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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에 대한 비관과 그 치명적 결과 / 민경국
―박병기 교수의 〈자유주의 경제학의 치명적 낙관〉에 대한 반론
[44호] 2010년 09월 06일 (월) 민경국 kkmin@kangwon.ac.kr

   
민경국 교수
1. 서론

《불교평론》 2010년 봄호(제42호)에 게재된 필자의 글, 〈불교 사회철학의 문명비판에 대한 자유주의적 성찰〉(이하 〈자유주의적 성찰〉)에서 필자는 자유주의 입장에서 현대문명에 대한 불교 사회철학의 비판의 허와 실을 밝혀내면서 이 사회철학을 오늘날과 같이 거대한 열린사회에 실천할 경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그 적용 결과는 치명적인 데  반하여, 자유주의가 지속가능한 발전 원리라는 필자의 입장을 제시했다.

이 같은 입장에 대하여 박병기 교수(이하, 박병기)는 《불교평론》2010년 여름호(제43호)에 게재된 〈자유주의 경제학의 ‘치명적 낙관’〉(이하 〈치명적 낙관〉)에서 매우 비판적으로 반응하고 있다. 그의 글 내용은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로 그가 자유를 문제시하고 있다. 자유주의가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유는 잘못된 인간관 때문에 허구적 자유일 뿐이라는 것이다. 자유주의가 중시하는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다. 이는 고장난 기계에 불과하고 그래서 자유주의로부터 번영을 기대하는 것은 ‘치명적 낙관’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인간의 탐욕에 대한 불교 사회철학의 입장에 대한 필자의 비판을, 그리고 불교 사회철학은 소규모 사회에 적합한 철학이라는 필자의 주장을 문제시하고 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자유주의를 대신할 대안을 찾고 있다. ‘연기적 독존주의(緣起的 獨尊主義)’가 탁월한 대안이라고 보고 있다. 개인의 존귀함을 강조하는 독존주의와 배려의 윤리(ethics of care)를 강조하는 연기성이다.

이 글의 목적은 이 세 가지 내용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필자의 결론은 자유주의에 대한 박병기의 비판은 필자가 대변하는 자유주의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번지수가 틀렸다는 것, 배려의 윤리는 자유사회에 대한 대안이 아니라 자유사회를 치장할 하나의 장식품이라는 것, 그리고 자유사회의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비관은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2. 자유주의의 자유와 인간관

박병기는 자유주의는 고립된 인간, 진정한 도덕이 없는 이기적 인간을 전제하고 있다고 한다. 고립된 인간에게는 자유란 불필요하고 따라서 자유를 최고의 기치로 여기는 자유주의는 모순이라는 것이다
필자가 〈자유주의적 성찰〉에서 보여 준 자유주의가 고립된 이기적 인간을 전제했는가? 그러나 박병기는 필자의 자유주의는 인간관이 아니라 사회적 진화적 인간관을 전제한 것이라는 점을 간과했다.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 가짜 자유주의와 진짜 자유주의를 상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1) 두 가지 종류의 계몽주의 전통과 인간관

박병기는 자유주의는 “자유가 문제 될 수 없는 고립된 인간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자유를 지상의 가치로 내세우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도 그렇다고 비판한다.

그의 비판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해서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점은 지성사의 양대 산맥을 구성하는 두 가지 종류의 계몽주의를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데카르트의 고전적 합리주의에서 비롯된, 그리고 홉스(Th. Hobbes), 벤덤(J. Bentham), 밀(J. S. Mill) 등의 프랑스 계몽주의이다. 현대에 이를 계승한 대표적 인물이 존 롤스(J. Rawls)이다.

다른 하나는 흄(D. Hume), 스미스(A. Smith), 퍼거슨(A. Ferguson) 등, 고전적 자유주의를 확립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전통이다. 이 전통은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거성으로 알려진 미제스(L. Mises), 하이에크(F. A. Hayek), 뷰캐넌(J. M. Buchanan) 그리고 부분적으로 밀튼 프리드먼(M. Friedman) 등에 의해 계승하고 있다.
이 양대 산맥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여러 가지로 두 전통을 구분할 수 있다(〈표-1 참조〉). 중요한 것은 박병기가 지적한 인간관이다

〈표-1〉 진화적 합리주의와 구성주의적 합리주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전통

프랑스 계몽주의 전통

● 진화적 합리주의
● 흄, 스미스, 몽테스키외, 하이에크
● 사회적, 진화적 인간관
● 정의의 규칙을 통한 자생적 질서
● 미래는 열려 있다.
● 진짜 개인주의(진짜 자유주의)
 ● 데카르트, 벤담, 존 스튜어트 밀, 롤스
● 고립된, 이기적, 합리적 인간관
● 명령지시에 의한 인위적 질서(조직)
● 미래를 미리 정해 놓는다.
● 가짜 개인주의(가짜 자유주의)
 

 

프랑스 계몽주의의 인간관은 이기적이고 고립된 합리적인 인간이다. 롤스가 이 인간관을 전제하여 정의론을 개발했다는 박병기의 지적은 옳다. 프로타고라스와 데카르트가 이 같은 인간관을 개발했다는 지적도 옳다.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전통의 자유주의에서 인간은 자기 완료적인 고립된 인간이 아니다. 이 전통에서 사회와 독립적인 고립된 인간의 존재는 상상할 수 없다. 인간은 사회를 떠나 고립하여 존재할 수 없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지식을 습득하고 모방하고 테스트하는 등, 학습하는 것이 인간이다. 학습을 통해서 개인 자신이 발전해간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도덕적 행동도 개발하고 테스트하고 모방하고 학습한다.

그래서 당연히 자유란 인간과 인간의 관계와 관련되어 있다. 인간관계를 떠나서는 자유는 생각할 수 없다. 이 같은 인간을 전제한 것이 진짜 자유주의이고 동시에 진짜 개인주의라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박병기가 비판한 것은 프랑스 계몽주의 전통의 자유주의이다. 이런 그의 비판은 마이클 샌들(M. Sandel) 등이 원자적 인간을 전제한 롤스의 자유주의의 허구성을 보여 주었던 1980년대에 벌어진 ‘공동체주의−자유주의 논쟁’을 연상시키고 있다.

박병기가 지적한 원자적 인간을 전제한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은 진정한 자유주의라고 볼 수 없다. 하이에크는 1940년대에 이미 원자적 인간을 전제한 개인주의를 ‘가짜 개인주의’라고 비판했다.

필자는 〈자유주의적 성찰〉에서 명시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정치철학의 양대 산맥을 말해 주는 두 가지 계몽주의 대신에 프랑스 계몽주의의 구성주의적 합리주의(constructivistic rationalism)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진화적 합리주의(evolutionary rationalism)를 엄격히 구분하면서 하이에크가 대표로 하는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후자의 합리주의의 전통에서 나온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결론적으로, 박병기가 비판하는 자유주의는 엄밀한 의미에서 자유주의가 아니고 프랑스 계몽주의 인간관에 대한 비판으로 적절할 뿐이다, 더구나 필자의 글 〈자유주의적 성찰〉에서 제시한 자유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은 번지수가 틀렸다.
 
2)생각하는 인간과 행동하는 인간

“데카르트가 주목했던 인간도 스스로 사고의 영역 속에서 고립된 채 생각하는 인간이었다.”는 박병기의 지적은 옳다.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인간, 이것은 생각과 행동에서 생각을 중시하고 행동은 오로지 생각의 종속변수로 여긴다. 그리고 인간이성을 오로지 사고의 산물로만 여긴다.

이런 관점은 어떤 정치철학을 야기했는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개발되었다는 박병기의 주장은 옳은가? 전혀 그렇지 않다. 데카르트의 사상 때문에 생각할 자유에 해당되는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정치적 참여의 자유 등 이른바 ‘정신적 자유’의 중요성만을 강조하고 자본주의의 경제적 자유를 포함하는 행동의 자유를 경시하는 정치철학이 풍미하게 되었다. 이 정치사상이 프랑스 계몽주의의 전통이다. 이 전통을 대표하는 사회민주주의와 롤스의 정의론을 보라. 경제적 자유의 제한을 당연시하는 데 반하여 양심의 자유와 같은 정신적 자유의 제한에 대한 반대는 엄격하다.

생각만을 중시하는 프랑스 계몽주의가 옳은가?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틀렸다. 이성의 발전 원리를 보면 그 틀림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실천, 즉 행동이 없는 생각, 아이디어는 공리공론에 지나지 않는다. 아이디어와 견해의 옳고 그름은 실천적 행동 과정에서 비로소 판명될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새로운 견해와 아이디어의 발견도 가능하다. 인간의 이해력을 의미하는 인간이성의 발전은 따라서 생각의 산물이 아니라 생각과 행동의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생각하는 지적 활동만 중요하고 행동을 무시하는 것, 이것은 하이에크(F. A. Hayek)가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건축물의 꼭대기만 중요하고 그 아래 부분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생각과 행동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통일체이다.

생각하는 인간과 나란히 ‘행동하는 인간’을 내세워서 생각의 자유와 행동의 자유를 등가관계로 보는 것이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전통의 자유주의이다. 경제 자유를 포괄하는 행동의 자유와 정신적 자유는 똑같이 중요시한다.

3. 자유주의와 도덕, 그리고 시장가격

박병기는 자유주의 경제학은 고립된 인간을 전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도덕’도 없는 이기적 인간을 전제하고 있다고 말한다. 애덤 스미스에게는 경제학과 윤리학 사이의 괴리가 존재하지 않았는데, 자유주의의 윤리학적 토대는 자유주의 경제학 자체의 독립 과정에서 무너지기 시작하여 신자유주의에 이르러서는 도덕은 경제로부터 완전히 소외되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경제학은 도덕을 가격으로 대체하고 특히 인간 삶에 속하는 모든 것들을 시장가격으로 환원하여 질적 차원을 무시하고 양적 획일화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시장은 ‘진여(眞如)’의 차원을 무시하고 양적이고 수적인 가격으로 전환시키는 거대한 블랙홀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자유주의에 대한 이 같은 비판이 타당한가? ‘진정한 도덕’이란 또 무엇인가?

1) 자유주의에는 도덕이 없는가?

오늘날 경제학 전체가 애덤 스미스가 중시했던 윤리학으로부터 멀어졌다는 비판은 전적으로 옳은 비판이 아니다. 멀어진 경제학이 따로 있다. 이 경제학이 흔히 말하는 ‘주류 경제학’이다. 오늘날 한국의 대학 교육을 지배하고 있는 교과서 《맨큐의 경제학》이 그 주류 경제학의 전체 내용이다. 박병기가 말하듯이 고립된 인간, 이기적인 인간, 그리고 지식의 문제가 없는 아주 합리적인 인간을 전제하여 개발된 경제학이다.

이 전통이 프랑스 계몽주의 전통이고 이런 경제학의 등장에 중요한 기여를 한 인물이 존 스튜어트 밀이라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프랑스 계몽주의가 진정한 자유주의가 아니듯이 주류 경제학도 자유주의 경제학에 속하지 않고 케인즈와 똑같이 반(反)자유주의 경제학이다.

박병기가 필자를 이런 경제학의 대변자라고 보고 필자를 비판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큰 오해이고 억지이다. 필자의 글 〈자유주의적 성찰〉 어느 곳에도 그 같은 나쁜 경제학을 전제했다고 볼 만한 근거가 없다.

애덤 스미스와 흄 등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전통의 경제학은 칼 멩거(C. Menger), 미제스, 하이에크 등, 오스트리아학파와 그리고 독일의 오이켄(W. Eucken)을 중심으로 한 프라이브르크학파가 계승 발전시켰다. 그들은 경제와 도덕의 상호 관계를 매우 중시하고 있다.

2)진정한 도덕은 무엇인가?

박병기가 말하는 진정한 도덕은 무엇인가? 그는 슬로트(M. Slote)와 유태교를 기반으로 윤리학을 개발한 부버(M. Buber)의 윤리학을 도입하고 있다. 슬로트는 배려의 도덕을 부버는 너와 나의 직접적인 관계를 말하는 ‘함께의 도덕’을 개발했다. 이들의 도덕은 표현이 다를 뿐, 같은 내용인데, 간단히 말해서 우정과 애착심, 친절 등과 같은 선행의 도덕이다.

흥미롭게도 박병기는 이 선행의 도덕을 ‘진정한 도덕’이라고 한다. 왜 그런가? 진정성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에게 설명이 없다. 아마도 그 도덕만 가지면 사회질서의 유지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정말로 그런가?

애덤 스미스는 자신의 《도덕감정론》에서 선행의 도덕을 건축물의 장식품과 비유하면서, 건축물의 대들보에 해당되는 또 하나의 도덕으로서 정의의 규칙(rule of justice)을 들고 있다. 이것은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금지하는 규칙이다. 그 같은 행동의 대표적인 예는 폭력, 부정직, 타인의 재산과 신체, 명예의 훼손 등과 같은 행동이다.

흥미로운 것은 애덤 스미스의 비유이다. 대들보가 무너지면 건축물이 산산조각이 난다. 이에 반하여 장식품은 없어도 집은 무너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사회질서의 유지를 위해 중요한 것은 정의의 규칙이기 때문에 정의의 훼손에 대해서는 국가의 강제가 뒤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반하여 선행의 도덕은 강요할 수 없고 권장의 대상이다.

결론적으로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진정한 도덕은 정의이다.

3) 시장가격을 폄하하는 것은 지적 자만

박병기는 시장가격은 ‘진여(眞如)’를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진여란 무엇인가? 참(眞)을 말한다. 이것은 사람들의 감정이나 주관과는 독립적으로, 그래서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다고 전제한다. 그의 비판내용은 시장가격은 참된 가치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참된 가치를 어떻게 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데카르트처럼 명상을 통해서? 정치적 과정을 통해서?

경제사상사에서 시장가격과 독립적인 참가치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우리의 인지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에크가 적절히 지적하듯이, 인간이성의 한계 때문에 ‘정당한’ 가격, 또는 참가치를 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참가치를 인위적으로 정할 수 없다면 익명의 사회적 과정, 열린 시장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박병기는 가격이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가격이 없으면 어떤 삶의 방식이 가능한가의 여부, 어떤 욕구를 억제하고 어떤 욕구를 먼저 충족해야 하는가의 여부도 알 수가 없다. 내가 어디에서 어떤 집을 짓고 살 것인가, 어떤 직업을 택할 것인가, 이 직업을 위해 얼마나 인적 자본에 투자할 것인가도 가격이 없으면 결정하기가 불가능하다. 의미 있는 삶을 위해서는 가격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박병기는 시장가격을 전가보도(傳家寶刀)처럼 취급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는 유감스럽게도 이처럼 취급할 수 없는 이유나 사례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시장가격은 그 어느 인간도 해낼 수 없는 일, 사람들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지식은 물론 심지어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는 라일(G. Ryle)의 의미의 ‘암묵적 지식’까지도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일을 매끈하게 해낸다. 이것이 가격에 대하여 우리가 경외감을 가져야 할 중요한 이유다. 시장은 정부나 그 어떤 정신보다도 현명하다.

따라서 그 어느 누구도 가격을 단순한 수량화라는 식으로 폄하할 대상이 결코 아니다. 이런 폄하는 지적 자만이다.


4. 자생적 질서와 경제적 번영

필자는 다른 도덕적 관점 이외에도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전통에 따라 인식론적 관점에서 보아도 자유주의가 옳은 길이라는 것을 강조해 왔다.

빈곤, 대량실업, 환경문제, 소득의 불평등, 경제위기 등, 좌파가 자유주의의 탓이라고 열거하는 모든 문제는 실제로는 자유주의 탓이 아니라 정부의 간섭주의 때문에 생겨난 것, 그래서 문제의 해법은 자유주의라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이 같은 입장에 대하여 박병기는 매우 비판적이다. 그 비판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첫째로 번영의 개념에 관한 문제이다. 두 번째는 이성의 한계라는 사실이 자유주의의 정당한 근거가 될 수 있다는 필자의 주장에 대한 비판이다. 세 번째로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필자의 낙관을 비판하고 있다. 그의 이 같은 비판이 타당한가?
 
1) 이성의 한계, 정의와 배려윤리

인간이성의 한계 때문에 자유주의가 옳은 길이라는 필자의 주장에 대하여 박병기는 한편으로는 이성의 한계 때문에 윤리학 영역에서 ‘정의(justice)’에 중점을 두는 도덕보다도 배려의 윤리가 주목받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전적으로 옳은 것이 아니다.

정의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분배정의가 있다. 시장 과정의 결과를 평가하고 이를 수정하기 위한 잣대이다. 노직(R. Nozick)의 의미의 결과지향적 정의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 행동과 관련된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막는 것, 이것이 정의이다. 애덤 스미스의 정의의 규칙(rule of justice)이 그 같은 역할을 한다.
결과 지향적 분배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결과에 대한 구체적인 예측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같은 예측에 필요한 지식을 아무도 가질 수 없다. 똑같이 이 같은 지식의 문제 때문에, 즉 이성의 한계 때문에 배려의 윤리도 실현하기 곤란하다. 수백만 수천만 명이 제각기 처한 상황을 알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분배정의 실현이나 배려윤리의 실현은 똑같이 이성의 한계 때문에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지식의 문제 때문에 분배정의보다 배려의 윤리가 주목받고 있다는 말은 이해할 수 없다.

정의를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금지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 정의의 규칙은 개인들의 행동 결과나 그들의 상황을 따지지 않고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당연히 금지한다. 따라서 이런 정의의 실현에는 그렇게 많은 지식이 불필요하다. 따라서 정의(의 규칙) 대신에 배려윤리에 주목하는 것은 이성의 한계를 고려해서가 아니라 이를 도외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의 규칙을 집행하는 최소한의 국가 과제는 박병기가 비판하는 것처럼 그렇게 인간이성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도 아니고 정의의 규칙은 개인의 자유의 보호가 목적임으로 이런 정의의 실현은 자유의 제한을 초래하는 것도 아니다.

국가의 과제는 가능하면 최소로 줄여야 한다는 자유주의 원칙은 시장이 정부보다 현명하다는 인식에 대한 끊임없는 역사적 경험과 이론적 사유의 산물이다. 따라서 시장의 영역과 국가 영역의 구분이 박병기의 비판처럼 결코 그렇게 자의적이지 않다.

2) 자생적 질서는 허구인가?

보이지 않은 손이 고장난 기계와 같다는 박병기의 주장을 보자. 그의 이 같은 비판은 “인간행동의 결과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계획이나 의도한 결과가 아닌 질서”로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전통이 중시하는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의 존재를 부정하는 주장이다. 보이지 않는 손과 그리고 자생적 질서를 강력히 반대했던 세력은 ‘보이는 손’에 의한 계획된 질서 즉, 인위적 질서(artificial order)를 중시했던 것은 프랑스 계몽주의 전통이다.

정말로 보이지 않는 손, 즉 자생적 질서는 고장난 기계인가? 이런 비판은 긴 설명을 요하지만 지면 관계로 간단히 설명할 수밖에 없다. 우선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국부의 증가를 보이지 않는 손의 원리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그가 보이지 않는 손을 낙관하지 않았다는 박병기의 해석은 옳지 않다.

고장난 기계와 같다면 애덤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의 원리를 발견한 시기 이후, 인류 사회의 발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인간이성의 한계를 인정한다면, 경제계획이나 정부의 간섭과 같이 ‘보이는 손’으로 그 번영을 이룩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정의의 규칙을 엄격히 지키면서 정부의 규제와 간섭이 없으면 시장질서는 외적인 쇼크와 파동은 물론 내적인 변화들을 제어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빈번히 시장질서의 그 같은 능력을 유기체의 내적인 자율 능력과 비유하기도 한다.

박병기가 이른바 ‘투기자본’을 비판하지만 방만한 통화정책을 비롯한 반시장정책 아래에서는 별별 일이 다 난다. 시장경제를 구성하는 원칙을 위반하는 정책은 보이지 않는 손의 작동을 훼손한다. 그래서 필자는 〈자유주의적 성찰〉에서 시장경제를 구성하는 원칙을, 그리고 이것이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기 위한 조건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더구나 자생적 질서의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비관의 결과는 계획된 질서에 대한 낙관이고 이 결과는 끔찍하다. 과거의 동유럽 사회주의와 유럽의 복지국가가 그 단적인 예다. 
 
3) 경쟁이 악한가?

박병기는 경쟁에 대하여 매우 비관적이다. 정말로 경쟁이 나쁜가? 본능적으로 우리는 경쟁을 싫어한다. 그래서 경쟁은 생물학적인 본능 소산이 아니라 문화적 진화의 선물이다.

이 선물을 보이지 않는 손의 핵심으로 여긴 인물이 애덤 스미스이다. 경쟁은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버르장머리 없는 기업들을 길들이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확립한 인물이다.

애덤 스미스 이후 자유주의자들은 경쟁의 여러 가지 사회적 역할을 발견했다. 예를 들면 경쟁은 인간에게 절제의 도덕과 신중의 도덕, 그리고 뒤에 가서 설명하겠지만 배려의 도덕을 촉진한다. 경쟁은 권력을 해체하기도 한다. 권력의 집중을 막는 효과적인 방법은 경쟁이다.

하이에크가 인식론적 입장에서 경쟁을 발견의 절차라고 말한 것은 경쟁의 사회적 역할의 최고봉이다. 이 절차는 알려져 있지 않은 지식의 발견이다. 이 같은 경쟁의 역할 때문에 자유주의에서 경쟁은 법으로 억압할 것이 아니라 보호해야 할 대상이다. 개인적 또는 사회적 차원의 번영은 바로 이 경쟁으로부터 나온다.

4) 번영의 개념에 대한 문제

그런데 박병기는 경제적 번영을 단선적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또 그것은 반성적 검토의 대상이라고 비판한다. 번영이 중요한 이유를 알면, 번영의 개념을 단선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벤자민 프리드먼(B. Friedman)의 유명한 저서 《성장의 도덕적 귀결》은 경제성장은 물질적 증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배려의 윤리, 선행의 윤리, 관대함과 너그러움 같은 도덕을 증진시킨다는 점을 강조했다.

필자의 저서 《자유주의의 지혜》에서 경제적 번영은 인간의 수명, 건강, 여가, 교육의 수요 등 비물질적 번영도 가져다준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번영하는 경제에서는 주거환경도 깨끗해지고 사회적 갈등도 적고 사회적 평화가 촉진된다. 자유무역과 경제적 번영은 국제적 평화도 촉진한다. 

따라서 박병기가 인용한 러미스(D. Lummis)의 저서 《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필자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5. 연기적 독존주의의 허와 실
 
박병기는 자유주의는 고장난 자생적 질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고립된 이기적 인간을 전제하기 때문에는 우리의 미래를 그 이념에 맡길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이는 개인의 존엄을 인정하면서 인간들의 관계성과 정서를 중시하는 이념이라고 말한다. 

그는 연기적 독존주의(緣起的 獨尊主義)라고 부르는 그 이념의 윤리적 내용을 채우기 위해 슬로트/부버의 윤리학을 도입하고 있다.

독존주의는 개인의 존엄성을 말한다. 이는 자유주의만큼 잘 보장하는 사회는 없다. 연기성의 내용을 채우는 배려의 윤리를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전통의 자유주의 관점에서 검토할 것이다.

1) 연기적 독존주의 사회: 경쟁 없는 정태적 사회

연기적 독존주의의 어떤 사회를 요구하는가? 박병기는 우리의 사고력을 마비시킨다는 이유로 경쟁을 배제한다. 그래서 연기적 독존주의 사회는 경쟁 없는 사회이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의 제목 자체가 보여 주는 것처럼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전통이 중시하는 경제적 번영(국부)을 보자. 박병기는 이것도 우리의 사고력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중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연기적 독존주의 사회는 성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사회는 슈마허(E. F. Schumacher)의 “적게 먹고 적게 싸는” 경제라고 볼 수 있다.

경쟁도 싫어하고 소득의 증가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끼리 사는 사회이다. 이런 사회가 있는가? 친구 그룹, 동창회, 종교 그룹과 같이 그룹 내에서는 경쟁이 없다. 그리고 그룹 내부에서는 소득 수준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

따라서 연기적 독존주의 사회는 구성원 간의 관계가 두터운 소규모의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 소규모 그룹의 삶의 조건을 말하는 연기적 독존주의가 자유사회의 대안이라는 주장에 대꾸할 필요도 없다.

2) 연기적 독존주의 사회: 보이는 손이 필요한 사회

박병기는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하여 비관적이다. 이런 비관은 사회질서에 대하여 중요한 의미가 있다. 자생적 질서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에, 사회질서를 계획할 ‘보이는 손’이 필요하다. 보이는 손은 정부이다. 전형적인 계획경제 사상이다.

정부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경쟁을 부인하기 때문에 국가는 이를 억압해야 한다. 기본적인 욕구 충족 이상의 경제활동도 막아야 한다. 배려의 윤리도 강제로 집행해야 할 것이다.

이런 연기적 독존주의가 어떻게 자유사회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 어이가 없다. 그래서 그것은 가족 집단이나 친구 그룹 같은 소규모 그룹에 적합한 개념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배려의 윤리를 보면 이것이 더욱 더 확연히 드러난다.

3) 연기적 독존주의 사회: 배려윤리

박병기는 슬로트와 부버의 윤리를 도입하여 연기성의 의미를 해석하고 있다. 이들의 윤리는 배려윤리, 애덤 스미스의 선행의 도덕이다. 두터운 호의와 우정, 애착심의 인간관계이다. 박병기는 최대의 종교는 친절이라는 법정 스님의 말을 빌려 친절의 미덕을 강조한다.

혼자서 고립되어서는 살아갈 수가 없고 관계를 맺으면서 살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의 관계들은 매우 복잡하고 그 종류도 수십만 가지 또는 수천만 가지다. 이런 관계 중 하나가 호의와 배려이다. 인간들의 복잡다기한 관계 속에서 호의와 배려가 축적된다.

이 축적은 서로를 잘 알고 있고 서로 배려와 호의의 신세를 지는 관계를 의미한다. 이는 가족처럼 견고하거나 회사의 사장과 직원 사이처럼 비교적 느슨한 경우도 있다. 극단적인 경우 제3자처럼 그것이 전혀 없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견고함에서 느슨함과 극단적으로 무관함까지 배려와 호의의 강도가 사회의 규모에 반비례한다는 점이다. 가족들, 친구들, 동업자, 종교 교우 등과 같은 공동체적 집단 내에서처럼 소규모 사회에서는 그 정도가 매우 크다. 이 집단을 넘어서면 그 강도는 점차 줄어들어, 마침내는 서로 배려와 호의의 나눔은 고사하고 전혀 낯모르는, 그래서 그 강도가 제로가 된다.

따라서 두터운 배려윤리는 빈번히 만나서 서로의 처지를 잘 알고 있고 더구나 어려운 때나 즐거운 때 서로 호의와 배려를 나누고 이를 축적할 할 수 있는 소규모 사회에서나 가능한 윤리이다. 

4) 자유주의와 배려윤리

박병기는 자유주의가 배려의 윤리를 버렸다고 비판하고 있다. 버린 것이 아니라, 배려의 윤리는 건물의 장식품인 데 반하여 정의의 규칙은 대들보이기 때문에 배려윤리의 준수는 개인들의 판단에 맡기되 거대한 사회의 기반이 되는 정의의 규칙의 준수는 국가에 맡겨야 한다는 애덤 스미스의 주장은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배려와 호의는 소규모 사회에서만 빈번히 목격할 수 있고 이에 반하여 인간이성의 한계로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어려운 거대한 익명의 시장사회에서는 그것이 빈번하지 못하다는 것을 애덤 스미스가 제대로 파악하여, 그는 푸줏간 주인의 자리심(自利心)을 예로 하여 《국부론》을 썼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시장사회는 공동체만큼 그렇게 견고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배려의 윤리가 살아 있다. 성실성과 호의를 가지고 고객들을 대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제품, 파손된 제품을 지체하지 않고 교환해주고 또 판매한 후에도 일정 기간 동안 무료로 사후관리도 해준다. 백화점은 고객들을 배려하기 위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기업들은 소비자들의 선호를 최대한 배려한다.

기업들이 장기적인 이익을 바라고 선행을 한다. 그래서 진정한 배려와 연기성과도 거리가 멀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동기가 아니라 행동의 결과이다.

동기야 어쨌든 경쟁사회는 결코 선행을 버린 것이 아니라 이를 권장하고 장려한다.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협동심을 키우기 위한 교육이나 훈련을 시키는 것이 단적인 예다. 친절하지 못한 백화점은 경쟁에서 밀려난다. 고객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자유사회에는 가족집단, 교회집단, 팬클럽, 범죄예방단체, 청소년 보호단체, 상부상조를 위한 친목단체, 자선단체 등, 수많은 공동체적 집단들이 자발적으로 형성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같은 집단을 구성하고 참여할 자유가 보장된 것도 자유사회다.

따라서 자유사회의 묘미는 개인들은 한편으로는 마땅한 공동체적 집단을 자유롭게 선택하여 배려의 두터운 도덕적 욕구를 충족하고, 다른 한편 이 집단 밖에서는 엷은 배려나 또는 이기적 욕구를 충족할 수 있다는 점이다. 


6. 맺는 말: 보이지 않는 손의 폄하는 지적 자만 

필자의 〈자유주의적 성찰〉에 대한 박병기의 비판은 번지수가 틀렸다. 그는 익명의 사회와 대면사회의 구분을 자의적이라고 비판함으로써 도덕은 사회의 규모에 따라 전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간과했다.

연기성은 공동체적 소규모 집단에서나 불가피한 인간관계이다. 소규모의 대면사회에서 배려의 도덕적 욕구를 충족할 수 있다. 공동체적 집단의 바깥은 전혀 다른 세상이다. 거대한 열린 익명의 사회이다. 그래서 밖에서는 불가피하게 배려의 도덕적 욕구가 엷거나 자리심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

소규모의 공동체적 집단에서나 가능한 연기적 독존주의는 그래서 자유주의의 대안이 될 수 없다. 이를 대안으로 만든다면 필자가 〈자유주의적 성찰〉에서 말했듯이, 역사를 먼 과거로 되돌리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

자유사회에서는 인간의 이중적 욕구를 충족할 수 있다. 배려의 두터운 도덕적 욕구를 충족하고 싶으면 자유사회에서 자발적으로 형성하는 공동체적 집단에 참여한다. 이 집단의 밖에서는 엷은 도덕적 욕구 또는 이기적 욕구를 충족할 수 있다. 자유사회는 자비의 욕구와 이기적 욕구를 동시에 충족하는데 어떤 장애물도 없다. 스미스의 말과 같이 배려의 도덕은 자유주의 시장사회를 대체할 도덕이 아니라 그것을 치장하는 장식품이다.

자유주의에 대한 비관은 치명적 결과를 초래한다. 이것은 역사가 입증한다. 사회주의의 몰락, 복지국가의 붕괴가 단적인 예이다.

자유사회의 보이지 않는 손의 위력을 폄하하는 것은 지적 자만의 표현일 뿐이다. ■
 

 

민경국 / 강원대 경제학과 교수. 서울대 문리과대학 졸업, 독일 프라이브르크 대학교 경제학 석사 및 박사. 한국하이에크학회 회장 역임. 한국제도경제학회 부회장 겸 편집위원장. 주요 저서로 《하이에크 자유의 길 : 하이에크 자유주의 사상연구》 《자유주의의 지헤》 《자유주의의 시장경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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