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변 지역 개관

연변은 중국 조선족들이 가장 많이 집거해 있는 지구이며, 조선족은 자치주가 행사하는 자치권리의 주체민족이다. 연변 조선족은 중국에서 ‘백의동포’라고 불리며, 우리 민족의 전통과 민족 습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력사적으로 보면, 일찍이 26,000년 전 구석기 말기에 연변 땅에 ‘안도인’이 활동했고, 서기 698년에는 진국이 건국되었다가 713년에 발해국으로 고쳤다. ‘연변’이란 단어는 1920년 전후에 등장했는데, 이 지역이 중국, 러시아, 조선 등 3개국의 접경 지대에 위치해 있고, 또 연길변무공서의 관할에 속했기에 연변이라고 칭하였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동북을 침점한 후 1934년 12월에 연변을 ‘간도성’으로 칭하였다. 1945년 8월 일본이 투항한 후에는 중국공산당이 연변에다 인민정권을 세우고 간도성 정부를 설립, 같은 해 11월에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로 개칭하였다. 1948년 3월 연변전원공서를 설립하였다가 1952년 9월 3일 민족구역 자치를 실시하면서 연변전원공서를 없애고 연변조선민족자치구를 설립하였다. 1955년 12월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개칭하고, 그 산하에 1개 시, 5개 현을 두었다. 1958년 돈화현이 연변에 획분되어 들어왔고, 1965년 도문시가 설립되었다. 1985년부터 돈화, 룡정, 훈춘, 화룡현이 시로 되었다.

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에는 연길시, 도문시, 돈화시, 훈춘시, 룡정시, 화룡시 등 6개시와 왕청현, 안도현 등 2개 현이 소속되어 있다. 연변의 수부는 연길시이다.

현재 연변에 살고 있는 조선족은 19세기 중엽부터 조선반도에서 이 지역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련속되는 자연재해와 봉건폭정 통치, 그리고 일제 침략폭행에 못 이겨 해마다 수천수만 세대가 북으로 타향살이를 떠난 결과였다. 어떤 사람들은 로씨아 프리모르스크변구 일대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두만강과 압록강 북안 일대에서 숨어 살았다.

두만강 북안에서 대대손손 일하며 살아온 연변 지역의 조선족은 한 세기 남짓한 동안 갖은 풍상고초를 다 겪었다. 그들은 피와 땀으로 이 땅을 개척하고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또한 항일 및 해방전쟁에서 마멸될 수 없는 기여를 했다. 1949년 새 중국이 창건된 후 1952년에 연변조선민족자치구(후에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고쳤음)가 창립되고 연변의 조선족은 민족구역 자치권리를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지리적으로 보면, 연변은 길림성 동부에 위치해 있는데, 북위 41° 59' 47"로부터 44° 30' 42", 동경 127° 27' 43"로부터 131° 18' 33" 사이에 있다. 중국과 로씨야, 조선(북한) 등 3개 나라와 린접해 있고, 동해를 마주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로씨야 빈해변강구와 접근해 있고, 남쪽으로는 두만강과 조선 함경북도, 량강도를 바라보고 있으며, 서쪽에는 흑룡강성 목단강시가 있다. 연변에는 5개의 변강현·시에 642개의 변강촌·툰이 있는데, 변경선 총길이는 755.2킬로미터, 그중 중·조변경선이 522.5킬로미터이고, 중·로변경선은 232.7킬로미터이다. 연변의 토지 총면적은 42,700평방킬로미터로서 길림성 총면적의 4분의 1을 점하고 있으며, 대만성의 1.2배, 화란(네덜란드)의 1배, 향항(홍콩)의 40배에 맞먹는다고 한다.

자연자원으로 보면, 연변은 ‘장백림해’와 국내외에서 인정해 주는 토산제품을 갖고 있다. 산천림해에는 1,460여 종의 야생경제식물이 있는데, 그중 인삼, 령지, 황기, 천마, 오미자 등 약용식물이 800여 종 있고, 송이버섯, 검정귀버섯, 원마 등 균류식물이 10여 종 있으며, 월귤, 다래, 산머루, 잣, 호두 등 식용식물과 야생과일이 가득하다. 그리고 장백산(백두산)림구에는 550여 종의 야생동물이 있는데, 그중 담비, 동북호랑이, 불범, 꽃사슴, 검정곰 등 경제동물이 250여 종 있다. 록용, 록태, 사향, 웅담, 개구리기름 등은 연변에서 나오는 진귀한 약재이다. 이 밖에 연변 특산인 사과배는 과일이 크고 껍질이 얇고 물이 많고 달콤하며 보관하기 쉬워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며, 연변에서 많이 나는 담배는 그 색갈이 곱고 향기로워 중국에서 유명한 ‘운남담배’와 비길 수 있다. 연변의 땅 밑에는 85가지 광물질이 매장되어 있는데, 그중 이미 밝혀낸 것이 55종에 달하고, 개발 리용할 수 있는 것이 39종에 달한다. 2003년 기재에 따르면, 연변의 철광석 매장량은 1억 77천만 톤, 석탄매장량은 8억 8천만 톤에 달한다. 그리고 연길분지에는 1억 톤 이상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고 한다.

연변에는 중국 10대 명산 중의 하나인 장백산(백두산)이 국내외 유람객들의 관광명소로 손꼽히고 있으며, 장백산자연풍경유람구, 연길민속유람구, 훈춘변경유람구 등 7개의 관광개발구가 있다.

연변은 산수풍경이 아름다운 고장으로, 봄철은 건조하고 바람이 많으며, 여름철은 무덥고 비가 많고, 가을철은 시원하고 상쾌하고, 겨울철은 추운 날씨가 지속되는 등 4계절이 분명하기로 이름난 고장이다.

인구 구성을 보면, 연변에는 주요하게 한족, 조선족, 만족, 회족, 몽골족 등 5개 민족과 21개의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2009년 말 현재 연변의 총인구는 217만 8천 명인데, 그중 한족이 130만 5천 명(59.9%), 조선족이 80만 명(36.7%), 만족이 6만 2천 명(2.9%), 회족이 6,835명(0.3%), 몽골족이 2,527명(0.1%), 기타 민족이 1,022명(0.05%)을 차지하고 있다. 한족 인구는 주로 돈화, 왕청, 안도에, 조선족 인구는 주로 룡정, 화룡, 연길에 분포되어 있다. 주의 인구밀도는 매 평방킬로미터에 51명이다.


2. 연변불교의 력사

연변불교의 력사를 말하자면 부득불 연변에 종교가 들어온 그때로부터 살펴보게 된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기독교, 천주교 등 여러 민족 종교들이 륙속 연변 조선족 거주 지역에 들어왔다. 연변의 종교는 가난한 사람들 속에 뿌리 내리기 시작하던 데로부터 점차 대중을 조직하고 대중을 교육하는 하나의 합법적인 조직으로 발전했다. 당시 연변에 있던 조선족 반일지사들은 이런 종교활동을 통해서 민족문화의 계몽교육을 활발하게 전개했고, 반일 민족독립사상을 선전했으며, 반일 민족단체를 조직해서 전 사회적인 범위 내에서 반일혁명운동을 일으켰다.

그 후 중국의 대외개방정책의 부단한 변화와 발전과 더불어 연변종교의 사회적 영향력도 갈수록 증대되는 추세를 보였다. 뿐만 아니라 이른바 민족 문제, 경외 세력의 종교적인 침투 및 다국적 종교 범죄 등이 연변 지역의 사회 안정과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중요한 요소로 되기도 했다. 그러나 존재하는 문제를 정확히 분석하고 그 해결책을 찾는다면 연변 지역에서의 종교활 동은 법적인 보호를 받으면서 연변 지역 발전에 유익한 환경을 만들어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현재 연변에 등록된 종교 조직은 30여 개다. 그중 대부분이 기독교로서 가장 활약이 크다. 최근 몇 년 이래 기독교는 연변 신자들 중 70%가 기독교 신자라고 할 만큼 빠르게 발전해 왔는바, 현재 연변주 내에 기독교 교회는 200여 개에 달한다. 이 밖에 연변에는 불교, 천주교, 도교, 이슬람교, 하느님교 등이 있다.

기독교 신자의 대부분은 연변 조선족이며, 연변에서 제일 큰 기독교 교회는 연길교회이다. 여기에 오는 신자 수는 3~4만을 헤아린다고 한다. 연변의 수부 연길시에는 연길교회 외에도 연길하남교회, 연길신풍교회, 철남교회, 하나님교회 등이 있는데, 그중 연길신풍교회, 하남교회 등에는 신자들이 500여 명 정도 된다고 한다. 현재 8개 현·시에 연길교회를 비롯해 15개의 기독교회가 있는데, 룡정시에만 6개의 기독교 교회가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기독교 3자애국운동위원회(基督教三自爱国运动委员会)’ ‘연변조선족자치주기독교협회’ 등 기독교 관련 기구도 있다.

중앙민족대학 황유복 교수가 쓴 〈조선족 종교문제 연구〉 《민족연구론문집》(1983)에는 이런 내용의 글이 있다. “1937년도에 이르러 연변에는 기독교 신자들이 3만 8천 9백여 명이 있었다. 개혁개방 이래, 종교신앙 정책이 다시 락실되면서 기독교도 다시 연변 땅에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조사에 의하면, 목전 연변 지역 기독교 신자는 3만 6천여 명, 활동 장소는 197개에 달한다.”

2008년 5월 전례 없던 사천 대지진 때 연변기독교는 길림성 기독교 조직과 함께 후원행사를 하는 등 사회공익성 활동에 주력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거의 해마다 12월 24일이 되면 수천 명을 헤아리는 조선족 신도들과 한족 신도들이 연변의 수부인 연길시 기독교회에 모여 자기들의 종교 명절인 ‘평안야’를 즐긴다. 기층교회 전도사들의 수준을 제고하기 위해 2007년 8월 1일에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기독교 량회양성중심’이 연길시에서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이날 제1기 조선족 전도사양성반도 동시에 열렸다.

력사 자료에 따르면, 연변 천주교는 1906년에 조선반도(한반도)로부터 들어왔다고 한다. 1930년대 초에는 연변 지역에 천주교 신자가 근 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현재 연변에는 천주교회가 모두 6개 있는데, 연길시에 2개, 도문시와 룡정시에 각기 1개 있다. 하지만 천주교회의 활동은 민간에 알려진 것이 별반 없으며, 그 신자 또한 얼마인지 정확하게 확인된 것이 없다. 현재 연변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천주교교무위원회(天主教教务委员会)’ ‘연변천주교애국회(延边天主教爱国会)’ 등 천주교 관련 기구가 있다.

그렇다면 연변불교의 력사는 어떠한가? 불교는 연변에서 전해 내려온 력사가 가장 길다. 그 사회적 영향도 가장 컸다. 연변 지역에 불교가 들어온 시기, 그 과정을 짚어보면, 해방 전에 연변 지역에는 아주 많은 조선족과 한족들이 살고 있었고, 거의 다 세세대대 불교신도로 살았다고 한다.

불교의 교의에 따르면, 사람은 누구에게나 본능적으로 욕망이란 게 있다. 그 욕망에 대한 추구에는 한계가 없다. 이는 자고로 인간의 삶이 고난과 시련으로 가득 찬 주요 요인이다. 또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인간을 끝없는 고해 속에 이르게 하며, 인간의 생명이 지속된다는 것은 곧 래세에 가서도 고해는 지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고해에서 해탈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수신양생하며 깨달음을 얻고 불경의 오묘한 도리를 터득하는 것이다. 소위 ‘원각(圆觉)’, 혹은 ‘원적(圆寂)’을 일컫는 것이다.

불교 및 그 교의와 수련 방식은 달랐는데, 대승불교와 소승불교, 두 가지가 있었다. 연변 지역뿐만 아니라 동북 지역 대부분이 대승불교에 속했었다. 조선족은 력사적으로 대부분 대승불교를 신앙했다.

연변 지역에 불교가 전해져 들어온 과정을 보면, 2가지 경로가 있다. 하나는 중국 내지에서 전해오던 대승불교가 그대로 전해져 온 것으로 신도들은 거의 다 한족이었다. 다른 하나는 조선반도에서 넘어온 것으로 신도 대부분이 조선에서 이민해 온 조선족들이었다.

문헌 기재에 따르면, 연변 지역에 최초로 세워진 불교사원은 1743년(청대 건륭 8년) 조동종파(曹洞宗派) 스님이 훈춘에 세운 령보사라고 한다. 건축 면적은 250방장(方丈), 내부에 불전 3개, 관성전 3개, 동서향으로 방이 8개, 문루(门楼) 3개, 종고루(钟鼓楼) 2동이 있었다 한다. 그 당시로선 규모가 컸고 숭엄했으며 스님이 6명 있었다. 당시 이곳에 찾아오는 선남선녀들이 많았는데, 날이 갈수록 향불 피우는 사람이 늘어나 성황을 이뤘다고 한다. 청조 동치년간(同治年间, 1862~1874), 훈춘현성에선 인구의 절반 이상이 불교신도였다고 한다. 1875년(청대 광서 초년) 훈춘현성 내의 불교신도들이 갈수록 늘어나는 바람에 조사묘(祖师庙)가 신축되었는바, 그 건축 면적은 80방장, 태상신전이 3개, 산신전이 3개, 동서로 방 5개였다. 그 건축 구조가 특별히 정교롭고 웅위로웠으며, 2명의 스님이 정중하게 손님을 맞았으며 향을 태우는 시주는 절색이었다고 하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연변대사기》의 연변불교 편 참고).

허나 봉건통치자들이 공맹지도를 숭상하고 유가사상을 추앙하고 불교를 멸시하면서 이 두 개 불교사원의 향불은 서서히 꺼져가기 시작했다. 특히 20세기 초 천주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한족 불교신도 수도 현저히 감소되었다. 민국시기(民国年间)에 이르러 중국 관내(남방 지역을 뜻함) 각지로부터 대량의 한족들이 동북 3성에 이주해 오면서 불교 활동을 하는 스님들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에 의해 각 사찰의 향불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고, 그 규모가 갈수록 거세지게 되었다. 바로 이 시기에 연길현 동불사(지금은 룡정시 관할 내에 있음) 등지의 불교 사찰도 다시 짓기 시작했고, 한족 남녀 신자들도 갈수록 많아지게 됐다.

 연변 조선족들 속에 불교가 전파된 력사 역시 유구하다. 일찍 조선(리씨 왕조) 이전부터 불교는 이미 백의민족이 신앙하는 단일종교였다. 맨 먼저 월강해서 연변에 터를 잡은 연변 조선족 농민들 중에는 불교신자들이 많았다. 허나, 20세기 초 연변에 거주했던 조선 인의지사(仁義志士) 가운데 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는 있었지만, 승려는 없었고 조선족 불교 사찰도 없었다.

1911년 3월에는 조선에서 온 승려 김본연(金本然)이 룡정촌에서 최기남의 후원을 받아서 운흥사(云兴寺)를 짓기 시작했다. 그 후 김본연이 훈춘으로 떠나가자 최기남이 그 공정을 계속 추진해서 마침내 완공했으며, 이렇게 삼존불상(三尊佛像)이 세워졌다. 운흥사의 향불이 성황을 이루던 시기엔 그 신도들만 200여 호에 달했다.

그러나 1910년 이후, 서방나라에서 온 천주교와 기독교 전도사들이 연변에 와서 선교 활동을 활발히 펼쳤는데, 이는 사실상 조선의 전통 민족종교 단체들이었다. 이들이 애국지사들과 손잡고 호소력이 강한 반일활동을 전개하면서 광대한 농경민들을 흡인하는 바람에 조선인 불교신도 수는 또 크게 감소되었다.

다른 한 면으로 경제상의 원인도 있었다. 그 당시 많은 농경민들의 생활이 째지게 가난했기에 사원의 스님들을 공양할 수 없었다. 1915년 조선 경상남도 동래군의 범어사(梵鱼寺) 고승 김구산(金龟山)이 연변에 와서 선교 활동을 했는데, 운흥사에서는 그를 주지스님으로 초청했으나 향불은 예전처럼 왕성하게 타오르지 않았다 한다. 단 12호의 가정만이 진정한 불교신자였다고 한다.

1920년 10월 일본 제국주의는 공공연히 연변 경내에서 비법적인 ‘경신토벌’을 강행했다. 그 당시 반일기치를 들고 민족해방전쟁에 뛰어들었던 허다한 지식인들이 불행하게 살해당하면서 적지 않은 종교단체의 책임자들은 부득불 ‘순종교’ 활동으로 전이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동시에 조선반도로부터 월강해 온 이주민들이 늘어나면서 그 속에 산간지대나 농촌을 표류하는 조선인 스님들이 점점 많아졌다. 이리하여 이 시기에 연변 각지에 새로운 불교사원들이 잇따라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1920년 7월, 조선인 고승 최승한(崔承韩)이 화룡현 월청향(지금은 도문시 관할구역임)의 룡암동(龙岩洞)에서 동으로 된 불상을 발견했다. 그 사원을 복구해서 이름을 신흥사(新兴寺)라 정했다. 1925년 4월에는 그곳에 또 다른 하나의 별원을 지었는데, 1928년 3월에 이름을 인수사(仁寿寺)라고 고쳤다. 인수사는 1928년 8월 홍수에 의해 훼손되었는데, 농민들이 주동적으로 기금을 모아서 3년 후에 다시 재건했다.

1910년대 초에 조선에서 건너온 수월(水月) 선사는 1921년 왕청현 나자구에 화엄사(華嚴寺)를 짓고 8년 동안 포교 활동을 벌였다.

1923년 연길현(지금의 룡정시) 팔도향 부암촌의 농민들은 자기들의 두 손으로 룡주사(龙珠寺)를 수건했다. 1920년부터 1923년까지 3년 동안 일본 불교단체의 정토종, 신종파의 조선인 승려들이 선후로 룡정 등지에 본원사(本愿寺), 보조사(普照寺) 및 조동종별원(曹洞宗别院) 등 여러 절들을 복건하였다. 1929년부터 1930년 사이 귀주사(归珠寺)파의 불교신도들이 역시 룡정촌에 보흥사(普兴寺)를 새로 지었고, 연길에 연명사(延明寺)를 새로 지었다.

1934년까지 연변 5개 현(당시에는 현재의 돈화시는 포함되지 않음)에 크고 작은 사원이 14개 있었고, 불교신도들은 2,400명에 달했다.

1920년대 말, 연변의 불교계에는 수화상극(水火相剋)인 두 개 파가 있었다. 즉 조선인 불교계인 귀주사(归珠寺)와 대각사가 한 개 파, 일본인 불교계의 종토종, 단종 등이 다른 한 개 파를 이루었다. 두 개 파의 승려들은 치렬하게 맞서며 자선봉사 활동을 벌였고, 더 많은 신도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총력을 기우렸다.

1920년대 초, 일본제국주의는 자기들이 세운 사원을 경영하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특히 조선인 신도들을 위한 정책을 내놓아 조선인들의 반일투지를 말살하려고 시도했다. 허나 그런 음모는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룡정, 도문, 팔도구 등 지역의 조선인 불교계의 귀주사파들이 조선인 신도들과 광범한 대중들의 두툼한 신뢰를 바탕으로 이미 연변불교계에서 절대적인 우세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31년 9·18사변(만주사변) 후, 일본인 불교단체는 불교를 광범한 대중들의 항일의지를 마취시키는 도구로 리용했다. 룡정, 도문 등지에서 이른바 ‘불교부련회’ 등 사회단체를 내오고, 그 단체들을 내세워 소위 금연운동, 금주운동을 벌리면서 사회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그때까지 렬세에 처했던 자기들의 세력을 확장하려고 했다. 그 당시 일본인 불교단체는 위만정부의 정책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조선인 불교계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대부분 신도들의 생활이 극도로 빈한했던 등등 원인으로 말미암아 지속적인 유지가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그 후 몇 년 동안 일본인들을 주축으로 한 불교 활동이 일정한 발전을 가져오게 됐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불교승려인 백룡성 스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백룡성 스님은 1930년대 또는 40년대에 룡정으로 가서 시내에 불교포교당을 짓고 종교활동을 했다. 〈백룡성 스님의 선농불교(禪農佛敎)〉(김광식, 대각사상연구부장)란 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백용성은 승려들의 자작자급(自作自給)의 실천을 1912년경부터 각오하였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아 실천치 못하였다고 회고하였다. 그러나 1926~7년부터 중국 길림성에서의 토지 매수를 통한 불교인의 자작자급(自作自給)의 실행(實行) 그리고 과농(果農)에 종사(從事)한 것이 5~6년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중국 길림성에서의 자작자급과 과농 등 2개 처에서 선농불교를 실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백룡성의 그 실행은 승려의 반농반선 생활의 효시라고 한다. 또 백룡성은 반농반선을 행하던 그 토지에 1927년 9월 교당을 설립하였는데, 그 교당은 단순한 교당이라기보다는 반농반선을 행하였던 선농당(禪農堂)이었다. 룡정 선농당 활동은 백룡성이 입적하기 직전까지 지속되다가, 백룡성의 대각교가 일제의 탄압으로 곤란을 겪던 1937년 초부터는 범어사가 선농당의 재산을 관리하는 상태로 전환되었다고 한다.

연변불교는 이처럼 흥망을 반복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해왔다.

1944년 10월, 돈화를 제외한 연변의 5개 현에는 불교사찰이 37곳이 있었고, 신도는 11,796명, 그중 한족 사찰이 17곳에 신도가 7,218명, 조선인 사찰은 20곳에 신도는 4,578명(일본인 사찰은 아직 통계된 것이 없다)이었다 한다.

1946년 3월 연길시의 조선인 스님 김천해(金千海)가 31개 조선인 불교사원을 대표해서 ‘동북연변대한불교협회(东北延边大韩佛教协会)’를 설립했다. 그는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했다. 당시 연길 지역에 있던 31개 조선인 불교사원에는 신도 968명이 있었다 한다.

토지개혁 운동이 연변에서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가난한 농민들과 시내의 많은 빈곤층이 ‘운동’이란 이 기회를 계기로 불교사원을 짓부수고 민분이 큰 승려들을 쫓아내 각자 집으로 돌아가 농사일에 전념하게 했고, 부분적으로 로동능력을 상실했거나 무의무탁한 늙은 스님 몇몇만 사원에 남아서 여생을 보내게 됐다. 그 후 1954년까지 훈춘현의 정수암(静水庵), 안도현의 태안사(泰安寺), 돈화시의 정각사(正觉寺), 화룡현 두도구 등지에서는 여전히 향을 피우고 례배를 드렸다고 한다. 그중 안도현의 태안사는 봉건미신 활동을 벌인다는 미명하에 시주와 향객이 당지 정부로부터 엄격한 단속을 받았다. 그러다가 1966년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연변 각지의 불교활동은 전면 정체되는 국면을 맞는다.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 이후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는 종교신앙 자유정책을 다시 회복시켰다. 청진사(清真寺), 교회 등 종교활동 장소를 개방했고, 종교활동을 회복시켰으며, 교직인원들의 명예를 회복시켰고, 각종 종교활동이 정규적으로 진행하도록 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원인으로 지난 세월 휘황한 력사를 자랑해 오던 불교는 자기가 응당 가져야 할 위치를 되찾지 못했고, 사회 불안정을 키우는 잠재요소로 오인받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부 지역에서는 불교패쪽을 걸고 공공연하게 봉건미신 활동을 벌였고, 비법적으로 만들어진 불상으로 신도들의 돈을 갈취하는가 하면, 비법적으로 공덕상(功德箱)을 설치하는 등의 현상이 적잖게 존재했다. 심지어 몇몇 개별적인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불교라는 무기를 리용해 내부 갈등을 초래했고,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선동해 무리하게 정부에 신소장을 올리는 등 일련의 사건들을 발생시키기도 했다.

1985년 훈춘현 인민정부에서는 정수암(静水庵)을 복구했는데, 복구 당시 그곳엔 단 비구니 1명뿐이었다. 그 비구니가 입적한 후 계승할 사람이 없어 정수암의 수명은 거기서 막을 내렸다.


3. 연변불교의 현황

력사적으로 볼 때 연변 일대는 지금까지 불교 신앙의 전통이 남아 있는 고장이다. 비록 ‘동란’을 거치면서 불교사원이 전부 훼멸되긴 했지만, 연변 땅에서 불교는 분명 흥행한 적이 있었다. 연변에 거주하고 있는 주요 민족은 한족과 조선족이다. 한족과 조선족, 이 두 민족 구성원 가운데는 적지 않은 불교신자들이 남아 있다. 현재 연변 조선족 가운데 출가한 스님은 근 1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변 지역의 불교신자들은 자발적인 거사림(居士林)을 통해 종교활동을 했었다. 하여 많은 불교신자들은 연변 땅에서 합법적인 종교활동 장소를 가지고 정상적인 종교생활을 할 수 있길 간절히 바랐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연변불교는 중국불교협회의 고도의 중시를 불러일으켰다. 이미 작고한 전국정협 부주석이며 중국불교협회 회장인 조박초(赵朴初) 선생은 연변의 불교 사업에 깊은 관심을 돌렸다. 그는 몇 차례에 걸쳐 협회 비서장 등 고승들을 연변에 보내 조사 연구를 하게 했고, 연변을 위해 스님과 거사를 양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직접적인 관심과 배려로 돈화시에 정각사(正觉寺)가 세워졌다. 개혁개방 후 연변자치주에 처음으로 세워진 불교사찰이 바로 이 정각사이다.
연변의 대표적인 불교사찰을 간단히 소개해 보겠다.

1) 돈화시의 정각사(正觉寺)

연변의 서부에 자리 잡고 있는 돈화시는 북쪽으로는 흑룡강성 목단강시와 린접하여 있고, 서쪽으로는 길림시와 이웃하고 있다. 돈화시는 길림성에서 지역면적이 가장 큰 현급 도시로서 면적이 1만 1,957평방킬로미터이고, 48만 명의 인구를 갖고 있는바 예로부터 ‘천년도읍, 백년현’이라 불리어 왔다. 돈화시는 정각사의 존재로 하여 국내외에 더 널리 알려진 도시이기도 하다.

정각사는 청나라 말기에 생긴 불교사원이다. 원래 돈화시(오동고성) 내에 있었다. 현재의 건축물은 1992년에 새로 재건된 것으로 돈화 시내에서 남쪽으로 4킬로미터 떨어진 륙정산(六顶山)에 위치해 있다. 1992년에 시공을 시작해서 1994년에 1,200평방미터에 달하는 건축 면적의 대웅보전(大雄宝殿)이 완공됐다. 정각사는 부지 면적이 11만 5천여 평방미터, 건축 면적이 2만 4천여 평방미터에 달하는 장엄하고 화려한 불교사찰이다. 정각사는 전당(殿堂), 불연용지(佛诞用地), 생활과 탑림(塔林) 등 구역으로 나뉘는데, 전당구에는 산문전(山门殿), 천왕문전, 대웅보전, 관음전, 장경루 등 웅위로운 건물이 있다. 또한 종루, 라한룡루장(罗汉龙楼墙)과 배전(配殿) 등이 있다.

정각사는 매우 특색 있게 지어진 불교사원이다. 전체 건축물이 국내 유명한 장인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국내 각지의 귀중한 자료들이 사용됐으며, 고대 건축예술과 당대 선진적인 건축예술을 집대성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중국 동북 지역에서 가장 큰 불교사원이며, 1990년대 중국에서 세운 비교적 큰 사원 중 하나이다. 1994년 9월 10일에 대웅보전의 준공과 더불어 국내외 손님들을 정식으로 맞고 있는,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관광명소이다.

2) 훈춘시 령보사(灵宝寺)

현재 연변에 제대로 된 불교사원은 단 2곳뿐인데, 돈화시의 정각사와 더불어 훈춘시의 영보사가 그 하나다. 훈춘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중국, 조선(북한), 로씨야 3국 변경선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로서 면적이 5,120평방킬로미터이고, 인구는 25만 명이며, 그중 조선족 인구가 46.9%를 차지한다.

력사 기록에 의하면 령보사는 원래 이름이 서대묘(西大庙)로서 1714년(康熙 53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이 사원은 부지 면적이 2,000여 평방미터인데 1958년에 훼손됐다가 2001년에 훈춘시 북산여유문화성(北山旅游文化城)의 한 개 항목으로 선정되면서 이 여유문화성의 핵심 구역에 마침내 복구되기 시작했다. 북산여유문화성의 부지 면적은 5만 7천여 평방미터, 총 투자가 6,000만 원(인민폐)에 달했다.

2006년 7월 9일 문을 연 령보사는 300년의 력사를 가진 동북아 금삼각주의 명물로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령보사의 부지 면적은 9만 평방미터이다.

3) 연길시의 대각사(大觉寺)

정각사, 령보사뿐만 아니라 최근 몇 년래 연변 8개 현, 시에서 불교사업이 속도를 내며 본격화되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인 연길시에는 제대로 된 불교사원이 없었는데, 연길시 정부는 최근 대각사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이미 터를 닦고 시공에 들어갔다. 연길시 동북쪽 교외에 있는 병풍촌에 건설되는 대각사는 연길시에 건설되는 첫 번째 불교 사원이다. 대각사는 1900년대 초에 활동한 일제하 조선의 고승 수월(水月) 선사의 도량이었다. 대각사추진위원회 법인대표인 신옥(申玉) 거사의 소개에 따르면 대각사의 건설은 광범한 불교신자들의 다년래의 숙원이라 한다. 대각사는 래년쯤 완공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직 그 상세한 규모가 정식으로 일반에 공개돼 있지 않다.

4) 도문시의 화엄사(华严寺)

도문시는 2010년 7월 화엄사를 완공했다. 이 사찰은 도문−룡정 국도변에 있는 일광산에 위치해 있다. 입구는 도문시 양로단 부근에 있는데, 도문 시내에서 약 300미터 떨어져 있고, 출구는 도문시 월청진 간평촌(月晴镇 间坪村)에 있다. 산문, 일주문, 천왕전, 대웅보전, 관음전, 종각, 북각 등이 이 사찰의 주요 건축물이다. 이 밖에 련화못(莲花池), 령골당(灵骨堂), 중의의료보건중심(中医医疗保健中心) 등 불교문화 구역도 조성된다. 건축은 길림성 종교국의 비준을 받아 2008년 6월부터 시공에 착수했었다.

도문시는 2009년 10월 26일(음력 9월 9일 중양절)에 ‘일광산 화엄사(수월정사) 옛터 복구 정초식(日光山华严寺大雄宝殿开光仪式)’을 개최했다. 이날 정초식에서 화룡시정부 관계자는 화엄사가 가지는 의미를 이렇게 피력했다. “화엄사 옛터 복구, 이는 국가 종교정책이 구체적으로 체현되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또한 불교계와 많은 불교신도들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짐으로써 불교문화를 전수하고 종교지간의 단합을 도모하고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화엄사의 재건은 단순히 불교사찰이 선다는 의미를 넘어서, 이는 불교문화와 여행산업 개발이 조화롭게 발전할 수 있는, 우리 시 문화여행 중점항목이기도 하다.”

이 밖에 안도현의 태안사(泰安寺)가 올해 완공 예정이고, 돈화시의 정토사, 룡정시의 룡주사(龙珠寺), 훈춘시의 정수암(静水庵) 등이 이미 정부의 해당 부문의 허가를 받고 시공 중이다. 왕청현 라자구에서도 수월(水月) 스님의 고적을 회복하고 있다. 연변 사람들은 ‘수월’을 ‘물이 있는 곳에서 달을 볼 수 있다’는 뜻, 즉 ‘백성이 있는 곳엔 수월 스님(그림자)이 있다’는 뜻으로 리해하고 있다. 100여 년 전 ‘송림산’이라고 수월 스님이 직접 이름을 썼던 그 바위, 바로 그 밑에 옛터를 복구하고 그 주변에 현대화 시설을 앉히는 작업이 현재 진행 중에 있다.

인구 200여 만 정도의 연변에 이미 완공됐거나 시공을 시작한 절이 8개나 있다는 건 연변불교의 밝은 미래를 증언해 준다.

연길시에는 신흥불당(新兴佛堂)등 17개 불교 장소가 이미 법적등록을 마친 상태다.

2007년 11월 27일 연변에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불교협회가 설립됐다. 불교협회의 설립은 연변불교발전사의 공백을 메웠으며, 연변 지역 불교활동의 규범화 발전을 추동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다. 설립대회에서는 협회 장정을 통과시키고 협회 종지를 확립했다. 현재 불교협회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종교국의 지도하에 장정에 따라 사업을 추진하며 사회단체 등기관리기관의 지도와 감독 관리를 받게 받고 있다(〈延边新闻网〉 2007. 11. 28).

그렇다면 현재 연변에는 불교신자가 얼마나 될까? 불교는 중국에서 가장 큰 종교 중 하나로 지난 2천여 년래 줄곧 사람들의 생활과 삶에 깊이 관여돼 있었다. 21세기의 오늘, 어젯날의 불교신자들은 의연히 건재해 있으며, 젊은이들의 불교에 대한 관심도도 갈수록 높아지는 추세이다. 2005년 12월 25일 길림성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올린 인터넷 자료에 따르면 길림성에 있는 불교사원은 105개, 성내의 승려는 1,253명, 그중 비구는 311명, 비구니는 942명이라고 한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현재 연변에는 이미 등록한 불교신자들만 해도 12,000여 명이다. 시간이 갈수록 신앙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당의 종교정책도 서서히 완선화되기 때문에 앞으로 연변불교의 사업 역시 발전 전망이 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상기한 내용이 말해 주다시피 연변에서의 종교활동은 기독교, 불교를 중심으로 비교적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거기엔 정부의 직접적인 관여와 인도가 우선시되고 있다. 2010년 2월 1일, 연길시에서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종교계 신춘좌담회가 열렸다.

이날 모임에는 불교, 도교, 기독교, 이슬람교, 천주교 등 5대 종교의 대표가 참가했고, 연변조선족자치주 부주장인 민광도와 주 민족사무위원회, 주 통전부, 주 안전국, 주 공안국 등 정부 부문의 령도분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부주장인 민광도가 연변 지역의 종교계와 신자들에게 명절 위문을 하면서 “연변 지역의 정치적인 안정과 민족 간의 상호단결, 조화로운 사회구축, 경제적인 발전, 이 모든 것은 주위와 주정부의 령도하에 연변 각 종교계 인사들과 신자들이 공동으로 노력한 결과”라고 그 로고를 충분히 긍정하면서 새해에도 여러 종교 간의 조화로운 발전을 촉구하고, 연변 지역의 조화로운 사회 발전을 위해 다 같이 힘을 내자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는 주위와 주정부가 연변 종교계 및 그 신자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임을 다시 한 번 립증했다. 이날 각 종교계 대표들도 과거를 총화하고 미래를 전망하면서 정부가 종교계에 대한 일관적인 지지와 격려에 감사를 드렸다. 도교계 대표 류종명(刘宗明) 도장은 이날 연변 종교계를 대표해서 발언했다. 그는 “조화로운 사회구축은 천백 년래 인류가 공동으로 추구해 온 리상이며 국가의 ‘장길도(长吉图) 전략’은 연변 인민들에겐 전례 없는 좋은 기회이다. 이 기회를 잘 틀어쥐고 신자들에게 애국애교의 우수한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며, 연변을 사랑하는 열정을 연변의 지역경제 발전에 투입시킴으로써 연변경제 발전에 또 다른 새로운 활력을 가져오는 것은 우리 종교계 모든 사람들의 저버릴 수 없는 책임”이라고 말했다.

〈중국민족보〉(2005년 1월 14일판)에서도 ‘연변의 종교활동 현황’이라는 표제로 이런 기사를 내보냈다. “최근 5년래 연변 주 당위, 주 정부에서는 국가에서 제정한 ‘종교사무조례’에 따라 종교사업관리모식을 개선하여 일정한 성과를 올렸다. ‘종교사무조례’ 학습반과 강좌 등을 50여 차 조직했고, 연변주 종교활동 장소의 책임자들이 4,500여 인차 강습에 참가하였다. 조선어, 한문으로 된 ‘종교사무조례’ 2만여 부를 찍어서 나눠줌으로써 대중들이 종교법률 법규 지식을 제대로 깊이 있게 리해하도록 했고, 동시에 종교 법률법규 자문봉사 등 선전 활동도 벌였다. 연변 8개 현, 시의 종교사업 부문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습반을 45차 조직했는데 그 참가 수가 무려 4,000여 인차에 달했다. 이런 강습반을 통해 집법일군들의 행정관리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또한 정부는 선후로 종교활동 장소 33곳을 정식으로 비준함으로써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대형 종교활동에 대한 관리를 엄격히 했는데 훈춘 령보사 개광활동, 돈화 정각사 대불정초식, 안도현 명월 불당 개광활동 등 수만, 수천 명이 참가하는 대형 활동이 순조롭게 진척되도록 정부 차원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동시에 비법적인 종교활동 장소에 대해서는 교육하거나 합병, 혹은 해체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종합적으로 다스린다. 최근 몇 년래, 연변에서 비법 종교활동 장소로 처분 받은 곳은 60여 곳, 정부의 엄격한 통제로 제 마음대로 종교활동하는 곳은 이제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있다. 연변 내 외국인 종교활동 문제에 대해서도 법으로 다스린다. 상급 유관 부문의 비준을 거쳐 연변에 외국인 임시 종교활동 장소 2곳을 지정함으로써 외국인들의 종교활동을 규범화하고 있다. 근년래 연변에서 법적으로 처리한 경외종교 침입 안건은 20여 건에 달하지만 현재 연변종교영력은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정부는 종교계가 ‘조화로운 신연변’ 건설에 동조할 것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이에 뜻을 모아 연변 종교계는 해마다 빈곤호를 돕는 활동, 양로원 위문행사, 빈곤층 학생 돕기 등 사회공익활동을 통해 부유하고 문명한, 조화로운 신연변 건설에 공헌함으로써 사회적인 긍정을 받고 있다.


4. 연변불교의 전망

최근 연변민족사무위원회 불교 관계자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연변에서 불교의 전망은 가장 밝다고 한다. 현재 가장 빠른 속도로 발전되고 있는 종교가 바로 불교이다. 사실 연변에서 기독교가 1982년부터 정부의 중시와 관심을 받은 데 비하면 불교는 많이 뒤처진 2003년부터 중시 받았으나, 이제는 불교 사업을 정부 차원에서 틀어쥐는 데 이르렀다. 연변에서 불교가 타 종교인 기독교나 천주교보다 늦게 중시 받게 된 이유가 뭘까? 그것도 기독교보다는 근 20여 년이나 늦게 정책 락실 받게 된 이유는 2가지이다.

원인 1. 문화대혁명 동란이 그 원인이다. 10년 동란을 거친 후 연변에는 스님들이 남아 있지 못했다. 죽거나 피난 갔거나 둘 중 하나였다. 절도 다 없어지고 스님도 없는 그 당시의 상태를 사람들은 ‘불교 씨앗이 말라버렸다’는 말로 표현한다. 하지만 같은 동란을 겪었음에도 연변에 기독교의 장로들은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있었기에 종교활동은 계속 유지될 수 있었지만 여러 가지 사회규제를 받았기에 내놓고 공개적인 활동은 할 수 없었고 종교활동의 자유가 없었다. 그래도 그 ‘씨앗’이 남아 오늘의 연변 기독교의 맥을 끈질기게 이어온 것이다.

원인 2. 연변에 불교 인재가 없었다는 게 큰 원인이다. 원래 있던 스님들이 다 죽거나 피난 가고 거기에 절까지 없어지자 타 지방에서 스님들이 모여들지 못했다. 당시를 반영하는 이런 설도 있다. 당시 멀리서 스님들이 연변을 찾아왔다가 다들 떠나갔다 한다. 절이 없으니 스님이 머무를 곳이 없었던 것이다. 스님이 없는데 절이 있겠는가?  연변불교는 그 후 연변에선 거의 접하지 못하는 종교로 되었다. 연변 사람들은 불교가 뭔지 모르고 살았던 세월이 참 길었다.

이런 상황을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 연변력사연구소 연구원 조선족력사학자 리함 선생은 2005년 여름 종덕사 유적지를 찾아보고 나서 〈종덕사는 울고 있다〉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종덕사 사찰 옛터는 천지물이 천하 따라 흘러나오는 천지 동북쪽 절벽 위 평평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삼면이 절벽이라 절벽을 피해 서쪽 면 바위돌밭을 거슬러 오르느라 무척 힘들었다. ……절벽가를 에돌아 다시 기슭을 내리니 우리 눈앞에는 희한한 정경이 펼쳐졌다. 풀들이 무성한 주위에 비해 종덕사 중심자리는 누가 베어낸 듯 말끔히 가시여져 그제날의 륜곽이 확연히 알리는데 몇 개의 사찰 주춧돌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질 않겠는가. 백두의 화산돌로 된 두개의 검은 주춧돌 측면에 각기 한자로 새겨진 ‘천하(天河)’ ‘허×귀(许×魁)’ ‘팔괘(八卦)’란 글이 세차게 마음을 사로잡았다. 한어문으로 된 ‘안도현 문물지’에서 팔괘묘 주요 건축자가 ‘조주귀’라 하더니 번자체로 된 복판 글자가 ‘주’ 자 같았다. 중심주 추돌에 허주귀라고 새겨진 것을 보아 그저 두루 지나칠 일이 아니었다. 두 주춧돌의 글자가 주는 계시가 컸다. 그때에야 주위를 일별하니 사찰 터 동쪽가 낭떠러지 바위 수직가와 평평하고 넓은 바윗돌에는 온통 한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조선 글씨도 가끔 보였는데 허구한 날 부대껴 온 글씨들에는 이끼가 끼고 굳어진 먼지로 하여 글자들을 쉽게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황순(黄顺)’ ‘주(朱)’, 조선글로 된 ‘리송춘’ 등 글자는 선명하게 안겨들어 인상적이었다. 말 그대로 종덕사 옛터와 그 주위는 온통 바위글자 세계였다. ……서남쪽 풀밭에 무너지고 흩어진 2미터 안팎의 바자널들이 가득하였다. 거개가 타서 그을고 썩기 시작한 지저분한 상태였다. 정말이지 그 시각의 나는 불시로 심장이 뚝 멎는 기분이었다. 나에게는 마치도 울 밖에서 울고 있는 우리의 애들로 보이고. 그래, 종덕사가 울고 있었다.

이는 현재 연변 학자들도 연변 종교에 대한 연구에 동참하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1980년대 초에 이르러 연변에 기독교가 제 모습을 드러내면서 연변 사람들은 “기독교는 뭐고, 불교는 또 뭔가?” 하면서 차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허나 그 당시까지만 해도 연변불교는 인정받지 못한 종교로 감히 불교의 ‘불’ 자도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규제를 받았었다.

2003년부터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에서는 불교사업을 본격적으로 틀어쥐기 시작했고, 2007년 연변에 정식으로 ‘연변불교협회’가 설립됐다. 이 협회의 설립은 연변 력사상 처음으로 불교를 대중에게 알리는 계기가 됐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는 2008년에 연변에 법당 14개를 정식으로 등기했고, 작년에 법당 3개를 등록하는 등 발빠른 행보를 보였다. 현재 연변에 있는 법당은 모두 17개이다.

연변 지역에 8개나 되는 절이 선다는 건 연변사람들에겐 색다른 환경이요, 어느 정도 충격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그만큼 불교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이다. 허지만 이런 대중의 실상황과는 무관하게 연변불교 사업은 발 빠른 진척과 활약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이미 단계성 변화를 거쳐 착착 순조롭게 진행 중에 있다. 종교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사람들이 이제 불교를 리해하고 불교에 관심을 가질 날은 그리 머지않아 보인다. 허나 이 모든 건 정부 차원에서 이뤄지는 일이기에 개개인의 개별적인 종교활동은 앞으로도 엄하게 단속된다고 한다. 외국에서 온 스님이 연변에서 불교 활동을 한다고 해도 정부의 유관 규정에 쫓아야 한다는 게 정부 관련자의 말이다.

연변에서 불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활동은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 민족사무위원회의 령도를 받는다.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 민족사무위원회 종교처는 최근 몇 년래 국가 유관정책에 따라 불교사업을 적극 추진해 왔다. 절을 짓거나 고적 복구를 다그치는 등 일련의 사업을 중점적으로 비중 있게 추진 중에 있다. 최근 몇 년래 연변불교 사업은 연변 8개 현, 시에서 비교적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전면적으로 가동되고 있으며, 연변주정부의 중요한 사업의 하나로 주목받고 있다.

현재 연변에서 불교는 흔히 가정 형식 위주로 활동이 진행되고 있다. 기독교처럼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고 활동하는 게 아니라 법회 형식으로 불교의 명절 때나 특수한 모임 때만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돈화의 정각사의 경우를 보면, 한 번 법회 때면 한 번에 1만 2천 명 정도 모인다고 하는데, 사실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행사에 모인다.

최근 몇 년래 급물살을 타고 있는 연변불교, 그 시작은 타 종교보다 훨씬 뒤처졌지만 이제 연변에 많은 절이 생겨나고 그것이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는 사업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연변 사람들의 불교에 대해 시선은 확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아직 불교는 대부분 연변 사람들에게는 다소 생소하고 낯설다. 연변의 수부 연길시에 아직 돈화시의 정각사 같은 큰 절이 없기 때문에 연변 사람들, 특히 연변 조선족들은 불교에 대해 잘 모르고 그런 절이 어디 어디에 있다는 정도로만 불교를 리해할 뿐이다. 허나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연길 시정부에서는 각 유관 부문과 협력하에 연길시 공원가 뒤에 있는, 이란진 태암촌 병풍산에 이미 터를 닦았다. 대각사 공정은 올 8월에 가동될 예정이다.

연길시에 대각사 같은 규모가 큰 절이 생겨나고 거기서 대형 법회행사가 치뤄질 때면 상황이 많이 달라질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TV로만 봤던 불교행사들, 최근 돈화시 정각사의 법회 때에 봤던 장면들이 아직은 연변 대중들에겐 너무 신기하기만 하다. 그만큼 못 보던 장면을 신기해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일개 구경꾼으로부터 진정한 신자로 되는 건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말하자면 연변불교가 가야 할 길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현재 정부 차원에서도 이 방면의 인재를 양성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불교를 제대로 전수할 수 있는 인재가 연변불교 발전을 이끌어 갈 시대는 그리 멀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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