정자 부처님 주지·암주·수좌 신앙의 대상 부처님 불조(佛祖) 적용 모든 불교교단 선종 총림 저술 일관성 가변성 조문 고정 가변 시간적 불변 가변 공간적 불변 가변 실행면제 불가 가 조항폐기 불가 가 처벌규정 분명 불분명(율장에 준함) 실천방향 일방적 강제적 상호적 합의적 실행절차 법규 규정적 의식 의례적

계율이란 교단의 유지 보전을 위한 비구들의 개인 행위에 관한 규율이 최우적인 문제였지만, 청규는 주지가 어떻게 법을 설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예법의 문제가 최우선의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백장선사 스스로도 항상 마음에 걸려하였던 것은 대·소승계율의 실현에 관한 문제라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어떻게 법을 설하고 어떻게 주지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1) 비록 별원에 거주하였지만, 설법하고 주지하는 것이 규칙과 법도(規度)에 합당하지 않았던 까닭에 항상 그것을 마음에 품고 걸려하였다.

비록 별원에 거주하였지만 율종의 사원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던 선종의 수행자들이 새로운 제도를 창제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당위성은 “설법하고 주지하는 것이 규칙과 법도에 합당하지 않았던” 것이었고, 이것이 청규 제정의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설법하고 주지하는 문제 때문에,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제정된 것이 바로 청규인 것이다. 그 제도의 근거에 있어서도 대·소승의 계율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중국 왕실의 예법과 형식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5일마다 행하는 상당(上堂)이나 초하루 보름에 행하는 상당은, 그 행하는 날짜는 모두다 중국의 속례(俗禮)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당나라 서울에 있었던 9품(九品)이상의 문무관직에 종사하는 사람은 단망(旦望, 1·15일)에 왕을 알현하였고, 이에 준해서 5품(五品)이상의 무관은 매월 5일마다(6회) 왕을 알현하였는데, 이러한 제도가 청규에 도입된 것이다. 즉 세간에서의 조참(朝參)이라는 용어는 입조하여 알현한다는 뜻으로, 조정에 들어가서 왕을 알현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특히 법당에서 행하는 승좌설법이나, 양반(兩班, 東班·西班)과 양서(兩序, 東序·西序)로 그 직제를 제정한 것 등은 황제가 조정에서 행하는 의식을 차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황제가 용상에 앉았을 때 대신(大臣)들이 황제를 향하여 정면으로 보지 않고 측면으로 보는 것과 같이 주지가 법좌에 앉았을 때 대중들이 주지를 향하여 정면으로 보지 않고 측면으로 본다거나, 신하들이 앉지 않고 나란히 안행(雁行)으로 서는 것과 같이 대중들이 앉지 않고 나란히 안행으로 서서 설법을 듣는다거나, 조정에서 무반이 서쪽에 위치하는 것과 같이 수좌를 비롯한 두수와 대중들이 법당의 서쪽에 위치하고 그 직명도 서반·서서(西班·西序)라고 한다거나, 문반이 동쪽에 위치하는 것과 같이 지사 등이 법당의 동쪽에 위치하고 그 직명을 동반·동서(東班·東序)라고 한다거나, 문반·무반을 양반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지사·두수를 양반이라고 한다거나, 그리고 초하루 보름 혹은 5일마다 입조하는 것과 같이, 초하루 보름 혹은 5일마다 상당을 행하는 것 등은 황제가 행하는 조정행례를 그대로 본 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는 율장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제도이지만, 청규에서는 가장 중요한 행례를 구성하고 있는 내용들이다. 그러므로 청규는 계율의 영향에 의해 제정된 것이 아니라, 그 근원에서 본다면 속례의 영향에 의해 제정된 제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청규와 계율은 그 제정 동기가 서로 상이하고, 그 제도의 성격에 있어서도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청규를 부처님이 제정한 계율을 계승하였다고 한다거나, 계율을 답습하였다고는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백장선사가 제정한 청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2)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계율과 제도에도 따르지 않았으며, 뜻을 내어 선거(禪居, 선문)를 별도로 창립 하였다. … 그 제도와 비니(계율)를 (백장)스님께서 크게 서로 바꾸니, 천하의 선종에서는 풀이 바람에 눕듯 하였다. … 이로움이 온전하지 않는데 격식을 변혁하지 않는다면 장차 이 격식을 변혁해서 이익이 많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사미색율(彌沙塞律, 오분율)에도 있지 않고, 비록 부처님이 제정한 제도(佛制)도 아니었지만 제방의 청정한 사람들은 행하지 않음이 없었다.

즉, 부처님이 제정하신 계율이나 제도에도 따르지 않았고, 율장에도 없는 것이었으며, 크게 서로 바꾸어 새로운 제도를 만들었던 것이 바로 백장선사의 청규인 것이다. 부처님이 제정하신 계율을 계승·답습한 제도가 아니라, 새롭게 융창하는 선종 총림의 새로운 제도였으며, 독창적인 운영 체제였던 것이다. 또한 “계율과는 같지 않았으며, 백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 내용에서와 같이, 백장선사에 의해 제정된 청규는 계율과는 서로 같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백장선사(720~814)와 동시대의 인물인 남전선사(南泉, 748~834)의 일화와, 여수법(濾水法)에 있는 내용을 비교하여 청규와 계율에 대한 차이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3) 어느 날 남천선사의 회상에서 동 서 양쪽 승당의 대중들이 고양이를 가지고 다투었다. 남전선사가 이를 보고 곧 (고양이를)들어 올리고 말하였다. “말하면 참수하지 않겠다.” 대중들이 대답을 못하였다. 남전선사가 고양이를 참수하여 두 토막을 내었다. 남전선사가 앞에 있었던 대화를 들어 조주(778~897)에게 물었다. 조주가 곧 짚신을 벗어 머리위에 이고 나가버렸다. 남전이 말하였다. “네가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구할 수 있었겠구나!”

고양이를 두고 대중들과 남전선사 사이에 있었던 일화로써, 통쾌한 공안이라고 말해지고 있는 ‘남전참묘(南泉斬猫)’에 관한 화두이다. 이러한 선사들의 법 거량에서 나타나는 행위를 선종의 역동성이라고 평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계율이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청정도량의 여러 대중 앞에서 여지없이 고양이의 목을 자르고, 또한 후회가 있으면서도 참회에 대한 언어는 숨기고 있는 듯하다. ??선원청규??의 여수법(濾水法)에는 계율의 입장을 나타내고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4) 설사 교학은 삼장을 통달하고 좌선은 4선(四禪)을 증득하며, 생각은 무생을 진압(鎭壓)하고, 마음은 공리(空理)를 증득하였더라도, 목숨을 보호하지 않고 가르침에 의지하여 받들어 지니지 않는다면, 마침내 부처님의 꾸짖음을 면할 수 없다. 10악의 첫 번째 죄(살생계)를 누가 대신 받으랴.

5) 송 : 삼공(三空)에 깊이 들어가 반야를 논하고, 공원(功圓) 입정(入定)하여 선(禪)을 증득하여도, 여수하지 않고 비원(悲願)을 두지 않는다면, 여래 일례의 꾸짖음을 면할 수 없다.

삼장을 통달하고, 4선과 무생과 공리를 증득하였다고 하더라도 살생계를 지키지 않으면 부처님에게 꾸짖음을 들을 것이라는 것을 말하였고, 또한 살생죄에 대한 과보를 받게 되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살생의 죄를 받지 않기 위하여 보잘 것 없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벌레도 비원을 가지고 걸러서 마시는 계율의 입장에서 본다면, 고양이를 참수하는 행위는 잔혹하다고 할 수 있는 살생계의 위반이다. 이러한 사례에서 보더라도 백장시대의 선종에서는 세세한 계율에 얽매이지 않는 풍토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지며, 청규와 계율을 동일선상에서 보면 안 된다는 예증이 된다. 그렇다면 청규의 성격을 어떻게 정의하여야 하는가?

6) 백장스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종(宗)으로 삼는 바는 대·소승의 계율에 국한되지도 않고, 또한 대·소승의 계율과 다른 것도 아니다. 반드시 박약절중(博約折中)하여 제도와 규범을 시설하고, 그 일을 마땅하게 하리라.” 이에 뜻을 세워서 선종의 거처를 따로 건립하게 되었다.

대·소승계율에 국한되지도 않고 또한 대·소승계율과 다르지도 않는, 이 새로운 제도가 곧 ??선문규식??이다. 이 제도의 가장 큰 성격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박약절중(博約折中)’하여 제도와 규범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다. 청규의 성격을 말할 때 위의 예문을 대·소승의 계율을 널리 섭렵하고, 그 대·소승의 계율을 요약하고 절충해서 새로운 청규 조항을 제정한 것으로 말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핵심과 합치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백장선사의 관심은 대·소승의 계율을 모자라는 것을 보충하고 번잡한 것을 삭제하는(補闕刪繁) 데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계율의 어떠한 조항을 가지고 청규의 어떤 조항을 제정하였는지 증명할 수 있는 방법도 없는 것이다. 즉 청규와 계율의 조항을 서로 대비해서 그 인과관계의 당위성을 증명할 수 있는 내용이나 근거는 아직 발견할 수 없는 실정이다.

박약하였다고 하는 것은 “모든 학문과 문물제도를 예(禮)로써 요약한 것”이었으며, 절중하였다고 하는 것은 “예를 지키되 규구에 맞고 올바르게 제도를 완성하였다.”고 하는 뜻이다. 그러므로 청규는 예로써 제도를 완비한 것이었으며, 의식을 통해서 예의 발현을 이룩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박약절중’이라고 하는 이 한 구절이 청규의 성격을 분명하게 표현해 준다고 할 수 있으며, 청규제정 동기에 대한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청규 제정의 동기가 ‘설법·주지’에 관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그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의 완성은 ‘박약절중’된 선문의 규식이었던 것이다. ??선문규식??은 곧 선종 총림의 “예경(禮經)”이었고, 일상생활에 관한 “의식집”이었던 것이다.

3. 상당에 관한 행례

총림의 주지가 활동하는 공간으로는 법당이 위주가 된다. 또한 총림의 주지는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청규의 모든 행례는 주지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총림의 주지는 절대적 위치에 있으며, 총림의 주인공으로써의 권위를 가진다. 선종 총림의 주지는 조석으로(후대에는 5일마다, 혹은 초하루 보름마다) 상당하여 승좌설법을 행하여야 하며, 청익과 입실이 있다면 이에도 응해야 한다. 또한 4절 때의 인사에도 응하여야 하고, 중료를 순시하여 대중들의 안위도 점검하여야 하며, 존숙이 원문에 들어왔을 때나, 관원·시주 등이 원문에 들어왔을 때에도 이를 다 영접하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위로는 지사·두수에서부터 아래로는 사미·동항에 이르기까지 관심을 기울이고 정성을 쏟아야만 한다. 이와 같이 총림의 주지가 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사(理事)가 원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주지가 대중에게 설법할 때도 거·염·송·대·별(擧·拈·頌·代·別)로써 제시하거나, 또는 상당·소참·청익·입실 등의 설법 형태가 있으나, 청규서에서는 이에 대한 설법 방법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에 따르는 의식의 절차·순서를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선원청규(禪苑淸規)??의 상당에 관한 행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영문자는 논자가 임의로 부여한 순서이다.)

7) A. 첫 번째 북소리(一通鼓)를 들으면 수좌와 대중은 법당 안으로 올라가 차례로 안행(雁行)으로 줄지어 옆으로 선다. 법좌(法座)에 가까운 곳이 위쪽이다(上)이다. 수좌·서기·장주·지객·욕주는 대중 앞에서 스스로 일반(一班)으로 하여 차례로 선다. 그 나머지 두수(頭首)는 대중에 의하면 된다. 만약 퇴원(退院, 원문에서 물러난)한 장로가 있으면 수좌의 윗자리에 서고 양측의 자리는 서로 거리를 두며, 몸을 약간 옆으로 하여 남쪽으로 얼굴을 두고 선다.

8) B. 두 번째 북소리(二通鼓)를 들으면 4지사(四知事)가 나아가서 참석한다. 차례로 법당문안으로 나아가 절하는 자리(拜蓆)의 남쪽 근방에서 법좌(法座)를 향하여 선다. 감원(監院)은 동쪽에 자리한다. 행자는 첫 번째 북소리(一通鼓)를 들으면 고당앞에 줄지어 선다(排立). 그리고 두 번째 북소리(二通鼓)를 기다렸다가 즉시 지사(知事)를 따라 나아가 참석한다. 법좌와 대중에게 문신을 하고 동변(東邊)을 지나 서쪽에 얼굴을 두고 선다. 북쪽이 상이다.
9) C. 세 번째 북소리(三通鼓)에 시자가 보복(報覆)하면 주지가 (승당에서)나온다. 대중은 보동문신을 한다. 주지는 법좌에 올라가서 선상의 의자(禪椅) 앞에 선다. 먼저 시자가 문신을 하고, 다음은 수좌·대중이 몸을 돌려(轉身) 법좌를 바로 쳐다보면서 문신한 연후에 제 자리로 돌아선다. 다음은 지사가 근전에서 문신하고 수좌 등과 마주보고 선다. 법좌가 상이 된다. 연후에 사미·동항이 몸을 돌려 법좌 앞에서 문신을 마치고 자리에 의하여 선다. 지객은 시주를 인도하여 지사의 상견(上肩)에 서있게 한다.

10) D. 이상의 주사(主事)와 도중(徒衆)은 안행(雁行)으로 줄지어 서서 귀 기울여 듣는다. 주지가 법좌에서 내려온다(下座). 대중은 보동문신을 한다.

11) E. 수좌 이하는 순당을 하고 대중이 정한 자리에 서면 주지가 (법당에서 승당으로)입당한다. 다음으로 지사가 순당을 한다. 산문에 다례가 있으면 자리에 나아가 앉는다. 지사는 문 밖에 자리한다. 다가 파하고 주지가 일어나면 하당종(下堂鍾)을 친다. 점다가 없으면 지사는 순당을 하고, 주지가 문신하고 물러나는 것을 기다렸다가 나간다. 혹은 종을 세 번 내린(三下) 후에 주지가 (침당으로)올라가면 조신(早晨)의 관례에 의한 방참(放參)이다. 방참 후에는 다시 순당하지 않는다.

12) F. 무릇 승당(陞堂)을 만나면 요주와 직당을 제외하고는 모두 나아가 참석하여야 한다. 어기는 사람은 반드시 산문의 중벌이 있다. 의당 깊이 회피하여야 한다. 만약 급하고 절박한 다른 인연들이 있어서 본래 태만한 일이 아니었는데도 참석이 조금 늦었을 때는, 주지가 이미 법좌에 올라갔다면 다시 들어갈 수 없다. 또한 반드시 회피하여 주지로 하여금 보이지 않게 하여야 한다. 대중들이 나아가 참석할 때는 모자나, 두수를 쓰면 안 된다. 묻고 대화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웃어야 할 일이 있어도 법당을 시끄럽게 하여 크게 웃거나 파안대소하지 말아야 한다. 반드시 은중(慇重) 하고 엄숙히 현음(玄音)을 들어야 한다.

법당에 올라가는 의식 절차는, 예문 A·B·C에서와 같이 법고가 울리는 순서에 따라 진행이 된다. 즉 상당은 세 번의 북소리(三通鼓)에 맞춰서 대중들이 법당으로 올라가게 된다. 그 순서는 위의 예문에서 보듯이, 첫 번째 북소리(一通鼓)에 수좌·대중과 두수가 법당에 올라가고, 다음으로 두 번째 북소리(二通鼓)에 지사가 올라가고, 뒤이어 사미가 올라간다. 세 번째 북소리(三通鼓)가 울리면 주지가 법당으로 올라가는데, 방장이나 침당에서부터 바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승당에서 좌당의식에 참여하고 있었으므로)시자의 보복(報覆, 소리 내어 보고하는 것)에 따라 승당에서 출발하여 법당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법당에 올라가서 선상의 의자 앞에 서면 문신이 진행된다. 시자의 문신, 수좌·대중의 문신, 지사의 문신, 사미·동항의 문신이 순서대로 진행이 된다. 그러나 위 예문에서 보면 주지가 서서 문신을 받고 있으며, 어느 시점에서 법좌에 앉게 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주지가 설법을 마치고 법좌에서 내려오면 대중들은 보동문신을 하는데, 이후의 순서는 함축된 부분과 생략된 부분이 너무 많아서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위의 예문 E에서만 본다면 법당 내에서의 행례인지 승당에서 행하는 의식인지 알 수가 없으나, ??교정청규??의 상당 행례를 참조한다면 위의 예문 E는 승당에서 이루어지는 행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정청규??에 기술되어 있는, 법당에서 내려오는 순서를 요약해서 기술하면, “먼저 수좌·대중·두수 등은 법당에서 내려와 승당으로 들어가 차례로 순당을 하고 정한 자리에 선다. 다음으로 주지가 승당으로 들어가 성승(聖僧) 앞에 소향을 하고 다시 순당을 하고 정해진 자리에 선다. 마지막으로 지사가 승당에 들어가 순당을 한다.”라고 되어 있다. 상당을 위해서 법당으로 올라갈 때는 최후에 주지가 올라갔는데, 상당을 마쳤을 때는 지사가 마지막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되어있다.

의식을 집행함에 있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규제 사항은 예문 F에서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예문 F의 내용은 계율에 관한 것일 수도 있고, 규약에 관한 것일 수도 있으며, 예법에 관한 것일 수도 있고, 법률에 관한 것일 수도 있으며, 경책·조언·규칙·윤리·도덕에 관한 내용일 수도 있다. 흔히 예문 F에서 기술하고 있는 내용을 청규의 핵심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있으나, 물론 청규의 내용에 포함될 수는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청규 의식을 원만히 실행하기 위한 예의범절이며, 보조적인 역할을 기술한 내용들이다.

위의 예문은 설법에 관한 상당(上堂)의 행례이지만, 주지가 설법을 어떤 식으로 어떻게 행하였는지는 조금도 기술되어 있지 않다. 다만 예문 D와 같이 “일을 주관하는 사람과 대중들은 안행(雁行)으로 줄지어 서서 귀 기울여 듣는다. 주지가 법좌에서 내려오면, 대중들은 보동문신을 한다.”라고만 기술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설법 방식이나 설법 형태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서도, 청규는 행례의 절차·순서를 기록한 일행의식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주지가 승좌하여 설법하는 시간이 오랫동안 지속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으며, 또한 주지가 승좌하여 법을 설할 때에 대중들은 주지와 대면하여 서지 않고, 나란히 옆으로 서서 설법을 듣는 것으로 되어 있다. 조참·만참·소참·청익·입실 등 모든 주지설법에서 대중은 주지를 향하여 정면으로 앉아서 법을 듣는 것이 아니라, 기러기가 날아가듯 옆으로 나란히 줄지어 서서 설법을 듣는다.

주지의 승좌설법은 총림의 가장 중요한 행례가운데 하나이고, 장로가 법당에 올라가서 승좌설법을 할 때에는 직무를 맡은 지사·두수 등의 주사(主事)는 물론 모든 대중에서부터 사미·동항에 이르기까지 “요주와 직당을 제외한” 대중 전원이 참석하여야 하고, 또한 빈주 간의 문답으로 종지를 격양할 때에는 질문을 하거나 답을 하거나 모두 다 법도에 따라 이루어지도록 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선종의 총림 대중들을 위한 설법 제도의 창시인 것이며, 또한 빈주의 문답은 선문답의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3) 모든 총림 대중들은 아침저녁으로 모여서 참문(參問)하였으며, 장노가 상당하여 법좌에 올라 법을 설하면 주사와 대중들은 나란히 서서 귀 기울여 듣는다. 빈주가 문답을 하고 종요(宗要)를 격양하는 것은 법에 의거하여 살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지의 상당설법과 선문답에 의하여 종지를 격양하는 것은 종래의 불교역사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수행자 모임의 참 모습이었으며, 마치 석존 당시와 같은 교단의 모습이 재흥되었다고 할만하다. 이러한 주지의 상당설법과 선문답은 중국선종에서 선어록이라는 독자의 장르를 이루게 되었다. 좌선의 실천을 중심으로 하는 두타행자들의 집단으로 출발한 초기 선종은 이러한 상당설법제도의 완성과 선문답 상량의 독특한 대화관계의 형성으로 선어록이라고 하는 독자적인 선종인들만의 대화집이 출현하게 되었다.

백장의 ??선문규식??시대의 선원에는 불전을 두지 않고 법당만을 두었으며, 주지가 법당에 올라가서 승좌설법을 하는 제도는 선종역사상에서 뿐만 아니라 전 불교역사상에 있어서 실로 획기적인 제도의 변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주지의 상당설법과 시중(示衆) 제도의 신설에 의해서 스승과 제자, 제자와 제자, 출가자와 재가자간의 진지한 대화가 이루어져 무수한 어록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이다.

4. 결론

본 논문에서는 청규의 특성을 정립하기 위한 노력으로 청규와 계율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논증하였다. 또한 많은 총림의 행례가운데 주지의 상당 설법 행례를 중심으로, ‘청규는 곧 의식집’이라고 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즉 계율은 변경할 수 없는 고정 불변의 내용과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고, 설사 실천할 수 없는 조항이라고 해도 변경하거나 폐기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계율이 없었다고 한다면 비구교단이 유지·전승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청규는 고정 불변의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도입해야 할 사상이나 이론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며,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제도도 아니다. 청규를 시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선종 교단이 없어지지도 않으며, 교단의 권위가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선종에서는 청규가 제정된 이래 수 천 년에 걸쳐 선종의 가장 중요한 제도가 되어왔다.

만약 총림의 대중 생활이 혼란하거나, 주지의 교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를 개선하기 위한 제도로 청규가 도입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선종의 청규는 전통적으로 그 근원을 백장의 청규 사상에 기준을 두고 있으므로, 이에 의거하여 제정하는 것이 선종의 특성을 현양하는 것이 되고, 또한 선문의 법도를 회복하고 수행자의 위의를 세우는 올바른 제도가 될 것이다.

주지의 설법은 수행자들을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중요한 행례이며, 청규 의식가운데서도 그 핵심이 된다. 또한 상당 설법을 위한 의식의 순서와 절차도 법기(法器)의 신호에 따라 질서정연하고 엄중하게 진행되고 있다. 법회의 진행은 매일 혹은 5일마다 혹은 초하루 보름에 정기적으로 행하여졌던 것이다. 설법하는 시간과 내용에 있어서도, 장시간 경전을 해석하고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물심(物心)의 근원을 직지 하는 간결한 용어로 설법을 하고, 곧바로 법좌에서 내려오는 전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시간 여러 가지 이론을 제시 한다면, 논리에도 어긋나게 되고 법에도 허물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 선종교단에서도 상당의 전통이 있는가? 상당 설법이나 청익·입실 등의 교화 방법이 스승과 제자간의 대화 위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현 선종교단에서 행하여지는 큰 스님들의 설법 제도는 일방적인 설명·해설에 의해 이루어지거나, 자기중심에서 교시·선포하는 형태로 진행되는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청규를 계승하고 있는 설법 제도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청규서의 행례에서와 같은, 발전된 의식 절차도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또한 이러한 제도는 사적인 담화나 개인적인 지도 방편과는 다른, 만천하에 드러나 있는 공개적이고 공적인 제도라는 것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 어떤 경계나 차별도 두지 않는 공적인 대화 방식이고 열려있는 법 거량의 장소라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청규에서의 주지는 오늘날 한국 선종교단의 방장·조실의 직책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데, 유의해서 검토해 볼 문제는 현재 한국선종교단의 방장·조실에는 연령 제한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청규에서는 주지(방장·조실)가 “연노(年老)·질병·사고”의 때에는 주지 직에서 퇴임할 것을 분명하게 언급을 하고 있다. 나이가 많으면 기력도 쇠퇴해지고 능력도 소진되어서 대중들을 통솔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종신토록 그 직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할 수 있으며, 오히려 문도간의 이해관계에 이용될 우려도 있을 것이다.

청규보다 훌륭한 제도는 찾아보기 어렵고, 청규보다 더 극진한 염원이 깃든 제도도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청규가 아무리 훌륭한 제도라고 하더라도 영원히 유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변천해 왔고, 지역에 따라 변화해 온 것도 사실이다. 중국의 여러 청규서가 깊은 사상과 훌륭한 조직 체계를 가지고 있다할지라도, 오늘날과 같은 과학 기술사회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한국 선종교단에서도 청규가 도입된다고 한다면,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상에 부응할 수 있는 훌륭한 제도가 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향해
법명은 적멸. 현재 양양 현불사 주지이자 본지 편집국장. 동국대학교 대학원 선학과에서 박사학위 취득. 논문으로 〈조계종의 연원에 대한 고찰〉 〈자각종색의 《선원청규》 연구〉 〈한국에서의 최초 청규 도입에 관한 고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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