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석전 박한영의 생애와 불교사상

1. 들어가면서

내가 석전영호(石顚映湖)를 처음 만난 것은 동국역경원 최철환 선생 방에서였다. 그때 최 선생은 등사본으로 된 《계학약전(戒學約詮)》을 내밀었다. 결국 1년 넘게 공을 들여 2000년 《계학약전주해(戒學約詮註解)》를 출판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석전 박한영의 《계학약전》과 역사적 성격〉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나는 그때 스님의 해박한 지식과 방대한 저술, 교육과 포교에 대한 열정, 그리고 시대를 영도해 가는 선구자적 실천력에 감탄하면서, 스님의 평전을 써 보고 싶다는 야무진(?) 포부를 품기도 하였다.

스님에 관해서는 문도들에 의해 1987년 《영호대종사어록(映湖大宗師語錄)》이 도선사에서 출간되었건만 이후 그다지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나는 스님의 문중이 빈한하여 그런가, 아직 시절인연이 도래하지 않은 것인가 하면서 마음만 동동거렸다. 그런데 근래 김상일 교수의 〈석전 박한영의 저술성향과 근대불교학적 의의〉 등 본격적인 논문이 몇 편 발표되고, 작년 가을 선운사 백파사상연구소에서 본격적인 학술세미나를 열고, 또한 스님의 《행장과 자료집》을 내놓았다.

또한 강주 혜남(慧南) 스님께서 《정주사산비명(精註四山碑銘)》을 대중에 공개하니 나는 다시 용기를 내어 예전 자신과의 약속을 생각하게 되었다. 일찍이 서정주 선생은 《어록》의 발사(跋辭)에서 “만해 용운 스님은 일찍이 석전 스님에게 바치는 한시(漢詩)들 가운데서 이 분을 구름 한 점 끼지 않은 보름달의 밝고 맑음에 비유하고 계시거니와, 그 도력의 청정하고 호연하셨음을 이렇게 흠모하여 표현해 놓으신 걸로 알며, 나도 또한 밝은 보름달을 보고 있다간 우리 석전 스님을 다시금 그리워하는 버릇이 생기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나도 역시 그러한 심정에 공감하게 된 것은 석전 스님의 인품뿐만이 아니라 혼탁한 이 시대에 지(知)·혜(慧)·덕(德)·용(用)을 두루 갖추신 꼭 필요한 스승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2. 석전영호의 생애와 저술

1) 생애

한국불교의 근현대사와 교단사를 이야기할 때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인물이 석전영호(石顚映湖, 1870~1948) 스님이다. 석전 스님은 백용성(白龍城, 1864~1940), 한용운(韓龍雲,1879~1944) 등과 함께, 구한말의 격동과 일제 식민지 속에서 민족의 지도자로서, 불교의 선구자로서 한국불교의 자각과 유신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실천해 나간 분이다.

석전 스님은 율(律)·화엄종주(華嚴宗主)인 백파긍선(白坡亘璇)의 법손으로 교(敎)와 선(禪)을 겸수한 고승으로 강백이면서 선사이고, 율사로 당대에 명성을 떨쳤던 대석학이었다. 뿐만 아니라 교육과 포교 통해서 불교와 세상을 개혁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실천궁행(實踐躬行)에 골몰하셨던 교육자이며 포교사였다. 이러한 석전 스님의 행장을 보면 크게 2기로 나눌 수 있다.

즉 1기는 출생하여 출가하고 출가 이후 39세 전까지로 자신을 연마하고 내전 연구에 침착하던 시기로서, 이때 백파의 후손으로 설유처명(雪乳處明,1858~1903)에게 전강을 받았다.

 2기는 1908년 39세 이후 한양으로 올라와 임제종운동에 참여한 이래 직접 불교계의 현실에 뛰어들어 왕성한 활동을 하고 해방 후인 1948년 내장사에 내려가 입적하기까지의 시기이다. 석전 스님은 밀양 박씨이며, 자는 한영(漢永)이다. 호는 영호(映湖) 또는 석전이고, 법명이 정호(鼎鎬)이다. 스님의 행장에 대해서는 성낙훈(成樂薰) 찬, 〈영호당대종사비〉(선운사 소재), 《석전시초(石顚詩鈔)》의 〈자술구장(自述九章)〉, 정인보 찬, 〈석전상인소전(石顚上人小傳)〉, 최남선의 《석전시초》 〈서(序)〉, 김영수 찬, 《석전문초》 〈영호화상행적〉, 신석정, 《석전문초》 〈서〉,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 下, p.954, 스님의 승적부 등이 참조가 된다.

스님이 태어난 곳은 전북 완주군 초포면 조사리이며, 1870년(고종 7년) 9월 14일 부 성용(聖容)과 모 진양(晉陽) 강씨(姜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가 이전인 1878년 3월부터 1885년 3월까지는 통사와 사서삼경을 수학하면서 한문과 학문적인 기초를 닦았다. 19세에 위봉사의 암자였던 태조암( 太祖庵)의 금산(錦山)화상 문하로 출가하였다. 출가 사찰에 대해서 승적부에서는 유신계사(楡神溪寺)에서 득도식을 거행하였다고 하기도 한다. 스님은 1889년 2월부터 1896년 3월까지는 내전을 수학하였다.

백양사 운문암의 환응(幻應) 문하에서 《능엄경》 《기신론》 《금강경》 《반야심경》 《원각경》을 수학하였으며, 당대 최고의 강백인 순천 선암사 경운(擎雲)으로부터 대교(大敎) 과정인 《화엄경》과 《선문염송》 《전등록》을 배웠다. 당시 경운 스님 문하에는, 석전을 비롯하여 제봉영찬(霽峰永讚)·진응혜찬(震應慧燦)·월영처관(月泳處寬) 등이 연마하였다. 이후 1893년에는 건봉사와 명주사에서 여러 경전들을 연찬하였다. 26세(1895년)에는 순창 구암사의 설유 스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구암사(龜巖寺)는 백파 스님 이후 설두유형→설유처명으로 법이 이어져 많은 학승들을 배출한 사찰이다. 설유는 ‘‘화엄십지이구지보살(華嚴十地離垢地菩薩)”이라 숭앙을 받는 설파의 9세 법손이며 백파의 6세 법손이다.

 27세(1896년)에는 순창 구암사에서 설유 스님에게 법을 이어받고, 염송·율장·화엄을 수학하고, 법통을 이어받아 개강하였다. 이때 당호를 영호(映湖)라 하였다. 또한 석전(石顚)이라는 시호도 갖게 되었는데, 이것은 일찍이 추사 김정희가 백파 스님에게 “훗날 법호 가운데 도리를 깨친 자가 있으면 이로써 호를 삼으라.”는 부탁에서 설유에게 전해졌다가 스님에게 전수된 것이다. 스님은 설유의 법을 이어받은 뒤에 잠시 구암사에서 강사 생활을 하였는데 만암종헌이 수학하였다. 구암사에서 강의를 하던 스님은 1899년부터는 산청 대원사에서 강석을 펴니 서응동호(瑞應東濠)를 비롯하여 많은 학인이 운집하였다. 이후 장성 백양사, 해남 대흥사, 합천 해인사, 보은 법주사, 구례 화엄사, 안변 석왕사, 동래 범어사 등에서 대법회를 열어 그때마다 청중들의 가슴속에 돈독한 불심을 심어 갔다. 당대 최고의 강백들로부터 교학을 연찬한 스님은 선(禪) 수행을 위해서 1892년 4월 15일 안변 석왕사를 시작으로 1906년까지 15하(夏)를 성만하였다. 스님은 안거 기간에는 수선을 하고 산철에는 전국의 유명한 강사 스님을 찾아다니며 수학하였다. 석왕사 안거에 이어서 신계사의 선원, 건봉사에서도 선 수행을 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일본에 의한 통감정치가 시작되고 나라의 앞날이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그냥 눌러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1908년 39세 되던 해, 석전은 경성에 올라와 불교유신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1912년 이후 1948년 임종기까지 제2기는 조선불교의 개혁을 위해 본격적으로 투신한 시기로, 그의 생애 중 가장 다사다난했던 시기이다. 1908년 서울에 올라온 석전은 만해, 금파 등과 불교유신운동을 펴는 한편, 1910년 41세에는 원종 종무원 종정 이회광이 일본 조동종과 연합 협약을 체결하여 일본 조동종에 한국불교를 합종시키려 할 때 진진응(陳震應)·한용운·김종래(金種來)·오성월(吳惺月) 등과 같이 임제종 정통론을 내걸고 저지하였다. 이로써 북쪽에는 원종(圓宗), 남쪽에는 임제종(臨濟宗)이 할거하게 되었으나, 1911년 6월 사찰령이 반포되자 두 종은 모두 간판을 내리게 되었다.

석전 스님은 43세(1912)에는 명진학교(明進學校)의 후신인 중앙불교전문학원의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44세에는 《조선불교월보(朝鮮佛敎月報)》를 제호를 바꾸어 자신이 직접 발간한 《해동불보(海東佛報)》를 통하여 종횡무진으로 불교계의 자각과 유신운동을 역설하며 불교인의 자각을 촉구하였다.

1919년은 3·1운동과 만세시위로 민족의 단결력과 독립을 원하는 욕구는 어느 때보다 강하였다. 1919년 9월 스님은 이종욱 등과 함께 한성임시정부 발족의 경성 대표로 활약하였으며, 1921년 11월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에 홍포룡과 함께 불교계 대표로 서명하였다. 이는 스님이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사실을 보여 준다. 45세에는 불교고등강숙(佛敎高等講塾)이 건립되자 숙사(塾師)가 되고 47세에는 불교중앙학림의 강의를 맡으면서 교장을 역임하는 등, 1922년까지 후학 지도에 열정을 보이기도 하였다.

55세(1924)년에는 《불일(佛日)》 창간 시 백용성과 함께 편집인을 역임하였으며, 56세에는 《조선불교총서(朝鮮佛敎叢書)》 간행의 일을 추진하였다. 57세에는 서울 안암동 개운사(開運寺)에 설립된 불교전문강원(佛敎專門講院)에서 후학을 지도하였으며, 60세(1929)년에는 동 개운사 대원암(大圓庵)에 불교연구원이 설립되자 강주를 맡아 20여 년간에 걸쳐 불교계의 지도적 영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1928년, 1929년 2차에 걸쳐 조선불교학인대회가 열렸는데 스님과 대원암 강원 학인들이 많은 역할을 하였다.

 60세(1929년)에는 조선불교승려대회가 열렸는데 7인의 교정(敎正)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대되어 조선불교 최고지도자로서 폭넓은 도량으로 종단을 이끌었으며, 1932년 63세(1932) 때에는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전문학교 교장으로 선임되어 고등교육 일선에서 불교를 전하고 도제양성에 온몸을 다 바쳐 불교중흥과 조국광복의 인재 양성에 힘썼다. 64세에는 중국을 다녀오고, 1945년 76세에 해방을 맞아 조선불교중앙총무원 초대 종정(宗正)으로 추대되어 한국불교의 새로운 종단을 이끌어오다가 말년에는 전북 정읍 내장사에 내려와 수양하던 중 1948년 4월 8일 79세 법랍 61세로 입적하였다.

2) 저술

석전 스님은 ‘수불석권 독서강기(手不釋券 讀書强記)’라 할 정도로, 평생에 걸쳐 동서양의 수많은 글을 읽고 연마하였으며, 박학(博學)과 구난(救難)의 불교실학을 추구한 학승이며 저술가였다. 이러한 석전의 독서와 저술은 자신의 불교적 지성을 닦는 일이면서, 동시에 당대 우리 사회가 직면해 있던 불교적, 민족적 현실의 어려움을 구하는 데 그 목표를 둔 것이었다.

석전의 저술은 《석전문초(石顚文鈔)》 《석전시초(石顚詩鈔)》 등의 문집 외에 《정선치문집설(精選緇門集說)》 《계학약전(戒學約詮)》 《정선염송급설화(精選拈頌及說話)》 《염송신편(拈頌新編)》(전 5권, 프린트본), 《대승백법(大乘百法)·팔식규구(八識規矩)》 《인명입정리론회석(因明入正理論會釋)》 《정선사산비명(精選四山碑銘)》 《불교사람요(佛敎史攬要)》 등 9책의 단행본과, 각종 신문과 잡지에 발표한 100여 건이 넘는 논설과 수필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석전문초(石顚文鈔)》는 〈석림수필(石林隨筆)〉과 〈석림초(石林草)〉의 2편으로 되어 있는데, 21장으로 되어 있는 〈석림수필〉은 주로 그의 선사상과 지율엄정정신(持律嚴正精神), 그리고 시선교 일여(詩禪敎 一如)의 중심 사상이 담겨 있다.

 60여 편으로 되어 있는 〈석림초〉에는 근대를 전후한 시기에 살았던 한국 고승들의 비명, 음기(陰記), 탑명 또는 사원의 중건기, 그리고 고승들의 행략(行略)과 영(影)과 찬(贊), 또는 법당의 상량문 등의 문헌이 실려 있다. 이에 비하여 《석전시초》에는 자서전 격인 〈자술구장〉과 함께, 일생을 통해 생활과 교유와 강산역방에서 느낀 감회 등이 420여 수의 한시(漢詩)로 엮어져 있으니 스님의 선시일여의 정신이 유감없이 드러나 있다.

이러한 스님의 저술은 그 주제와 양식에 따라 네 가지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즉 ① 불교교학서의 재편과 역술, ② 한국불교의 역사 자료 정리 저술, ③ 불교계의 각성과 개혁을 촉구하는 시사 논설문, ④《석림문초》 《석림시초》 등에 보이는 수필과 한시 등이 그것이다. ①의 불교교학서의 재편과 역술로는 《정선치문집설》(1913), 《계학약전》(1926), 《대승백법·팔식규구》(1931), 《인명입정이론회석》(1913), 《정선염송급설화》(1932), 〈법보단경해수일적강의(法寶壇經海水一滴講義)〉(1914), 〈인학절본(仁學節本)〉(1913) 등이다. 석전은 불교 교학 체계를 바로 잡고 근대화함으로써 전근대적인 당시 불교계의 현실을 개혁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대승백법·팔식규거》 《인명입정리론회석》이 들어 있는 것은 왜일까? 이것은 한국불교사에서 특히 선불교가 대세였던 조선시대 불교에 대한 반성으로 보인다. 이른바 불립문자를 내세운 선불교에서 논리학적인 유식 및 인명은 배척될 수 밖에 없었다. 스님은 선불교를 배척하지는 않았으나 선불교 중심의 한국불교 유풍이 끼친 폐해, 곧 지나치게 교학불교를 배척하는 경향과 무애행의 폐해를 누구보다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정선염송급설화(1932)》는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30권을 석전이 정선, 다시 현토한 것으로 대원암 강원에서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석전이 《선문염송》을 근대식 교육과정에 넣어 교육한 것은 불교교육의 외적 형식이 바뀌었다 할지라도 그 뼈대에서 《선문염송》이 빠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석전은 《선문염송설화》를 ‘대각세존석가모니불’ 16칙, ‘서천응화성현’ 7칙, ‘종문조사’ 28칙으로 정선하였다. 이와 같은 정선은 짧은 기간 내에 배워야 할 분량과 선불교에 대한 불교계 내외의 잘못된 견해를 비판하고 새로운 선불교관을 정립하고자 한 것이었다. 다음 ②는 불교계 개혁을 위해서는 한국 불교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그 주체성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한국불교의 역사 자료 발굴 및 정리에 주력하였으니, 그 과제로 불법래도지원위(佛法來渡之源委), 고승전등지기연(高僧傳燈之起緣), 탑사상보지연혁(塔寺像寶之沿革), 장판금석지명적(藏板金石之名蹟), 건조제도지미술(建造製圖之美術), 범음고락지보(梵音古樂之保存) 등의 여섯 가지를 들고 있다. 이에 관한 저술로는, 〈대동선교고(大東禪敎考)〉 〈조선교사유고(朝鮮敎史遺稿)〉 〈이조실록불교초존급색인(李朝實錄佛敎抄存及索引)〉 〈백월보광지탑비명병서(白月葆光之塔碑銘幷序)〉 〈연담과 인악과의 관계〉 《정선사산비명》, 《불교사람요》 등이 있다. ③불교계의 각성과 개혁을 촉구하는 시사 논설문 등은 그의 1912년 이후 《조선불교월보》와 《해동불보》 《불일》 《금강저》 등 많은 불교잡지에 기고한 수많은 글들이다. 이 글들을 통해 석전은 당시 불교계의 폐습과 구태를 고발하고 개혁을 강조하며, 근대적 자각을 촉구했다. 불교의 현대적 의의와 그 사명, 불교 청년의 양성과 그를 위한 교육, 현대적 포교 등을 강조했던 것이다. 또한 불교의 현대적 의의 등을 다룬 글과, 도제양성, 교육, 포교 등을 주제로 논설과 수상을 썼다. 이러한 논설류는 불교에 대한 믿음과 자긍심에 바탕을 두고 전개되고 있다.

석전이 잡지나 신문에 기고한 글들은 시사성이 강하면서도 학술적 깊이를 느끼게 하는 글들이 많다. 그런데 그것들은 당장의 현안들에 대한 합리적인 대안이면서 개혁을 위한 대안인 것이 적지 않다. 뿐만 아니라 인간과 세계에 대한 사유와 통찰을 바탕으로 한 것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저술들은 당시 물밀듯이 들어와 당대 사회를 석권하던 외래 사조에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면모를 보이고 있다. ④《석림문초》 《석림시초》 등에 보이는 수필과 한시 등은 석전의 화엄철학과 선을 수필과 시 형식으로 풀어낸 것으로 누에가 실을 풀어내듯이 손이 가는 대로 풀어낸 것이다.

이 밖에 그가 선수행의 핵심을 긴요하게 소개한 《선학요령(禪學要領)》을 번역한 것이나, 〈선화칠난(禪話七亂)〉 〈야호화석유교의조의(野狐話釋有敎意祖意)〉 등의 글은 선가의 불립문자설이 부처의 말이 아니라는 것, 깨달은 뒤에도 수행이 이어져야 할 것 등, 선수행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도모하고 바른 선불교 문화를 형성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저술이다.

특히 《육조단경(六祖壇經)》에 대한 강의인 《법보단경해수일적강(法寶壇經海水一適講義)》 또한 이와 같은 맥락의 소산이다. 한편, 교학 관련 역서로는 담사동의 《인학(仁學)》을 번역한 〈인학절본(仁學節本)〉이 주목된다. 《조선불교월보》에 모두 8회에 걸쳐 번역 연재된 《인학》은 청말(淸末) 담사동이 1896년에 지은 것이다. 석전이 《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그것이 불교사상을 이용한 근대적 결과물이라는 점이었을 것이며, 서세동점의 당대적 상황에서 담사동이 동양의 불교사상에서 희망을 본 점에 공감한 것으로 보인다.

3. 석전영호의 불교사상과 실천

1) 불교사상

(1) 겸전사상(兼全思想)

석전의 생애와 그 저술을 앞서서 살펴보았듯이 석전의 불교관 내지 불교사상은 그의 사상적 법맥 계보에 비취서 판단할 수 있다. 즉 서산휴정의 선교일치, 또한 설파를 통해 이어진 화엄교학, 그리고 백파의 지율엄정과 선사상이 설두를 거쳐 설유 그리고 석전에게 이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향 아래 형성된 석전의 승풍은 크게 겸전정신에 바탕한 지율엄정, 화엄교학 그리고 선사상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

우선 그의 기본 불교사상으로 겸전정신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불교의 기본 강령인 계정혜 삼학의 겸수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삼학겸수의 정신은 한국불교의 전통인 통불교(通佛敎) 정신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석전은 조선조의 억불정책 속에서도 산중에서 명맥을 이어온 선사상의 전통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민중과 떨어진 산중불교에만 머물지 않고 세속에서 시대와 대중을 적극적으로 선도할 수 있는 겸학정신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그의 박학다식한 학문 세계는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문인 김포광(金包光)은 〈영호화상행적(映鎬和尙行蹟)〉에서 선암사의 경봉화상·화엄사의 진응화상·석전영호를 합하여 3대 강백으로 들면서, “금봉화상은 한시에는 조예가 깊으나 삼장강설에는 오히려 범연한 편이요, 진응화상은 삼장강설에는 인도의 세친과 중국의 청량·규봉도 양보할 정도로 능통하지만 시문 등 문학에는 마음을 두지도 아니하였다. 오직 사는 삼장강설을 주로 하는 외에 경사자집과 노장학설을 겸하여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서법까지도 능통한 드물게 뛰어난 대종장이다.”라고 학문 세계를 극찬하고 있다.

선·교 겸전에 관한 문제는 선이 유입된 이후 조선 대에 이르도록 강조되어 왔던 것으로 한용운도 “선·교를 떠나 불교를 말할 수 없나니 선·교는 곧 불교요, 불교는 곧 선·교이다. 교로써 지(智)를 득하고 선으로써 정(定)을 득하는 것이다. 선과 교는 새의 두 날개와 같아서 어느 하나도 궐할 수 없는 것이니 불교의 성쇠는 선·교의 흥쇠를 영향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겸학정신은 그의 불교사상과 학문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불교유신운동을 중심으로 한 스님의 삶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즉 신구겸학의 교육관, 다양한 교수 및 포교 방법, 다각도의 불교사업 권장, 선시일여의 예술세계, 그리고 이론과 실천을 강조한 지행합일(知行合一) 등이 그것이다. 그 외에도 석전은 일찍이 최남선, 정인보 등과 함께 조선의 강산을 유력하면서 서로 정의를 쌓고 조선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다. 이러한 인식이 쌓여 《불교사람요》 《정선사산비명》과 고승 비문의 찬술 등이 이루어진 것이다. 최남선은 《석림시초》의 발문에서 석전이 전문가에 손색없는 조예를 쌓기도 하였다고 술회하고 있으니 모두 겸전·겸학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2) 지율엄정

석전은 계율 문제에 있어서 매우 엄정하였다. 《유교경》에서도 “계로써 스승을 삼으라” 라고 하였듯이 스님은 철두철미한 지율엄정(持律嚴正)을 강조하고 또 스스로 니중연화(泥中蓮花)와 같은 삶을 살았다. 당시는 조선불교의 쇠미와 일본불교에 크게 영향되어 계율이 크게 해이되어 지계정신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특히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총독부에 의해 1911년 6월 사찰령이 반포되고 그 시행규칙이 차례로 각본말사에 실시됨에 따라 관권을 배경으로 한 주지들의 전횡과 부패가 자행되었다.

석전은 〈각본사와 탈첩빈번(奪牒頻煩)에 대하여〉에서 주지들의 전횡독단을 비판하는 한편,〈불교전체와 비구일중(比丘一衆)〉이라는 논설에서 “비구의 근본 정신은 계행을 준수하고 청정함에 그 생명이 있다”고 비구대중의 분발을 촉구하였다. 일찍이 임제종 운동을 같이 하고 불교유신에 뜻을 같이해 온 한용운이 1910년 3월, 1910년 9월 2차에 걸쳐 ‘승려취처’를 중추원, 통감부에 거론하고 거듭 1913년 5월 《조선불교유신론》에서도 이를 주장하자, 이때 석전은 “한용운 수좌가 갑자기 미쳤나?”라고 힐난하였다.

문생 성낙훈은 “사는 계행이 엄정하고 함부로 단월의 시주를 받지 않으며, 도무지 성색(性色)은 바라보지도 않았다.”고 하면서 청량국사에 비유하고 있듯이 스님은 철저한 지계 생활로 많은 승려들의 모범이 되었다. 스님은 40여 년간을 서울 도심 속에 살면서도 철저한 지율 생활을 하였다. 문하생 신석정은 탈속 고결한 스승의 풍모를 명경지수(明鏡止水)와 설중매화에 비유하고 있고, 김포광은 지율엄정에 철저하면서도 포용성과 융통성이 풍부한 종장임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청정계행을 강조하였던 스님은 1926년 중앙불전의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계학약전》1권을 저술하였다. 석전은 당시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인한 ‘대처육식(帶妻肉食)’에 대해 경각심으로 4바라이의 순서를 살(殺)·도(盜)·음(淫)·망(妄)에서 음·살·도·망으로 놓고 있으며 《능엄경》의 사종율의(四種律儀)를 근거하였다. 뿐만 아니라 보살도 정신과 크나큰 서원을 세울 것을 강조하면서 “서원을 세우지 않으면 경구죄를 범하는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젊은 승려를 계율로써 무장시키고 교육하여 무엇보다도 쇠퇴한 전통불교와 타락한 권승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새로운 불교의 기틀을 다지고자 한 것이다.

한편 스님은 선수행자들의 그릇된 무애행을 크게 개탄하면서 〈일언와전해람홍수(一言訛傳害濫洪水)〉에서 ‘불설행리(不說行履)’가 ‘불귀행리(不貴行履)’로 탈바꿈하면서 살·도·음·망을 자행하는 무애행을 낳게 되고 선원에 미친 피해가 홍수보다 더 크다고 질타하였다. 계율에 대한 해이와 오해가 불교 쇠퇴의 큰 원인이 되고, 그 결과 민중과 사회를 선도할 수 있는 교화의 기반을 상실한다고 본 것이다. 당시 서양문물의 범람과 일본불교의 회유 속에서 한국불교의 부흥을 위해서는 철저한 지율정신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또한 석전은 계사로서도 활동하여 1940년 대원암 계단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보살계 및 비구계를 베풀었으며, 유교법회에서도 《범망경》과 《유교경》을 강설하였다. 《범망경》과 《유교경》은 한국에서 줄곧 중시해 왔던 경이며, 유교법회를 시설한 목적이 한국의 전통적인 청정교단 수호에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3) 교학사상

석전은 한국불교의 전통을 이어 지율엄정과 선·교 겸수하면서도 특히 그의 생애를 통해 볼 때 선의 실참(實參)보다는 주로 강학(講學)으로써 당시 불교계 지도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므로 당시 ‘3대 강백’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렇게 당대 교단의 대표적 강백이었으니, 그의 교학에 대한 견해에 대해서는 이렇다 하고 논할 여지가 없다. 이처럼 그가 교학과 강학에 힘썼던 이유는 당시 식민지 사회에서 불교를 개화하고 민중을 계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학 정비를 강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불교강사(佛敎講師)와 정문일침(頂門一針)〉에서 불교 강사들의 분발과 각성을 촉구하였다. 석전의 교학사상은 대·소승불교 전반에 걸쳐 섭렵하지 않은 바가 없었으나, 그의 세계관, 실천관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화엄철학이었다. 문생 성낙훈(成樂薰)은 그가 찬한 비명에서 석전을 ‘화엄종주(華嚴宗主)’로 지칭하였으며, 그의 이러한 화엄철학은 일생동안 산수를 유람하며 읊은 4백여 수의 《석림시초》에서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화엄철학은 그의 논설 도처에도 어김없이 나타나고 있는데, 〈장하이포교생호야(將何以布敎生乎也)〉에서 화엄찰해의 중중안립과 비로자나의 신신상즉(身身相卽)하는 화엄철학이야말로 개방적이고 다원화되어 가는 현대사회에 있어 가장 요청되는 종교관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또한 기신론의 여래장연기사상(〈여래장연기람요(如來藏緣起攬要)〉), 성상융통(性相融通)의 주장(〈삼계유심만법유식(三界唯心萬法唯識)〉) 및 〈학불문답(學佛問答)〉에서 보이는 자심미타정토관(自心彌陀淨土觀), 한국불교사에 대한 긍지 등도 그의 교학사상에서 빼놓을 수 없다.

(4) 선사상

석전은 겸학을 강조하며 철저한 지율엄정의 정신을 강조하면서도 선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한국불교의 정통 종맥으로서 임제종운동을 펼쳤으며, 직접 《정선염송급설화》를 저술하여 교재로서 강의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많은 선승들과 교류를 가졌으니 당시의 대표적인 선사 학명(鶴鳴)과는 각별한 사이였다. 일부 “석전은 선을 반대하셨다.”는 말에 대하여 제자 운성(雲惺)은 “스님은 손에서 잠시도 책을 떼지 않으면서도 조석으로 반드시 한두 시간은 입정하였으며, 선에 대한 깊은 신심과 깊은 체험을 가졌기 때문에 교학을 전개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서산 하 백파긍선−설두유형−설유처명의 법을 이은 석전의 선사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는 〈선학요령(禪學要領)〉 〈법보단경해수일적의(法寶壇經海水一滴義)〉 〈선화칠난(禪話七亂)〉 및 역대 고승 비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선학요령〉은 ‘주공부십문(做工夫十門)’에서 각찰(覺察)·휴헐(休歇)…… 등 10단계로 공부의 단계를 나누고 있으니 이것은 보조지눌의 《진심직설(眞心直說)》의 내용과 선사상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스님은 〈법보단경해수일적의〉에서 《법보단경》이야말로 교(敎)와 교외(敎外)를 아우르는 종승의 법문이라고 그 중요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와전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이 밖에 석전은 〈선화칠난(禪話七亂)〉 〈야호화석유교의조의(野狐話釋有敎意祖意)〉 등에서, 선가의 불립문자설이 부처의 말이 아니라는 것, 깨달은 뒤에도 수행이 이어져야 할 것을 강조하는 등 선 수행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도모하고 바른 선불교문화를 형성하고자 많은 글을 썼다. 특히 《육조단경(六祖壇經)》에 대한 강의인 《법보단경해수일적강의》는 《정선염송급설화》와 더불어 주목해야 할 작업이다. 석전은 《법보단경》은 달마대사의 법을 이은 육조혜능의 진어와 실어로 교와 교외를 아우르는 종승의 법문이라 하였다. 그런데 그 판본에 따라 차이가 심해 육조의 뜻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을 수 있다는 문제의식 때문에 바로잡을 생각을 했던 것이다. 석전의 이러한 작업은 한국불교의 중심을 이룬 선불교의 불교사적 위상을 인정하면서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로 여긴 것은 아닐까 한다.

석전은 《석림수필》을 통해 ① ‘법보단경의 노행자(盧行者) 돈황석실(燉煌石室) 사본(寫本)의 문제’ ② ‘개구(皆具)와 개증(皆證)의 문제로서 이것이 원각에 어떤 장애가 있는가’를 반문하였으며, ③ ‘선의 불립문자(不立文字)와 선·교 화합의 문제’ ④ ‘삼처전심과 공안문제’ 그리고 ⑤ ‘진귀조사설과 여래선·조사선 문제’ 등을 삼학겸전(三學兼全)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거론하였다. 한편,〈선지불립문자공불보급(禪之不立文字功不補及)〉에서, “실제로 불립문자라는 말은, 친히 조사께서 말한 바가 아니며, 선가의 한 유파가 하나으로 공안을 부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서, 드디어 무식한 무리들의 호신부가 되고, 졸렬함을 감추는 큰 일산개가 되고 말았다……”라고 비판하며 ‘불립문자’의 공(功)은 과(過)의 허물을 보완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규봉 선사가 강론가는 점교(漸敎)에 치우치고 참선하는 이는 돈문(頓門)에 치우쳐 서로 만나면 마치 남호북월(南胡北越)의 간격이 있는 듯하다 하였으나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 선·교가 쇠퇴하고 미약하여 뢰회할 여지마저도 없다.”고 통탄하였다.

석전의 선종 수행에 대한 비판은 조선불교의 부흥이 크나큰 공안이 된 불교에 대한 남다른 애종심과 노파심에서 표출된 것이었다. 당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으며, 급격히 변화하는 격동의 소용돌이에서 일제 식민지하에서 신음하게 된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므로 ‘불립문자’를 고수하는 선(禪)만으로는 승려 및 일반 대중을 개화시킬 수 없는 현실의 어려움을 판단한 것이라 하겠다.

2) 도제양성과 대중교화

(1) 승려·청년교육

석전은 삼국시대는 배태 시대, 나·여(羅麗)시대는 장성 시대, 조선시대는 노후 시대, 당 시대는 불교의 부활 시대로 보았으며, 불교계의 문제를 외적인 원인보다는 내적인 것으로 판단하였다. 따라서 불교가 노후한 것은 불교계의 교육이 불완전하기 때문으로 보고 불교를 다시 부활시키기 위하여 승려 교육과 대중교화에 일평생 매진하였다. 그는 불교의 삼보 가운데 불교를 일으키는 것은 ‘승(僧)’으로서, 도제를 교육시키는 일이야말로 급선무라 하였다. 이것은 일제하 많은 민족주의 선각자들이 구국(救國)의 길은 오직 민중의 교육에 있다고 자각하고 이를 실천하였던 것과 그 궤를 같이한다.

이렇듯 청년·승려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던 스님은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은 천부적으로 무한한 영각성(靈覺性)을 갖고 있으므로 ‘영각성 개발’이라는 긍정적인 교육관을 가지고 있었다. 더 나아가 동물도 교육하면 깨우칠 수 있으며 금석이라도 관철할 수 있다 하였으니 이것은 근본적으로 유심론적 교육관에 바탕한 것으로 《화엄경》의 ‘심불중생시삼무차별(心佛衆生是三無差別)’의 정신과 상통하는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의 ‘불성(佛性)’ ‘여래장’을 인정하고 그 불성을 개발하고자 노력하고자 하였다.

 ‘영각성 개발’은 기신론을 중심한 원효(617~686)의 ‘일심귀원(一心歸源)’의 정신과도 합치되는 것이며, 지눌(1158~1210)의 돈오점수의 사상과도 그 맥을 잇는 것이다. 석전은 〈청년불교계(靑年佛敎界에) 대하여〉에서 ‘조선불교계에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영재를 기르지 않았기 때문으로 시급히 청년도제를 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따라서 청년도제와 영재교육을 담당할 주체자인 강사 및 지도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지도자에게 일침을 통해 각성을 촉구하였다.

그 내용이 〈불교강사와 정문금침〉이다. 즉 석전은 남을 가르치려는 자는 첫째, 고공(高貢)을 버리고 허심광학하며, 둘째, 뇌산(賴散)을 버리고 용맹정진할 것, 셋째, 위아(爲我)를 버리고 망이생(忘而生)하며, 넷째 간탐(慳貪)을 버리고 희사원통(喜捨圓通)할 것, 다섯째 장졸(藏拙)을 버리고 호문광익(好聞廣益)할 것을 촉구하였다. 또한 석전은 보통교육을 중시하였다. ‘일사일교(一寺一校)’의 설립과 교사양성을 위한 ‘사범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승려 교육의 급선무를 보통학, 사범학, 외국 유학 셋을 들었다. 청년 교육에 대한 스님의 열의는〈불국소년설−불교청년에 바라는 기대〉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해동불보》 창간호에도 〈도제양성(徒弟養成)은 소융삼보(紹隆三寶)〉라는 글에서 청년불교에 대한 희망과 영재교육·도제양성에 대한 당위성에 대하여 역설하고 있다.

한편, 석전은 교과 개량 문제 못지않게 현 시대에 맞고 이해에 편리한 전적의 간행을 서두를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석전은 신구 교육을 넘나들면서 두 교육기관의 장단점을 명확히 파악하고 우리가 갖고 있는 바탕에서 새로운 교육 방법을 적극 도입하고자 하였다. 신교육의 중시 못지않게 승려교육이라는 특수 조건에 따른 전통교육의 가치를 재인식하고자 하였으니 명진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한 것이 그것이며, 대원강원을 설립하고 강주로서 학인을 가르친 일, 고등연구원을 설치한 일, 그 안에서 여러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교육방법 이런 것 등은 우리에게 많은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여러 실험적 교육기관이 많이 등장하였다. 학명계종(鶴鳴啓宗, 1867~1929)은 석전과 그 누구보다도 가까웠던 강(講)을 겸한 대표적인 대선사였다. 그는 1928년 내장사에 내장선원을 건립하고 나이가 찬 승려가 아닌 어린 소년을 모아 교육하였다. 〈내장선원규칙〉에서 보여 주듯이 교학과 함께 농업에 힘쓰고 어려서부터 선풍을 익히고 범패·가무까지 곁들이고 다양하고 이상적이며 자유스러운 승가교육 방식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서울에서 포교당을 세우고, 역경을 하며, 오르간을 치며 직접 찬불가를 짓는 등의 활동을 보인 용성 선사와는 또 다른 선사의 면목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것은 경허성우(1847~1912) 이래 선풍의 진작을 계승하는 것이며, 1921년 선학원의 건립 등에 힘입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당시 경북오본사(慶北五本寺, 대승사·김용사 등)는 불교중등학교를 세우니 ‘오산불교학교(五山佛敎學校)’가 그것이다. 그 설립 취지는 종래 신·구를 절충하여 5본산이 각각 학교를 개설하여 왔으나 연합으로 중등교육기관을 경영하자는 것이었다.

기타 교육 활동으로 일찍이 용성의 대각일요학교, 불교일요학교, 불교청년회 야학부 등이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새로운 시도들이라고 보인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들과 강원 논의에 대한 영향 아래 1935년부터는 ‘개량강원’의 대거 출현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즉 경남 사천 다솔사 강원, 귀주사의 개량불교전문 강원 등으로 개량강원은 실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때 남장사 관음암에서 조실이 대교과를 가르치고 화산수옥이 사교과를 가르치는 최초의 비구니 강원이 출현하였다.    

(2) 대중교화

석전은 불교개혁의 주체인 청년 불교인의 육성을 강조하고, 또한 이를 직접 몸으로 실천하기 위하여 불교중앙학교의 교장을 지내고, 경성 개운사에 대원강원을 설치하여 20여 년간 진력하였으며 1929년 중앙연구원을 설립, 후학을 지도하는 등 그의 생애 대부분을 승려교육·도제양성에 보냈다.

스님은 〈불교의 흥폐소이를  심구(深究)할 금일〉 〈다허(多虛)는 불여소실(不如小實)〉에서 불교야말로 오늘날의 뭇 종교를 함섭(含攝)하고 세계철학가에 미침에 모자람이 없는 대사상이라고 자신하면서, 미래불교는 비상히 발전하여 점차 불과(佛果)로 회향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따라서 현재 내지는 미래 불교인의 사명과 책임이 어느 때보다도 중대함을 강조하면서, 금일이 부활시대이니 전대 불교의 노후잔습(老朽殘習)을 청산하고 미래불교의 진흥책을 강구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불교의 미래에 대해 밝은 전망과 크나큰 기대를 가졌던 스님은 대중교화에도 큰 희망과 함께 관심을 기울였다. 이것은 진속불이(眞俗不二),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사상을 가름하게 하는 것이다.

개항 이래 일본불교가 일정 부분 한국불교를 일깨운 공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종교적 입장이라기보다 다분히 정치적 입장에 따라 진출한 것이었다. 이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일본불교에 의한 포교소, 출장소 등과 기독교 등 타 종교에 대한 위협은 조선불교 지도자들을 반성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종래의 고립적인 자세를 지양하고 포교활동을 강화하여 대중불교로서의 위상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따라서 포교 활성화를 위한 여러 주장이 생겨났다. 미래불교를 진흥시키고 대중화시켜 불교의 이상인 동성성불(同成成佛), 정토세계의 구현을 위해서는 대중을 각성시키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는데,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도 포교사, 포교 교재가 중요 문제였다.

석전은 승려교육에 있어서 그 주체를 짊어지고 있는 강사에게 일침을 가하여 각성을 요구하였듯이 대중교화를 담당할 포교사의 각성을 촉구하였으며, 대중교화의 방편으로 문서포교를 중시하였다. 석전은 〈장하이포교생호야(將何以布敎生乎也)〉에서 “신앙하는 기관과 강구하는 요로와 문호를 한층 넓혀서 미신포교를 지신(智信)포교로, 이론적인 포교를 실천적인 포교로, 과장된 포교를 실질적인 포교로 전환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의 실현을 위해 ‘포교이생(布敎利生)의 사분강요(四分綱要)’를 제안하였다. 여기서 포교사의 양성, 포교사의 자질과 자격, 포교 교재의 편찬 등을 언급하면서 대중교화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석전이 상경하여 서울에서 계속 머물고 있었던 이유도 교육과 포교를 위해 여러 가지 조건을 가지고 있는 가장 적합한 지역으로 서울을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석전은 미래불교가 승려교육과 대중교화, 이 두 문제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일찍이 이러한 인식 아래 권상로가 창간한 불교잡지《조선불교월보》에 참여하였으며, 조선불교월보가 정간되자 제호를 바꿔 1913년 11월 《해동불보》를 발간하였다.

 이것은 대중매체의 문서 포교에 대한 그 가치성과 효용성을 인식한 선각자적 안목에 따른 것이었다. 일제 강점하 언론 억제 속에서 발행된 잡지를 보면 거의 종교지가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당시의 흐름이라 할 수 있다. 불교잡지의 경우 약 25종이 출간되었는데 권상로·이능화·만해 한용운 등이 참여하였다. 그 가운데 석전은 《조선불교월보》 《해동불보》 《불일》 등에 직접 참여하여 대중교화를 선도해 나가며 불교유신운동을 적극 전개해 나갔다.

 그리고 이 잡지를 통해 자신의 많은 글과 주장을 쏟아냈던 것이다. 석전은 당시 다른 종교계에서는 교육기관이 들어서고 서적의 발간이 원활하나 조선불교계만은 그러한 움직임이 희미하며, 옛 상태를 고수하고 있는 형편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스님은 대체로 불교유신을 구하는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니나 서적 간행·문서 포교가 무엇보다도 먼저라고 하였다. 진실로 서적 간행을 통한 문서 포교는 화급히 서둘러야 할 사항이었다.

또한 석전은 불교계의 오래된 전적을 새롭게 다듬어 간행할 것과 새로 나온 전적을 함께 받아들일 것을 말하고, 실제 이러한 뜻을 가지고 이능화 등과 함께 《조선불교총서》 간행을 계획하였다.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당시 이러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은 당시 불교계를 이끌어 나갔던 석전을 포함한 선각자들의 노력을 크게 사야 한다.

한편, 대중교화에 있어서 그 시대의 변천과 민지의 발달로 그 포교의 내용과 방법이 시대에 맞아야 한다고 보았으며 그 개선책으로 〈불교와 세신(歲新)의 상화(想華)〉의 글을 통해 6개 조항을 들고 있다. 즉 ①불교인의 수행인 계·정·혜의 중시, ②자리·이타의 실천 및 ③학교를 일으키고 영재를 키울 것, ④성심으로 도를 펴고 산업을 일으켜 사찰과 자신을 두호할 것, ⑤그리고 자선사업, 사회사업 등을 실시할 것을 말하니, 이 모두가 곧 불교를 일으키고 대중교화의 확대를 가져오는 것이라 하겠다.

 이렇듯 석전은 일찍이 대중교화의 방편으로 대중매체인 문서 포교를 중시하고 이를 통해 포교의 이념과 방법, 포교인의 자세 등을 역설하였을 뿐 아니라 그 외에도 대중교화의 구체적인 방법까지 폭넓게 제시한 것을 볼 수 있다.    
 

4. 맺으면서

이 시대 왜 석전영호인가? 나는 이 시대에 가장 사표가 되는 분을 꼽으라 하면 가장 으뜸으로 삼고 싶다. 석전 스님은 평생 동안 계·정·혜 삼학과 이타행을 실천하고, 정통 불교의 건립, 강원 및 학교의 설립과 인재 양성, 포교의 현대화, 생산 불교로의 전환 등 한국불교에 미친 업적을 필설로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당대의 석학들은 스님의 태산 같은, 바다 같은 학문 때문에 스님을 모시고 싶어 했다.

무불통지(無不通知)의 식견을 가진 스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만해 한용운을 비롯하여 변영만·정인보·오세창·이동영·이능화·최남선 등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 스님과 교류하였다. 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 출가 제자로는 만암·청담·운허·운성·운기·남곡·경보 등이며, 재가 제자로는 서정주를 비롯하여 신석정·조지훈·모윤숙·김동리·포광 김영수 등이 있다.

내가 석전 스님에 대해 관심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도 스님의 깊은 사상의 세계를 흠모하며, 더욱이 스님의 강한 보살 원력과 실천력에 감동하기 때문이다. 스님은 지(知)와 행(行)을 하나의 일원상(一圓相)으로 보고 지에만 편중되는 것을 경계하였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이 한국불교의 문제점을 해결하며 그곳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귀결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지적은 우리 시대에 가장 요구되는 일이다. 스님이야말로 평생을 지행합일을 실천에 옮기신 분이었다. 아직도 석전 스님에 대한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한 점은 앞으로 우리들의 몫이다. 요즘 새로운 각도로 스님의 독립운동을 밝히는 움직임이 있다. 필자도 《정선사산비명》에 대한 작업을 하고 있다. 각기 분야에 따라서 좀 더 심층적인 연구가 많이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

 

효탄 /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장. 1997년 동국대 문학박사 학위 취득. 동국대, 중앙승가대, 운문사 등에서 강의한 바 있다. 저서로 《계전학전 주해(戒學約詮 註解)》 《고려말 懶翁의 선사상 연구》 《고려사 불교관계 사료집》 공저로 《불교민속문헌해제》 《역주 조선불교통사》(8권) 등이 있고, 주요 논문으로 〈선원청규(禪苑淸規)와 칙수백장청규(勅修百丈淸規)의 망승조(亡僧條)에 관한 고찰〉 〈한국불교 강맥 전등의 고찰〉 〈각진복구(覺眞復丘)와 이암(李嵒) 일가에 대한 고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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