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과의 인연오현 큰스님과 나와의 인연은 1995년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마을 이장을 맡고 있었던 나는 외딴 지역에 사는 5가구의 진입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백담사를 방문하여 처음으로 큰스님을 찾아뵈었다. 마을 바로 앞의 토지가 백담사 땅이었기 때문이다.사찰 직원을 따라 스님 방에 들어가 인사를 올리고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묻지도 않으시며 &ldq
바다를 뒤집고 산을 거꾸러뜨릴 기량2007년 한 일간지가 오현 스님과의 대담기사를 실었다. 신문에는 오현 스님이 자신의 시집을 설명하는 모습의 사진도 실렸는데, 한 손에는 담배가, 다른 한 손에는 라이터가 들려 있었다. 나는 기사 속 오현 스님의 사진을 보고서 옛일이 떠올라서 절로 웃음이 났다.오현 스님은 내 은사이신 영허당 녹원 대종사와 인연이 깊었다.
지난 한 달 사이에 큰스님이 세 번 꿈에 나오셨다. 한 번은 마치 작은 불상처럼 어둠 속 멀리 꼼짝 않고 서 계셨다. 엄지손가락만 하게 보였으니 어떤 표정을 짓고 계셨는지 알 수 없다. 또 한 번은 좀 더 가까이 계셨다. 고개를 숙이고 계셨고 사뭇 엄숙해 보이셨다. 나머지 한 번은 한 일주일 전이다. 모로 누워 계셨는데 어깨가 몹시 아프신 듯했다. 두어 번
‘수처작주(隨處作主)’. 내 사무실 정면에 걸려 있는 액자의 글이다. 임제 선사의 말씀으로, 국전 서예 부문 심사위원장을 지낸 청남 오제봉 선생이 쓴 글씨다. 25년 전 강원도 설악산에서 무산 스님이 나에게 주셨는데, 그때부터 수처작주는 나의 좌우명이 되었다. ‘어디 가나 주인이 되어라.’ 나는 모든 일에 주인 의
우리 문중의 자랑이자 한국불교가 낳은 큰 선지식 설악무산 사형님과의 만남은 1977년도 9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은사스님께서 열반에 드시어 문도 중에 연장자인 사형 오현 스님을 신흥사 주지로 모시게 되었고, 내가 총무 소임을 맡았다. 우리는 주지와 총무로 이 년 반 정도 동고동락했다. 넉넉지 않은 절 살림을 꾸리다 보니 힘든 일도 있었지만, 사형님과 함께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일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변호인〉 덕분에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게 된 책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 럽� 공안당국의 주장처럼 용공 서적이라기보다 인문학 도서로서, 그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역사란 대중들이 줄지어 앞으로 나아가는 대열과 같고 역사학자 역시 그 대열의 뒷부분 어딘가에서 앞사람들을
2015년 2월 8일은 미천철우(彌天哲宇) 목정배(睦禎培, 1937~2014)의 열반 1주기였다. 유족들과 대한불교법사회 가족, 선후배들이 약수법사(藥水法寺)에서 그의 덕화를 기렸다. 미천은 《범망경보살계본휘해》와 《붓 가장자리에 마른 글》로 우리 곁에 다시 왔다. 필자도 그의 법사리를 친견하면서 삼배를 올렸다.이 글을 청탁받을 때, 필자는 망설였다. 그냥
2018년 10월 26일, 83세를 일기로 일관(一觀) 박완일(朴完一, 1935~2018) 법사가 별세했다. 박완일의 별세 소식을 전하면서 불교계 언론은 고인 이름 앞에 ‘부루나 존자’라는 별호를 썼다. ‘부루나 존자’라는 별호에서 알 수 있듯 박완일 법사는 설법을 제일 잘하는 재가불자로 알려졌다.박완일 법사가 자
1. 이기영의 생애불연(不然) 이기영(李箕永)은 1960년대 이후 현대 한국불교에서 불교학 연구와 재가불교의 흥기 및 발전에 크게 기여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에 그의 생애를 간략히 소개하고 그가 추구한 이상적 불교와 구체적 신행 활동을 조명하고자 한다. 이기영은 일제강점기인 1922년 2월 20일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났다. 1941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불광(佛光)을 온 누리에 비춘 대원 장경호 거사‘이 땅의 유마(維摩)’라 불린 ‘대원(大圓) 장경호(張敬浩, 1899~ 1975)’ 거사는, 1975년 4월 열반이 가까워짐을 알고 삶의 마무리를 시작한다. 제일 먼저, 스웨덴 대사로 근무 중인 어느 누구보다 불심이 깊은 둘째 아들 상문(相文)을 찾아 간곡히 일렀다.
이한상의 불교적 삶을 되돌아보며‐평전을 위한 첫걸음한 사람의 인생을 추억하고 회상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그 사람의 행적을 두고서 잘잘못을 논하는 평가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사람이든 그가 속한 사회의 분위기와 관습 아래 다른 사람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갔던 것이기에 그 시대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없고서는 그의 공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
1. 서언불교혁신과 불교정화는 한국 근현대 불교를 이해하는 중요한 화두의 하나이다. 지난 100년간 불교혁신과 불교정화 운동이 여러 형태로 전개되고 이를 둘러싼 논란 역시 다양하게 노정되었다. 이런 흐름은 시대의 상황에 따라 한국 근현대 불교사를 추동하는 원동력으로, 때론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때문에 불교개혁 분야에 대한 연구는 적지 않게 축적되었다고
1. 거사가 온 뜻을 새기며 내 동쪽 나라에 왔거니세월은 흘러 몇 해런고그 윗대 일은 알아서 무엇하리속명만은 벽오동일러라 백봉 김기추(白峰 金基秋, 1908~1985) 거사의 선시집 《벽오동》의 첫 시이다.이 시를 읽으면서 새삼 백봉 김기추 거사가 다녀간 자취를 되새겨보게 된다. 그가 다녀간 세월이 몇 해이런가? 그리고 그가 다녀가고 남은 자취는 또 무엇인
1. 들어가는 말 1919년 3월 1일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한 이래 100년의 시간이 지났다. 불교계는 이 민족 독립운동에 참여함으로써 불교의 민족적 특성과 함께 그 종교적 토대를 되돌아볼 계기를 맞게 되었다. 문화의 본질적 요소로서 종교와 철학은 그 현재를 살아가는 민중의 역사적이며 실존적인 경험 지평에 자리한다. 종교가 이 경험지평을 초월적으로 성찰하
1. 서론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서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인 3 · 1운동은 다양한 방면에서 의미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의미 가운데 하나는 종교사적 의미이다. 비록 여러 면에서 한계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3 · 1운동은 민족지도자 33인에 의해서 출발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인데, 이들 33인은 모두 종교지도자들이다.
머리말 올해는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에서 3 · 1운동이 차지하는 비중과 위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3 · 1운동을 기점으로 독립운동의 양상은 질적 · 양적으로 크게 변화했다. 무엇보다 독립운동의 역량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1918년 10월 7일 제주도 서귀포시 도순리 법정사 승려들이 서귀포 일대의 마을 주민 700여 명을 이끌고 일본인을 축출하여 국권을 회복하고 불교를 포교하겠다며 일으켰던 제주도 내 최대 규모의 무장 항일운동이다. 3 · 1운동보다 한 해 먼저 일어난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김연일 등 법정사 승려들이 주도하였다. 법정사
- 백용성, 한용운, 백초월, 김성숙을 중심으로 1. 들어가는 말 올해로 100주년을 맞이하는 3 · 1운동은 그 자체가 종교계와 학생들의 전폭적인 협력 아래 이루어진 거사였기 때문에, 종교계에서의 3 · 1운동에 대한 평가 역시 일일이 언급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하지만 3 · 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불교계
1. 머리말〈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가 일반인에게 알려진 것은 1970년 지금의 〈불교신문〉 전신인 〈대한불교〉와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서였다. 〈대한불교〉는 같은 해 3월 8일 자에 “승려 3 · 1 독립투쟁사 발견”이란 제목으로 선언서를 소개했다. 그다음 호에서도 〈대한불교〉는 “대한승려연합회 독립선언서 원문
1. 서언 3 · 1운동은 한국 근대민족운동사의 정점이라는 역사적 위상을 지니고 있다. 즉 근대민족운동의 분수령이자 상징이었기에, 3 · 1운동에 관한 연구와 계승 등의 작업은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져 왔다. 특히 3 · 1운동 100주년에 즈음한 3 · 1운동의 이해와 평가는 특별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