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길암 《불교, 동아시아를 만나다》(불광출판사, 2010)

1.

석길암
《불교, 동아시아를 만나다》
(불광출판사, 2010)

최근 몇 년 전부터 한국사회를 풍미하는 키워드는 ‘문화’라는 단어이다. 그렇다면 광범위한 의미를 담고 있는 ‘문화’란 단어에 대중이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문화가 ‘집단 속의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물질과 이념의 복합체이며, 그것은 환경이란 대상을 극복하고 이룩된 물적 정신적 토대를 총칭하는 개념’이기 때문일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접근하면 문화는 ‘특정 사회의 구성원이 생활문제에 대처해 공유하고 있는, 학습되고 승인된 사물과 지식, 언어와 가치관, 생활규범 등을 총칭하는 말’이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필자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아시아, 그중에서도 동아시아의 문화적 공통분모는 무엇이며, 그것이 공통분모로 가능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를 밝힘으로써 개방된 사회에 알맞은 세계인식과 행동의 틀을 유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석길암의 저서인 《불교, 동아시아를 만나다》는, 역시 ‘문화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의문에서 출발한 책이라 느껴진다. 그는 불교가 특정 지역에 국한된 종교문화가 아니란 점을 말하고자 한다. 불교는 동아시아 전체의 문화적 공통분모이며, 그것은 기원을 전후로 태동되어 현재까지 살아 숨 쉬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문화란 점에 주목하고 있다.

어찌 보면 불교를 통해 동아시아 문화의 공통분모를 발견하고자 한 시도는 오래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21세기 정보화 시대의 도래는 동북아가 그 문화적 중심이 되리라는 미래학자들의 전망과 함께, 그 문화적 중심에 불교가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을 누구나 쉽게 공감하게 된다. 그러한 저자의 생각은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중을 밝히고자 한다.

동아시아라는 개념은 지역적인 개념이기는 하지만 실은 뒤의 ‘문화적 개념으로서의 동아시아’라는 성격이 훨씬 더 강하다. 문화적으로 동아시아를 묶어서 보는 경우, 어떤 요소는 동아시아 전체에 통용되었고 동시에 강렬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 한자라는 문자가 그렇고, 불교사상과 불교문화가 그렇다.(1)

중국에서 시작된 한자와 중국에 새롭게 전해진 불교가 약간의 시차를 두고 동아시아 사회 전역으로 전파되기 시작했을 때 ‘동아시아’라는 사회, ‘동아시아’라는 문화, ‘동아시아’라는 사상이 형성되면서 하나로 묶여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따라서 한자와 불교는 ‘동아시아’를 하나로 묶어내는 접착제 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2)

불교를 축으로 한 동아시아 문화 네트워크 건설에 참여한 것은 중국인만이 아니었다. 인도인, 이란인, 실크로드 도상의 유목민, 중국인, 몽골인, 티베트인, 그리고 한국인들이 이 동아시아 불교문화 네트워크 건설의 주역으로 참여했다. 흔히 우리가 중국불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중국인들만의 것이 아니었다.(3)

이상에서 세 가지 정도를 압축적으로 밝히고 있는데, 첫째 동아시아의 문화적 공통 키워드는 불교이다(1). 둘째 불교와 한자는 동아시아의 사회, 문화, 사상의 접착제였다(2). 셋째 동아시아의 문화는 특정 인종에 의해 창출된 것이 아니라 세계적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3). 이상의 세 가지 기반 위에서 석길암은 ‘불교, 동아시아를 만나다’라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인식의 지평을 다양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전래, 융합, 변용, 창조의 과정을 통해 동아시아 지역 전체의 다양한 문화적 스펙트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2.

동아시아 불교문화가 지니고 있는 공통분모는 무엇일까?

저자인 석길암이 의도하고 있듯이 ‘세계적 보편성’이란 단어가 그중의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저자가 밝혔듯이 동아시아의 불교문화는 다양한 인종과 그들이 구축해 놓은 문화적 바탕 위에서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교, 동아시아를 만나다》에서 저자는 “동아시아 불교문화의 중핵이 중국의 불교문화라고 한다면, 중국 불교문화의 토대는 실크로드의 유목문화, 남아시아의 해양문화, 인도 페르시아 문화가 복합적으로 혼합되어 있다”고 표현한다. 특히 한족의 출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4세기 중반 이전에는 대다수 이민족 출신 출가자들이 중국의 불교문화를 주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부인할 수 없는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중국의 불교문화를 그 핵심에 놓고 있는 동아시아 불교문화의 오늘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굴곡과 왜곡, 탄압과 폄하, 배척과 외면, 포용과 재탄생 등 다양한 스펙트럼이 그 안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북경대학교 철학과 교수였던 탕이졔(湯一介)는 중국 불교문화의 특징을 ‘이질적인 문화의 도래―토착문화와의 대립과 갈등―토착화와 융합―새로운 형태로의 재탄생’이란 과정을 거쳤다고 말한다.

장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문화가 창출된다는 것은 새로운 토양과 자양분이 필요했다. 그것은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라는 문화였으며, 그것이 중국에 전래되어 중국의 불교문화라는 독자적인 문화로 재탄생되었다고 진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동일한 사안을 달리 표현하고 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종합적인 것이 아닌, 말하자면 개별적인 것이다. 따라서 책의 구성에서 ‘역경, 사경, 대장경, 위경’ 등의 키워드로 표현된다.

인쇄문화는 불교라는 종교의 사경(寫經)에 대한 외경심과 중국 전통의 선권(善券) 의식이 융합되어 촉발된 것이다. 동아시아 문화의 고원함은 인쇄문화의 발달에서 시작되며, 이제 그 인쇄문화는 새로운 전화기에 직면해 있다. 단순한 사경에서 목록의 작성, 목판본 대장경의 제작, 석경의 제작, 금석활자의 발명 등의 과정을 거쳐 컴퓨터 시대로 진입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 전개되는 인쇄문화는 바로 불교와 그 궤적을 같이하고 있다는 저자의 진단은 틀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불교문화의 융합과 변용이란 차원에서 저자는 ‘불교, 동아시아를 만나다’의 제2장과 제3장에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그 키워드는 신앙, 신화, 설화, 정치, 풍속 등 다양하다. 승려들이 노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선농일치의 문화를 만드는 것은 파격이 아닐 수 없다. 신성한 수행공간이 새로운 문화의 전진 기지이자 새 문화 창조의 터전이 된 것은 실용성의 극치를 보여 준다. 더구나 평범한 일상에 지나지 않았던 음다(飮茶)를 지순지미(至純至美)한 수행의 세계로 승화시킨 것은 너무 빛나 눈이 시리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이런 단계에 오면 인도불교의 원형은 중국에 완전히 동화되어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하더라도 과장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동아시아의 불교문화는 세간과 출세간을 구분하지 않는다. 너와 나를 분별하지 않으며, 인간 그 자체, 생명 그 자체로 바라보고자 한다. 그래서 배타적이기보다는 포용적이다. 불교가 동아시아에 전래되어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대립과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새로운 창조의 자양분이 되었다. 혹자는 불교가 중국을 정복한 시대가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내 중국이 불교를 집어삼켰다고 말한다. 갈등과 대립, 토착화와 융합은 재창조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소통을 통해 가능한 일이며, 고집하지 않기에 마주칠 수 있는 문화였다. 결국 동아시아 불교문화는 중국의 불교문화를 그 핵심에 두고 있지만, 다양한 지역적 특성을 가미하게 된다. 유입(流入)과 역류(逆流)를 그 자체로 인정하는 가운데 다양성을 확보하게 된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유교의 옷을 입은 불교인 성리학’이 될 수도 있으며, ‘공자의 얼굴을 하였지만 불교의 심장을 지닌 양명학’이 될 수도 있다. 어느덧 불교문화가 동아시아 문화 전반에 가깝게 다가서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로 정체되어선 안 된다는 점에서 오늘의 고민이 남게 된다. 다양한 격의가 현재진행형으로 전개되어야 한다는 필자의 진단이 가능한 이유이기도 하다. 근대 서양문화의 충격과 마주했던 동아시아가 불교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수용하고 발전시키고자 한다는 점에서 이 시대의 새로운 화두가 아닐 수 없다.

이제 불교와 현대 서양문화가 융합하기 어려울 것이란 진단은 기우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 본다. 시간과의 줄다리기는 있겠지만 결국 수용과 융합, 지양과 재창조를 통해 동아시아 문화의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아시아 불교문화의 역사적 경험과 사상적 포용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3.

《불교, 동아시아를 만나다》라는 책은 친절한 필자의 마음이 전해진다. 동아시아 문화의 핵심 키워드인 불교가 어떻게, 어떠한 모습으로 문화를 창출했는가를 대중들과 교감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간결한 문체, 친절한 설명은 마치 여행지에서 가이드의 안내를 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알리고 인식시킨다는 것은 이 책이 지닌 강점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아쉬움이 없는 것도 아니다. 다양성에 중점을 두다 보니 특수성이 결여되었다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 저자는 ‘동아시아의 문화, 역사, 사상’의 공통분모인 불교의 모습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전개되었던 다양한 문화 현상, 특히 중국과 한국의 불교문화들, 그들이 불교의 영향을 통해 어떻게 변용되었는가는 쉽게 알려주지만 그것이 지닌 가치를 보다 심미적, 실용적으로 인식시키기에는 어딘지 2% 정도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동아시아란 지역적 개념의 한계가 명확하지 않다.

주미 일본 대사를 지낸 라이샤워는 동북아의 경제적 발전을 유교적 가치로 설명한 바가 있다. 한국, 중국, 일본, 대만, 홍콩, 베트남을 포괄하는 동북아 지역은 유교문화의 영향이 큰 것도 사실이다. 특히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형성된 가족애는 동북아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라 분석한 것은 타산지석이 될 수 있다. 역설적으로 동아시아 불교문화의 특징은 오늘날 어떠한 형태로 투영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혹자는 소유와 분배의 문제에 천착하거나 직관경영이나 심성(心性)산업과 같은 실용성으로 불교와 현대사회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한다. 역사적 유물로서 동아시아 불교문화가 엄존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동아시아 문화의 중핵으로서 현재의 문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어떻게 그 문화를 이끌어 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 앞에서 ‘명확하게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 여전히 머뭇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중국의 문화가 영향을 미친 권역은 남쪽으로 베트남을 경계로 한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국, 일본, 대만, 홍콩, 베트남 그리고 어디를 동아시아란 지역적 개념에 포괄해야만 할까?  중국과 한국이 동아시아란 단어 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책 전체를 통해 다양성은 발견할 수 있으되 그것은 중국과 한국에 집중되어 있으며, 어디에서도 동아시아 불교문화의 특수성을 찾을 수 없다. 중국이나 한국의 불교문화가 지니고 있는 역사성, 그리고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세계적 보편성을 중심으로 소통과 재창조를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였다면, 그 세계적 보편성을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내일을 진단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움은 필자의 과욕인지 모르겠다.

 ‘복고가 단순한 단절이 아니라 또 다른 방식의 나아감’이 분명하다면 두 개의 서로 다른 가치가 융합해 승화될 수 있는 새로운 문화적 모멘텀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의 위치에서 새로운 문화 창조의 동력인이 될 수 있는 불교적 키워드는 무엇이며, 그것이 동아시아 불교문화에서 어떠한 형태로 자리 잡고 있는가 하는 것을 밝혔으면 하는 것이다.

불교의 어떠한 힘이 중국을 정복하게 만들었을까? 왜 중국의 정치인들은 불교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또한 성리학의 등장과 불교의 쇠퇴는 어떠한 함수를 지니고 있으며, 근대 이후 불교가 다시 주목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 시점에서 “제의불교가 중국불교의 종말을 고했다”는 아서라이트의 진단은 어떤 감회를 줄까? 명확하지는 않지만 여하튼 동아시아는 불교문화를 공통의 키워드로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전개될 때 공통의 문화적 네트워크를 확대할 수 있을까?

이 외에도 많은 사항들이 여전히 궁금증으로 남지만 그것은 저자인 석길암의 몫은 아닐 것이다. 다만 《불교, 동아시아를 만나다》라는 책을 통해, 아니 이 책을 토대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해야 할 앞으로의 과제인 것은 분명하다. ■   

 

차차석 / 동방대학원대학교 불교문예학과 교수.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 〈도의국사의 사상적 연원고찰〉 〈법화경의 본서사상연구〉 등이 있다. 저서로는 《중국의 불교문화》 《법화사상론》 《불교상식백과(공저)》 《선어삼백칙(역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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