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문화를 중심으로

* 이 글은 지난 6월 11일 〈선과 현대사회〉를 주제로 열린 한국선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내용을 필자가 수정 보완했음을 밝혀 둔다. 

 

1. 머리말

지난 1세기 동안 서양사상과 종교, 문화에서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라는 문화적 융합 현상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문화 융합의 변화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 예견되었으나 실제 그 파장은 예상보다 컸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사상과 관념이 서로 다른 동서양의 두 문화가 맞닥뜨리면서 일면 서로 충돌하는 부분도 많았으나 서양에서 동양사상은 빠르게 수용되며 확산되었다.

1904년 모네(Claude Oscar Monet)는 자신의 집에 직접 일본식 정원을 만들고, 그 정원에 동양의 식물들을 심고 가꾸며 동양문화를 자신의 삶에서 구현하며 변화를 가졌다. 그는 정원을 가꾸며 수련 등의 작품을 만들게 되는데 이러한 그의 노력은 일본문화가 확산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렇듯 당시 유럽에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새로운 사상의 수용에 힘입어 서양문화가 동양적으로 변화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서양인들은 그동안 하열한 사상과 문화라고 생각했던 동양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도리어 동양사상이야말로 자신들에게 미래의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수용적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다다운동은 혼란기인 1915년에 시작되었다. 다다는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고 파괴하여 새로운 가치를 찾고자하며 집단적으로 일어난 예술문화운동이었다. 또한 1922년 헤르만 헤세(Herman Hesse)의 《싯다르타》는 당시의 혼란한 유럽문화에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하며 서양인들에게 불교에 대한 관심을 확산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29년에 시작된 대공황 역시 당시 서양인들의 삶과 의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산업혁명 이후 급속도로 발달하던 경제가 무너지면서 맹목적으로 추구하던 자본주의 중심의 가치관과 인식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혼란한 시대 상황 속에서 새로운 삶을 갈구하는 예술가, 철학가, 사상가들은 새로운 대안을 찾아 서로 소통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다양한 형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것들이 제로(ZERO), 플럭서스(FLUXUS)이다. 1957년에 출범한 제로(ZERO)운동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을 목표로 하고 자신들의 의지를 선언문에 담아 선언하였다고 한다면, 1962년에 시작된 플럭서스(FLUXUS)는 다다와 제로의 영향을 받았으며 부정과 파괴를 통하여 새로운 가치를 찾아가고자 하였다.

1970년대 말에 대두되기 시작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앞선 문화예술운동의 변화들이 반영된 현대 사조의 중요한 흐름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그 사상적 기반이 되어 인식의 확장을 열어 준 것이 바로 ‘선사상(禪思想)’이라 할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현대문화의 변천 과정을 문화예술운동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하며 선사상이 서구현대문화에 미친 영향을 통하여 미래 사회에 있어서의 새로운 문화의 흐름을 파악해 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한국 선문화사상이 앞으로 현대사회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색을 하고자 한다.


2. 현대사회와 선사상

1) 현대문화의 변천 과정과 그 특성

제로운동 초청장 1965
현대라는 기준은 모호하지만 일단 본 논문에서는 1900~2000년을 중심으로 진행된 문화의 변천 과정을 현대라 정의하여 그 변화 내용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문화란 당 시대 삶의 대표적 표현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유럽은 급속도로 발달한 과학문명에 힘입어 삶의 많은 부분 역시 큰 변화를 맞이하였다. 그중 사진기의 발명은 기존 예술에 대한 인식을 크게 변화시키는 데 무엇보다 일조하였다. 사진기술의 발달로 인해 사람들은 자연에 대한 이미지들이란 실제와 얼마든지 다르게 보일 수 있으며, 동일한 대상에서도 전혀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과학의 발달은 예술과 문화에 대한 고정관념과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 속에서 사상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은 무엇보다 동양의 선사상이었다. 1, 2차 세계대전과 1960년대에 확산되기 시작한 불교사상의 영향은 서구사회에 새로운 담론을 형성했다.

문화란 당대 정치, 사회, 예술, 종교 등과 혼돈, 수용, 태동, 확산의 과정을 거치면서 시대적인 특성을 드러내게 된다. 전쟁과 식민지 지배, 새로운 부의 축적, 동양문화의 수용 등으로 인하여 새로운 가치를 설정하고 추구했던 1910년을 문화혼돈기라 본다면 이 시기에 일어난 대표적인 문화운동은 다다라 할 수 있다.

자유와 평화를 위한 시위 1961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1916년 후고발(Hugo, Ball)은 ‘볼테르 캬바레’를 개업하였다. 후고발의 카바레의 목적은, 전쟁과 국수주의의 장애를 뛰어넘어 다른 이상들을 추구하려고 살아가는 소수의 독자적인 정신의 소유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데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몇 명의 예술가, 시인, 음악가, 철학자 등이 시작한 작은 움직임은 이후 문학, 미술, 음악, 철학 등에서 많은 파장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선언서〉에서, 다다의 개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차라(Tristan Tzara)는 “본인은 저장된 모든 것, 두뇌 속에 지금까지 쑤셔 넣은 것이나 사회조직상의 모든 보존 장치를 파기한다. 어디서든 모든 보존 장치를 파기한다. 어디서든 도덕의 가면을 벗겨 풍기를 문란하게 할 터이고, 수족(手足)을 천국으로부터 지옥에로 던져 버릴 것이며, 눈(眼)을 지옥으로부터 천국으로 날려 보낼 터이고, 각 개인의 실질적인 잠재력과 상상력을 통하여 세상이라는 곡마단의 탄탄한 바퀴를 다시금 바로 할 것이다.” “질서=무질서; 자아=비(非)자아; 긍정=부정; 절대적인 예술의 궁극적인 산출. 지속도, 호흡작용도, 빛도, 통제도 없는 제2의 작은 구(球)속에서 조화롭게 정돈된 영원한 혼돈의 순수성과 절대성. 나는 오랜 옛날 작품을 그 새로움 때문에 사랑한다. 우리를 과거와 결부시키는 대조만이 존재할 뿐이다.”

다다의 이러한 선언에서는 기존의 동일한 사고의 틀에서 작용하는 개념과는 다른 인간과 예술에 있어서 각 개별성을 중시한다는 특성을 찾을 수 있다. 기존의 정해진 개념이나 형식에 의해서 예술과 철학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각 개인의 관점에서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고 이를 서로 인정한다는 데 다다의 위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다다이스트들의 노력은 당시의 혼란한 시대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여기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점차로 증가하게 되었다. 한편 이러한 반문화적인 움직임이 동 시간대에 뉴욕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뉴욕 다다의 대표적인 특성을 잘 보여 주는 마르셀 뒤샹의 예술적 관점을 살펴보자.

제로운동의 풍선 퍼포먼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에게서 우리는 운명상의 ‘유약성’을 전혀 찾아볼 수도 없다. 그는 장기를 두듯이 삶을 이어갔는데, 장기 둘 때의 계략이 그를 매료시켰지만 결코 그로 하여금 배후에 그 무엇이 있다고 믿어 버리게 할 어떤 의미를 추구하도록 유도하는 법은 없었다. 생에 대한 뒤샹의 자세는, 생이란 우울한 희롱이요 헤아릴 길 없는 넌센스며, 애써 탐구해 볼 만한 가치도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생의 전면적인 부조리, 모든 가치가 뿌리 뽑혀 나간 이 세계의 우연성 따위는 뒤샹 자신의 고도의 지성으로 볼 적에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명제의 논리적인 귀결로 비쳤다.

예술은 “생각될 만큼 생각되었고” 올 때까지 왔으며, 달리 말해서 무(無)로 해체되어 버렸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무(허무, le nihil)뿐이다. ‘착각’을 대신해서, 공허(le vide)가 등장하였는바, 공허에는 도덕적인 속성도, 윤리적인 속성도 담겨 있지 않다. 이렇게 무를 선포함에 있어 추잡스러움도 유감스러움도 없다. 우리는 무를 체념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무를 선포하는 일은 우리의 발견 사항을 공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활동에 있어 뒤샹은 예술에 대한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는 작태를 피하기 위하여, 반예술의 자세가 아니라 무예술(無藝術, L’a-art, the non-art)의 자세를 요구하였다. 무예술의 등가물(等價物)은 예술 영역뿐만 아니라 삶 자체에 있어 정신적인 내용을 배제시키는 무도덕(une a-morale, the amorality)이다. 여기서 뒤샹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논리적이고 그리하여 필연적인 절차를 취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또한 숙명적인 절차이기도 하다. 뒤샹은 가치들의 표지판(標指板)을 갈아치워 버렸고 그런 결과 가치들의 표지판은 도처에서 무(無)에 이르게 되었다.
 
다다는 이렇듯 모순된 현실이 전향적으로 붕괴되는 데 개입하였다고 볼 수 있다. 전쟁의 소용들이 속에서 삶의 방향을 모색하던 당시의 사회에서 다다이스트들의 새로운 인식과 예술적 노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로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즐길 수 있게 된 19세기 초에 일어난 전쟁은 유럽인들의 삶과 가치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과학의 발달이란 편리함과 더불어 자신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자각은 당시 서구인들에게 공포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러한 시대적 공황 상태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하던 기존의 종교마저 그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게 되자 서양인들은 그동안 억눌려 있던 그들 내면적인 감성과 새로움에 대한 인식들을 예술, 철학 등을 통해 동시다발적으로 폭발시키기에 이른다. 이러한 반사회적, 반문화적, 반예술적, 반종교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표현들은 사회혼란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기존의 이분법적 서양 가치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키며 삶의 새로운 가치관과 방향성을 찾아가게 하는 동기를 제공하였다. 

당시 사회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사건으로 세계 대공황을 꼽을 수 있다. 1914~19년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서양에서는 힘의 중심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가는 새로운 힘의 지배구조가 형성된다.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군은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 질서를 재편하게 된 것이다. 한편 사회경제를 지배하는 구조가 전쟁 무기를 중심으로 집약되면서 각국은 무기 생산에 힘을 기울이는 사이 서양인들의 삶과 정신은 피폐해졌다.

갤러리 앞에서 시위하는 군중 1961
이러한  불안한 사회 상황 속에서 1929년 10월 뉴욕 증권시장의 주가 폭락으로 시작된 제1차 세계 대공황으로 서양인들은 그동안 그들이 깊이 신봉했던 자본주의의 논리에 대한 가치와 진정성을 다시금 생각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각국은 다시 자급자족적인 블록경제를 형성하게 되었으며 무역량의 감소로 생산 또한 급격히 감소하였다. 이러한 경제적인 공항은 사회문화를 변화시키는데, 결국 이들이 선택한 그 해결방안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전쟁을 통하여 경제는 회복을 하였으나 서구인들은 정신적인 가치의 혼란에 직면하게 되었다. 인간의 욕망이 가져온 전쟁과 파괴, 경제적 논리의 가치관 등은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고통을 가져다주었으며, 그 결과 그들이 초래한 고통에서 다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이 크게 확산된 것이다.

이렇게 대공황과 대전쟁을 수차례 치르면서 서양사회에서는 중요하고도 새로운 사상적인 개념이 도출된다. 그중 중요한 사상 가운데 하나가 아방가르드다.

아방가르드(前述, advance guard; 戰術, vanguard)라는 논쟁적인 메타포를 문화, 문학과 예술 그리고 정치를 포함하는 다양한 영역에 적용해 온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방가르드 개념에 내포된 명백한 전투적 의미는 매우 적절하게 몇몇 태도들과 경향들을 지시하고 있는데, 아방가르드는 바로 이것들을 더 광범위한 모더니티 의식−예리한 호전적 감각, 비타협주의의 찬미, 용감한 선구적 탐험, 그리고 더 일반적 차원에서는 영원하고 불변하며 선험적으로 결정된 것처럼 보이고자 하는 전통에 대한 시간 및 내재성(immanence)의 궁극적 승리에 대한 확신에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는 수용과 변용, 창조와 모방, 예술과 반예술, 전쟁과 평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그 개념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개념의 활용도 변화하는데, 새로움을 추구하되 그 새로움마저도 언제든지 버릴 수 있다는 그 가변성이야말로 아방가르드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문화 변혁의 과정에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개념은 큰 의미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1960년대를 전후하여 일어난 문화운동이면서 정치·경제·사회·예술의 모든 영역과 관련되는 한 시대의 이념이었다. 이 운동은 미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학생운동·여성운동·흑인민권운동·제3세계운동 등의 사회운동과 전위예술, 그리고 해체(Deconstruction) 혹은 후기구조주의 사상으로 시작되었으며 1970년대 중반, 점검과 반성을 거쳐 오늘날에 이른다.

서구에서 근대 혹은 모던(modern) 시대라고 하면 18세기 계몽주의로부터 시작된 이성중심주의 시대를 일컫는다. 모더니즘은 혁신이었으나 역설적으로 보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재현에 대한 회의로 개성 대신에 신화와 전통 등 보편성을 중시했고 피카소, 프루스트, 포크너, 조이스 등 거장을 낳았으나 난해하고 추상적인 기법으로 대중과 유리되었다. 개인의 음성을 되찾고 대중과 친근하면서 모더니즘의 거장을 거부하는 다양성의 실험이 포스트모더니즘이었다.

그러나 외적인 힘보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던 계몽사상은 합리적 사고를 중시했으나 지나친 객관성의 주장으로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도전받기 시작하였다. 이후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를 거친 후 포스트모던 시대는 J.데리다, M.푸코, J.라캉, J.리오타르에 이르러 시작된다.

니체와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계몽주의 이후 서구의 합리주의를 되돌아보며 하나의 논리가 서기 위해 어떻게 반대 논리를 억압해 왔는지 드러내기 시작했다. 데리다는 기존의 ‘말하기’가 어떻게 통념적 글쓰기를 억압했으며, 이성이 감성을, 백인이 흑인을, 남성이 여성을 억압했는지 이분법을 해체시켜 보여 주었다.

푸코는 지식이 권력에 저항해 왔다는 계몽주의 이후의 발전 논리의 허상을 보여 주면서 지식과 권력은 적이 아니라 동반자라고 말하였다. 지식과 권력이란 둘 다 인간에 내재된 본능으로 권력은 위에서의 억압이 아니라 밑으로부터 생겨나는 생산이어서 이성으로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라캉은 데카르트의 합리적 절대 자아에 반기를 들고 프로이트를 귀환시켜 주체를 해체하였다.  

데카르트의 주체는 상상계와 상징계로 되어 있으므로 그 차이 때문에 이성에는 환상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리오타르 역시 숭엄(the Sublime)이라는 설명할 수 없는 힘으로 합리주의의 도그마를 해체하였다. 이렇게 철학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근대 도그마에 대한 반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양한 문화의 흐름 속에서 탄생한 새로운 작품이었다. 포스트모더니스트의 작품들은 기존의 명화를 만들기 위한 기준을 따르지 않았으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하여 확대 광고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작품은 많은 문화, 예술, 정치, 철학 등에 영향을 끼쳤으며 새로운 방향성을 찾아가는 데 안내자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문화의 변화 과정은 다양한 시대적인 환경과 사상적인 영향 속에서 일어나게 된다. 이렇게 변화된 문화는 다시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며 진행된다.

2) 선사상이 서양문화에 미친 영향

서구사회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은 1922년 헤르만 헤세가 쓴 《싯다르타》로 인하여 더욱 증가하였다. 싯다르타는 당시 전쟁의 아픔을 겪고 있는 유럽 청년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으로 제시되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전쟁을 겪은 서양인들은 당시 기존의 정치와 종교의 역할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전쟁은 서양인들에게 그들 종교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켰으며 그 새로운 사상적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불교였다. 불교는 절대적인 힘의 논리가 아닌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여 삶의 지혜를 스스로 찾아가는 사상적, 수행적 특성을 지닌다. 이러한 불교의 내용들이 책과 예술 작품 등을 통하여 확산되면서 서구인들은 점차 불교의 매력에 매료되었다. 서구인들의 불교의 수용은 그들이 속한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변화를 가져왔다.

예술에서 이미 모네는 일본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수련〉 연작을 제작하였다. 이후 다다운동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문학, 미술, 음악, 철학 등 사상적 변화는 서양문화를 바꾸는 결정정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다다의 글쓰기는 우연성의 법칙을 개발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문학이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형식적 관점을 부정하고 새로운 형식을 통하여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고자 하였다. 또한 미술에서는 전통적인 방식인 재현에서 벗어나서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을 택하게 되었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선(禪)이야말로 내가 나의 모든 저술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내용이다.”라고 하여 당시 그의 선에 대한 관심과 서양인들이 가지는 선사상에 대한 단편을 보여 주고 있다.

1955년 미국에서 출판된 앨런 와츠(Alan Watts)의 《선불교에서 해탈의 길》은 선불교의 역사와 철학에 대하여 자세하게 서술하어 많은 사람들이 선사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하였다. 앨런 와츠는 그 외에도 《선의 정신(The Sprit of Zen)》(1936), 《선의 길(The Way of Zen)》(1957), 《바로 이것(This is It)》(1960), 《동양과 서양의 정신요법(Psychot-herapy East & West)》(1961) 등을 발표하여 선사상을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1948년 독일에서는 유진 헤리겔(Eugen Herrigel)의 《궁도(弓道)에서의 선사상》이라는 책이 출판되는데 그는 6년 동안 일본 센다이의 토호쿠 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전통적인 궁도를 익혀 ‘선 스승’이라는 자격을 얻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궁도를 통해 선에 입문한 카를프리트 그라프 뒤르카임(Karlfried Graf Durckheim)은 “헤리겔의 체험은 멀리 떨어진 세계에서 행해지는 낯선 수행에 대한 단순한 경험담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의 저술은 책이라는 대상이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가치인 어떤 섬광 같은 것을 지니고 있다. 저자는 그 자신의 경험에 대해 주석을 덧붙이고 있는데 이 주석은 그가 묘사하는 운동을 초월하는 것이다.”라고 하며 선에 대한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융은 붓다를 인류가 낳은 가장 위대한 천재로 인정했으며, 그의 가르침이 지니고 있는 혁명적인 측면을 강조하며 “인류 전체의 영적인 개척자 붓다는 깨우친 자가 스승이며 구원자”라고 하며 선사상을 찬양하였다.
프로이트의 제자인 에리히 프롬(Erich Fromm)는 1957년 ‘선불교와 정신분석’이라는 주제의 논문에서 선과 정신분석의 공통점을 4가지로 구분하였다. 그는 저서에서 선과 정신분석이 어떠한 공통의 목표를 가지는가를 다음과 같이 보여주고 있다. 

첫째, 정신분석과 선은 공통적인 윤리를 지향한다. 명예욕, 물욕 등 모든 종류의 탐욕을 초월하는 것이 선에 도달할 수 있는 조건이며, 이는 정신분석이 추구하는 바이기도 하다.

둘째, 이 두 가지는 공통적으로 모든 형태의 권위에 대해 독립적이다.

셋째, 두 번째에서 지적한 권위에 대한 도전은 그러나 선에서도 정신분석에서와 마찬가지로 잠정적으로라도 안내자를 필요로 한다.

넷째, 정신분석가가 환자에게 더 이상 도망갈 구석이 없는 막다른 상황에서 어떠한 관념적인 시도나 지원 없이 스스로가 그의 정신을 괴롭히는 망상의 실상을 깨닫도록 하고 그가 의식하지 못하던 것을 의식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듯이, 선 스승도 제자를 이성적이고 지적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극한상황까지 몰아가야 한다.

이와 같이 프롬은 정신분석과 선이 공통의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으며 선에서 깨달음을 추구한다면 정신분석학에서는 무의식을 의식으로 변환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데서 그 유사성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그의 연구는 현대 정신분석학에 많은 기여를 하였으며 서구에서 선에 대한 관심을 유발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스즈키 박사에 의해 선에 관한 관심은 더욱 확산되었다. 예술가와 철학자, 정신분석학자들은 선에 대한 높은 관심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하였다. 서양에서는 선예술이 나타나기 시작을 하였으며 많은 철학자와 특히 정신분석학자들과 의사들은 환자를 치료하는 방법으로 선을 수용하여 많은 긍정적인 효과를 얻게 된다. 

반 미터 에임즈(Van Meter Ames)는 서양인에 있어서 선의 매력은 선이 제한된 작은 자아의 괴로움으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 주며 자연주의적인 그대로 과학의 복잡성을 일도양단하고 시적(詩的)이고 자극적이면서도 도취에 빠지지 않는 실제적인 것을 가르쳐준다고 말한다.

또한 예술가, 사상가, 정신분석학자들은 다방면으로 자신의 직업에 선사상을 수용하여 새로운 예술작품, 새로운 사상, 새로운 치료방법이 창조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히피문화가 확산이 되며 선의 정신을 단편적인 자의적 자유나 환각의 상태로 보며 전락하는 부정적 측면도 동시에 나타나게 된다. 

선사상이 새로운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면서 시작된 문화의 변화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대표적인 문화운동인 제로(ZERO), 플럭서스(FLUXUS)이다.

1957년 시작된 제로운동은 예술가, 사상가, 이론가, 평론가, 자본가 등이 결합하여 새로운 개념을 도출하여 확산시키고자 한 운동이었다. 시대의 혼란 속에서 그 돌파구를 찾기 위한 노력은 많은 부분에서 일어나고 있었으나 제로운동은 특히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집단적으로 일어난 운동이라는데 큰 의미가 있다. 이들은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선언하고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문화예술을 창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다운동에서는 개인적인 관점에서 부정과 파괴를 통한 새로움을 추구하였다면 제로는 동일한 목표의식을 공유하며 새로움을 찾아가고자 하였다. 이 운동에 동참한 프랑스의 이브 클라인(Yves Klein, 1928~1962)은 일본을 방문하여 선사로부터 직접 선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경험들은 새로운 사고를 하는 데 큰 자극제가 되었으며 이 운동이 지향하는 방향성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제로(ZERO)운동가들이 추구하고 한 내용들을 정리하여 보자.

첫째는 인식의 전환이다. 전쟁을 체험한 이들은 공통적으로 전쟁을 억제하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들이 체험한 전쟁은 삶 존재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공포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느끼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대안으로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나타난 것이 불교와 선사상이었다.

둘째는 예술을 통한 변화를 추구하였다. 기존의 예술은 예술의 자체논리에 의하여 진행이 되면서 개인의 느낌이나 감정이 표출되지 못하는 한계성을 나타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따라서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작품에 드러나는 외형적인 표현보다는 내면에 나타나는 사고의 확장과 전환을 표출하고자 하였다.

셋째는 문화운동으로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예술가들의 노력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결과적으로 사회문화가 변화되는 역할을 하였으며 이어서 일어난 플럭서스(FLUXUS)와 공유하며 문화의 흐름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들의 이러한 노력 덕분에 현재까지도 이들이 설정한 개념들이 이어져 오고 있다.

1962년에 시작이 된 플럭서스(FLUXUS)는 흐름, 변화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에서 파생된 말이다. 플럭서스는 새로운 예술운동이었으며 문화운동이었다. 플럭서스는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주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플럭서스의 창설자 조지 마치우나스(George Maciunas, 1931~1993)는 플럭서스의 존재 이유를 “고급예술이 지나치게 많다. 그래서 우리는 플럭서스를 한다.”는 말로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플럭서스는 고급예술을 경멸하고 대중적 예술행동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플럭서스의 이론가인 토마스 켈라인은 “플럭서스는 도대체 예술인가, 아니면 수수께끼인가? 플럭서스는 포스트모더니즘인가?” 라고 반문하면서 플럭서스의 정체성에 관하여 본질적인 질문을 하기도 하였다.

플럭서스 예술은 의외성을 수반하는 다양한 퍼포먼스와 함께 플럭서스식의 글쓰기, 그리고 예술의 오리지널이 갖는 상품성을 거부하기 위하여 사용한 장난감 오브제 작품으로 유명하다. 여기에서 백남준의 플럭서스식 글쓰기 내용을 살펴보면 “내가 만든 텔레비전은 항상 재미있는 것도 아니지만 항상 재미없는 것도 아니다.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자연이 항상 아름답게 변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변하기 때문인 것처럼, 내 텔레비전에서 질(quality)이란 말은 가치(value)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개성(character)을 의미한다. A가 B와 다르다는 것은 A가 B보다 낫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빨간 사과가 필요하지만 가끔 빨간 입술도 필요하다.”라고 하며 자유로운 사고의 유연성을 보여주고 있다.

플럭서스의 기본 개념(The Basic Concepts of Fluxus)을 딕 히긴스와 켄 프리드먼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①국제주의−세계주의(Globalism) : 국가의 개념을 초월하여 세계의 인류가 소통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를 위하여 레이존슨(Ray Johnson)은 우편예술을 창시하였다.
②실험주의 : 다다의 정신을 이어받아 기존 질서에서 벗어나고자하는 관점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다.
③우상파괴주의−과학적 공동 연구 작업, 우상파괴주의(Experimen-talism, Research Orientation, Iconoclasm) : 과거 문화에 대한 반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자 하였다.
④인터미디어(Intermedia) : 복합매체를 활용하여 음악, 연극, 미술 등을 새롭게 표현하고자 하였다.
⑤미니멀리즘−단순성, 절제(Simplicity, Parsimony) : 행위예술에서도 단순성과 절제된 표현을 지향하고 있다.
⑥인생·예술 이분법 해소−예술과 인생의 통합(Unity of Art and Life) : 인생과 예술의 구분이 없어지면서 삶이 곧 예술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였다.
⑦함축성(Implicativeness) : 추상적인 개념들이나 재현을 통한 표현에서 벗어나서 실체를 통한 상징성을 부각시켰다.
⑧놀이정신(Playfulness) : 심각성을 풍자나 익살을 통하여 쉽게 전달하려 하였다. 
⑨순간성−시간성(Presence in Time) : 행위예술의 개념에서 도출되었으나 우리의 삶도 ‘지금 이 순간’이라는 인식에 기반한다.
⑩특수성(Specificity), 우연성(Chance), 음악성(Musicality) : 우연은 전통에 대한 거부이며 비예술적인 요소를 예술적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플럭서스는 다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많은 부분에서 다다가 행하였던 특성들이 플럭서스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다식의 글쓰기는 플럭서스에 와서는 선적(禪的)으로 변화한다. 즉 다다에서는 전통에 대한 반발과 거부에 그 역점을 두었다면 플럭서스식 글쓰기는 백남준의 예에서 보이는 것처럼 다양한 관점에서의 시각을 통한 사고의 유연성과 깊이를 보여 주고 있다. 다시 말해 전통에 대한 반발과 거부뿐 아니라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에서 다다와 플럭서스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플럭서스의 운동은 문화적인 관점에서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 종교에 대한 인식 변화이다. 유럽에 전통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기독교 중심의 종교는 동양 선사상의 확산으로 그 존립이 흔들리게 되었다. 전통종교는 이제 더 이상 사람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지 못하고 현대 서구인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종교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둘째, 삶의 가치 변화다. 두 번의 전쟁을 겪으면서 서구인들은 물질추구가 아닌 정신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삶의 가치를 전환하게 된다. 물질의 풍요가 삶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는 인식을 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삶의 가치를 문화, 예술을 통한 자신의 내면에서 가치를 찾기 시작하였다.

셋째, 예술의 변화이다. 기존의 예술은 ‘예술을 위한 예술’의 개념이 농후하였다. 즉 정해진 미학적 틀에 의해서 예술성을 추구하던 기존의예술은 이제 개별적 특수성을 인정하며 ‘인간을 위한 예술’로 변화하게 된다. 작가에 의하여 완벽하게 만들어진 것을 예술가의 의도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관람자가 스스로의 관점과 인식에 따라서 그 예술의 이해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중시하였다. 플럭서스 창립부터 참여한 요셉 보이스(Joseph Beuys)는 자신의 경험에서 나오는 개념을 통하여 ‘치유의 예술’을 추구하였으며 이러한 그의 노력은 예술의 영역 확장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넷째, 정치, 경제 등 사회 전반에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실천운동이다. 보이스는 당시 학생 정당(현재 녹색당)을 만들어서 직접 정책에 참여하였다. 그는 소수의 권력에 의하여 이루어 지는 정부의 정책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직접 정치나 경제활동에 참여하여 민주주의의 방법들을 새롭게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실천운동으로 이후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에는 새로운 민주주의가 형성이 되며 1960~70년대에 이르러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예술가들의 사회참여운동은 그들의 사상을 사회 전반적인 문화운동으로 확산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부작용도 나타났지만 이렇듯 소수의 예술가와 사상가들이 주도한 플럭서스는 당시 사회 전반에 큰 파급효과를 가져왔으며 그 중심에 선사상과 그 사상적 영향을 받은 플럭서스가 있는 것이다.

선사상이 현대문화에 미친 영향은 이 밖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하는 내용이 있다.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양인들이 그토록 많은 영향을 받은 선사상과 불교문화예술은 주로 초기에는 일본불교의 선과 예술을 중심으로 전해졌으며, 이후 점차적으로 중국, 티베트, 베트남, 스리랑카, 태국, 캄보디아. 네팔 등의 나라들에서 많은 승려들과 서적들이 건너가 번역되고 소개되었다. 한국불교의 경우 1980년대부터 서양에 소개되기 시작하였으며 여기에 큰 역할을 하신 분은 숭산 스님이다. 이 밖에도 서양에 유학한 학생들이 박사학위 논문으로 한국불교(가장 많이 다룬 내용 중의 하나가 원효이다)에 대하여 언급함으로써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서구에서의 한국불교와 한국 선에 대한 인식은 미진하다고 볼 수 있다. 이 부분은 앞으로 계속된 연구와 함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작업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3) 현대문화의 새로운 경향

벤자민 페터슨, <구어진 오리> 1992
플럭서스 창립 30주년 기념 행사를 위한 쾰른 성당앞에 전시된 작품
현대문화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서구의 초기불교 수용은 주로 신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종교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비과학적이라 치부한 불교경전을 번역하며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상 그들 신학자들의 많은 수가 불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후 당대 지성인과 철학자, 예술가들 사이에 불교서적이 소개되면서 불교와 선사상은 그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결국 기독교 주도의 번역으로 알려진 불교경전과 서적들은 일반 사람들에게까지 퍼졌다. 특히 예술가들을 통하여 표현된 불교와 선사상 내용들은 일반인들에게까지 거부감 없이 전파되었다.

이러한 현상들은 많은 파급효과를 가져오며 1980년대를 중심으로 유럽에는 선풍(禪風)이 일어나게 되었다. 선사상에서 수행, 자비, 깨달음에 대한 개념들은 그들 자신을 오랜 시간 지배했던 절대성에서 벗어나게 하는 큰 자극제가 되었다. 선은 자유를 가져다주었으며 삶에 활력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선이 보편화되며 삶에 긍정적인 역할을 가져온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선은 더 이상 특수한 사람들만이 향유하는 고급문화가 아니라 일반화된 문화가 되어 갔다.

현재 서구의 선사상은 선문학, 선심리치료, 선미학, 선예술, 선요가, 선음악, 선무용, 선패션, 선운동, 선과학, 선인테리어 등 많은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새롭게 인식해야 할 중요한 요소는 서양에서 일어나고 있는 선문화적인 요소들이 자국 문화와 결합하여 새로운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이다. 초기에는 동양문화를 수용하여 그대로 향유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들의 문화와 결합함으로써 자신들만의 서구 독자적인 특성들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의 문화현상을 살펴보면 6·25 전쟁을 겪으면서 서양의 문화와 사상들이 들어오고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였다. 그 문화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대체적으로 서양식 합리주의와 과학중심주의이다. 이러한 문화적 변화로 우리의 전통에 대한 인식은 희미해져 갔으며 서양식 사고를 해야만 하는 것처럼 서양문화는 우리나라에서 급속도록 확산되었다. 이후 1980년대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여 전통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부분 서양식 문화가 확산되고 있는 것도 또한 현실이다. 서양이 불교와 선사상을 수용하여 자신들의 전통문화와 결합하여 새로운 개념의 문화를 형성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그 성과를 거두고 있으나 도리어 한국의 경우는 선적 문화에 대한 인식이 미흡한 점이 많다. 아마도 시간이 흐르면 다시 서양이 동양의 문화를 수용하여 재창출한 그 문화를 다시 동양이 수입해야하는 상황이 올 것으로 보인다.

문화예술은 정신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종교, 철학 등 사상의 가치도 변화하지만 문화는 훨씬 빠르게 변화한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여 빠르게 변화하는 문화의 속성을 이해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사상적 담론과 그 사상을 표현할 방식에 대한 연구와 노력이 이루어져서 독창적인 한국 선문화가 형성되어야 하겠다.


3. 맺음말

문화는 시대정신의 대표적인 표현이다. 사상의 깊이를 문화예술로 다 표현할 수 없다고 하지만 문화예술로 표현되지 않은 사상은 사라져 간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인식하는 것이 현대의 문화를 이해하는 바탕이 된다. 문화는 변화한다는 특성이 있다. 그 변화의 속도는  시대마다 차이가 있으나 결국 변화한다는 자체는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화를 변화시키는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문화를 변화시키는 요인은 다양하다.

전쟁이라는 엄청난 희생을 거쳐서 변화하는 부분도 있고 다다(DADA)나 제로(ZERO), 플럭서스(FLUXUS)처럼 예술적인 운동을 통하여 변화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예술을 통한 변화이다. 다다는 인본주의라는 논리로 인간회복을 주장하던 르네상스의 특성인 합리주의와 실증주의의 가면을 벗기는 역할을 하였다. 다다는 기존가치관을 부정하고 무(無)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무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의식이라는 영역을 통하여 우리가 잉태하고 있는 모순들을 모두 백지상태처럼 되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다시 시작해야 새로운 개념과 가치가 탄생한다는 것이다. 

제로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음을 선언하고 새로운 의식과 새로운 형식 새로운 방식을 통하여 삶의 가치를 찾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어서 나타난 플럭서스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동시에 일어난 운동이다. 그들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총동원하여 변화를 이끌어내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방가르드나,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사상적 담론들은 이러한 문화적 변화에 큰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그렇게 볼 때 현대문화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무형식의 형식이다. 산업혁명 이후 과학의 발달로 많은 분야에서 진화하는 가운데 보이지 않는 형식들이 자리하게 되고 그 형식은 그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따라서 새로움에 대한 도전은 쉽게 허락되지 않았으며 자신들이 설정해 놓은 규범들을 따르고자 다양한 방법 등을 통하여 제도화하였다. 하지만 불교와 선사상이 확산되면서 개인적인 관점이 중요하게 인식이 되었으며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즉 외형적인 틀에서 벗어나 내면적인 자유로움을 추구하게 되었다.

둘째는 종교의 사회적 역할이 축소되고 있다. 과학의 발달은 종교에 대한 인식도 변화시키는데 특히 유럽의 경우 기존 종교에 대한 관점이 크게 변화하게 되며 종교의 기능이 상실되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수용한 불교나 선사상 역시 그들은 종교적인 틀보다는 철학적, 예술적, 실존적 가치를 추구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서양종교의 특성인 절대자에 의한 구원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여 자신의 삶의 가치를 찾아가고자 하는 노력은 불교나 선사상에 의해서 더욱 확산되고 있다.

셋째는 문화의 융합을 넘어선 독창성이다. 동양과 서양이 서로 교류하며 많은 부분 공유하게 되면서 문화적인 융합기를 맞이했으며 이제는 그것을 자신들의 문화적 특성에 맞추어 새로운 독창적인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 서양은 더 이상 동양의 문화를 무조건 수용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문화와 결합하여 삶의 방향을 찾아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부분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선사상이 현대문화에 끼친 영향은 문화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 어떠한 사상보다도 크게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시대의 변화를 주도하며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된 선사상은 이제 세계보편적인 사상이 되었다. 그 수용과 활용 방법에 있어서 문화권마다 다양한 방식을 택하고 있으나 그들이 추구하는 방향은 많은 부분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문화의 영역은 정신문화와 예술문화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정신문화의 변화는 종교, 철학, 문학, 정치, 경제 등 거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시대적인 정신을 추구하는 현대철학에서 불교와 선사상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현대의 변화를 주도하는 사상의 핵심에는 선사상이 자리하고 있다는 데 이의가 없다. 선사상에 바탕한 가치관의 변화는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고 있다.

한국의 불교와 선 문화 역시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인지하고 그 방향성을 모색하여야 한다. 전통의 방법들을 살리면서도 현대의 감성과 감각으로 재해석하고 표현된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수용하게 될 것이다. 

예술 문화는 정신문화의 꽃이며 그 향기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이러한 예술 문화에 대한 연구가 계속 이루어져 선사상의 특성들이 새롭게 표출되기를 바란다. ■

 

윤양호 /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선조형예술학과 교수. 독일국립쿤스트아카데미 뒤셀도르프 마이스터쉴러에서 선미학(禪美學)과 선조형예술학을 전공. 한국에 처음으로 선조형예술학과를 신설하여 국제적인 선조형예술가를 양성하며 더불어 새로운 학문적인 패러다임을 도출하고 있다.한국선학회 국제학술교류위원장 역임. 주요 논문으로 〈점수와 돈수의 관점에서 본 현대미술〉 〈백남준의 예술세계에 나타나는 선사상〉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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