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달진-겁외(劫外)의 도(道)가 천연히 빛나는 서정세계 최남선이나 이광수 등 우리 현대문학 초창기 문인들은 불교적 감화를 그들의 작품으로 드러내려 했다. 불교문학을 확실히 뿌리내린 한용운도 불교 교리를 시를 통해 중생에 친밀하게 펴려 했다. 그러나 그들 바로 아랫세대인 김달진 시인(1907~1989)은 감화나 교리의 구심적 차원보다는 불법의 원심적 차원에서
1. 머리말일붕(一鵬) 서경보(徐京保, 1914~1996) 박사는 한국 승려박사 1호, 세계 최다 박사학위 소유자, 세계 최다 저술가로 《기네스 월드 레코드(Guinness World Record)》(이하 《기네스북》으로 표기함)에 등재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국내 불교계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보다는 부정적 시각이 더 많았다.특히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그의 이름을 거명(擧名)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조계종을 떠나 1988년 ‘대한불교일붕선교종(大韓佛敎一鵬禪敎宗)’을 창종(創宗)했기 때문일 것이다.반면 그의
연재를 시작하며 시를 대하면 불교는 우리 민족의 심성(心性)을 흘러내리는 문화적 원형(原型)임을 실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실감을 바탕으로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불교〉는 19세기 초 최남선과 이광수 2인 문단 시대로부터 시인 2만 명에 이르는 지금 21세기까지 우리 현대시사 110년을 살펴보려 합니다. 각 시대, 시사적(詩史的)으로 한 획을 그은 시인
1. 머리글필자는 2012년 한국교육방송(EBS)에서 제작하는 〈세계테마기행〉에 출현하여 부탄을 여행한 적이 있다. 이 방송이 공중파를 타고 방영되고 나서 재미있게 잘 봤다고 제일 먼저 연락해 온 분이 미천(彌天) 목정배(睦楨培, 1937~2014) 박사였다. 필자가 처음 대학에 들어갔을 때 금강불교대학의 사무보조를 맡았다. 내가 기거하는 곳이 목정배 박사의 댁과 같은 방향이라 차를 함께 타고 귀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늦은 시간 차 안에서 자는 내 모습을 보고 한창 공부할 나이에 잡일을 시킨다고 종단에 건의하여 공부에만 전념할
* 인도철학회에서는 2014년 11월 28일, ‘한국 인도철학 50년의 회고와 전망’이라는 주제로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에 재직했던 제1세대 학자들의 업적을 고찰하고, 그 발표문을 논문으로 개정하여 《인도철학》 제42집에 게재하였다. 이 글은 필자가 여기에 게재한 논문을 《불교평론》의 기획에 부합하도록 개편하고 일부 내용(특히 서두)을 추가한 것이다. 편집자 주1. 드러냄 없이 드러난 삶향운(香雲) 정태혁(鄭泰爀)은 1922년 10월 23일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오도리에서 연일(延日) 정씨 가문의 장손으로 태어나서, 2015년 4월
1. 서론성진(性眞) 심재열(沈載烈, 1932~2012)은 재야학자로서 평생 불교학 연구에 매진한 인물이다. 그는 김범부(金凡夫) 선생의 문하에서 동양학을 공부하고, 대각회에서 활동하면서 이종익(李鐘益, 1912~1991) 선생을 만나 불교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보조사상》 5 · 6합집(이종익 박사 추모논문집)에 제자를 대표해서 추모사를 쓰기도 하였다. 그는 고려대 정치학과를 수료했고, 재야학자로서 원효사상연구소를 개설하여 연구와 포교에 헌신하였다.심재열의 생애에 관한 기록이 없어 필자는 그의 부인 이여영 여사와 인터뷰를 하였다.
1. 고봉 황성기의 생애고봉 스님(속명 황성기, 1919~1979, 이하 존칭 생략)은 1919년 11월 19일 강원도 고성군에서 부친 평해(平海) 황씨 필홍(弼弘)과 모친 성천(成川) 라씨(羅氏) 순길(順吉)의 5남 1녀 중 5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오길(五吉)이며, 가정은 염전을 생업으로 하였다. 그의 불연(佛緣)은 어린 시절 건봉사(建鳳寺)로 출가하면서부터이다.여기에서 고성공립보통학교를 다니며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을 마쳤고, 이 시기부터 자연스럽게 출가 생활과 세간 생활을 병행하게 되었으며, 보살의 서원도 싹틔우게 되
1. 눈 없는 세계와 맞닥뜨리다 저 사람은 끝났다고내게 찍힌 깊숙한 낙인서울로 부산으로 쏜살같이차들은 달리는데……한 점 바람의 무게로고속도로 위에 떠 있는나는 한 마리 하얀 나비.고익진은 1934년 김여화 보살의 4남으로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다. 1955년, 그는 전남대 의대 의예과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한 그해 가을, 고익진은 류머티스성 심내막염이라는 병으로 광주적십자 병원에 입원했다.한 병원에서 5년간 병실 속에서 보낸다는 것은 참으로 지겹고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나마 5년이라는 세월로 병이 낫는다는 보장도 없었습니
1. 생애장봉(壯峰) 김지견(金知見) 선생은 1931년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출생하였다. 어렸을 때는 전담 훈장을 통해 사서삼경을 배웠으며, 한국전쟁 당시 군에 입대하여 제대한 후 출가하였다. 김지견은 1952년 선암사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하여 1953년에 석호(石虎, 西翁 대종사의 법명)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법명은 우진(雨震)이다. 그 뒤 동산(東山) 조실이 지도하는 범어사 금어선원(金魚禪院)에서 안거를 시작하였다.이때 김지견의 학문적 재능이 발휘되었다. 예를 들어 《금강경오가해》에 나오는 글자 한 자의 차이에 대해서
예부터 우리나라에선 의료인들조차 눈길도 주지 않은 환자들이 있다. 그들은 온갖 천시와 멸시를 받으며 소록도란 작은 섬에 격리되어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빼앗겼다. 그러던 어느 날 먼 이국에서 온 두 명의 수녀가 그들을 따스하게 끌어안으며 그들이 그동안 받아온 천시와 멸시를 눈처럼 녹여주었다. 이들이 바로 마리안느 스퇴거(Marianne S
청수나눔실천회 이사장 박청수 교무는 동남아와 네팔 등지에서 ‘마더 박’으로 불린다. ‘마더 테레사 수녀’처럼 자신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도와주는 박 교무를 현지인들은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박 교무는 지금까지 전 세계 55개국에 105억 원을 모금해 전했다. 그 결과는 국내외 학교 9개, 병원 2개로 나타났다. 벌써
성관 스님이 이사장을 맡고 있는 로터스월드(Lotus World)는 불교계를 대표하는 국제구호활동 단체다. 공식적인 창립연도는 법인 등록을 완료한 2004년이지만 활동은 2002년 캄보디아 지원 사업을 하면서 국제개발 NGO에 합류했다. ‘모든 사람의 권리가 존중되고, 스스로의 잠재력을 발휘하여,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고자&
호남불교의 거목 현공묵암(玄空默庵)선사. 호남 사람들은 해박한 불교 이론가이자 적극적으로 포교 활동에 헌신한 윤주일(尹柱逸, 1895~1969, 이하 현공)을 그렇게 불렀다. 그의 자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라서 그런지 모른다. 그렇지만 육조혜능의 말을 적용하자면, 사람은 영남인과 호남인으로 나눌 수 있을지 몰라도 불성에는 어찌 영호남이 따로 있으며, 불법이 꽃피는데 경계가 어디 있겠는가. 시절인연 따라간 것이다. 단지 그의 위법망구 위공망사(爲法忘軀 爲公忘私)의 덕으로 불연(佛緣)이 더욱 깊어진 은혜를 잊지 못하기에 이 지역
1. 기상(奇想)의 질문필자는 혜안(慧眼) 서경수(徐景洙, 1925~1986) 교수(이하 존칭 생략)에 대한 평전적 글을 이미 몇 편 썼다. 그런데 필자와는 너무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이분에 관한 자료집을 모을 때(《서경수 저작집》 I, II 편) 그의 학문적 업적 이외에 그의 행위를 주목해 달라는 요청으로 서문을 썼고, 다른 두 편은 지극히 맥락적(contextual) 상황에서 썼다. 곧 한 편은 재가 불자들에 대한 활동을 부각하는 강연 원고로서 이분을 재가불자들이 본받아야 할 하나의 표본으로 삼아 썼고, 또 다른 한 편은 ‘불
1. 시작하며현강(玄岡) 김인덕(金仁德, 1935~1999) 선생은 필자의 지도교수이다. 필자가 선생을 처음 만난 건 아마 대학원에 입학하고 난 후 두 번째 학기를 맞이했을 때일 것이다. 그때 나는 선생의 화엄학 수업을 듣고 있었다. 불교한문을 처음 마주쳤기에 단순한 문장도 쉽게 넘어가지 못할 때였지만, 발표 준비를 하면서 또 선생의 《화엄경》 강의을 들으면서 새로운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다. 이 즐거움 덕분에 필자는 선생님을 지도교수로 모시게 되었다.이후 필자는 중관학 수업 시간에 경전을 읽었던 화엄학 수업 때와는 달리 논서를 읽는
전통 불교학에서 근대 불교학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불교학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한 학자들이 적지 않다. 그중에서 특별한 행로를 걸어간 학자의 한 사람이 운제(雲霽) 이영무(李英茂, 1921~ 1999)이다.인문학에서 불교학은 학문의 영역 및 성격이 광대무변하고 특수하다. 그래서 불교학을 온전하게,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학자에 이르는 길은 간단치 않다. 즉 불교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남다른 자질, 열정, 소양 등이 어우러져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영무는 불교학자가 갖추어야 할 제반 조건을 두루 갖춘 학자가 아닌가 생각된다.우선 그는 10
1. 나의 스승 김상현 교수필자가 김상현 교수님을 처음 뵌 것은 대학 3학년이던 1997년 3월이었다. 그때 교수님은 한국교원대학교에 계시다가 동국대 사학과로 부임해오셨다. 필자는 당시 늦은 나이에 복학하여 후배들과 함께 ‘한국불교사 연구회’라는 스터디를 운영하고 있었으므로 한국불교사 전공 교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에 매우 반가워했다. 당시 사학과 내에는 한국 고대사 전공 교수님이 계시고, 또 동국대 불교학과에 불교사 전공 교수가 있는데, 왜 사학과에 불교사 교수가 오느냐며 불만의 목소리도 있었다. 교수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강의하는
《불교평론》으로부터 현대 불교학자 시리즈 중 법운(法雲) 이종익(李種益, 1912~1991) 박사에 대한 집필을 의뢰받았을 때, 필자가 제일 먼저 떠올렸던 것은 보조사상 연구와 원효 연구의 개척자 중 한 분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막상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필자는 법운 이종익 박사에 대한 집필자로서는 너무나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연구 영역도 그의 활동 영역도 필자가 정리해내기에는 너무나도 방대했기 때문이다. 해서 본 글은, 그의 삶과 학문세계 전체를 탐색하여 소개한다는 생각보다는 그의 삶과 학문에 대한
1. 우정상의 생애와 학연소산(疏山) 우정상(禹貞相, 1917~1966) 선생은 동국대학교의 교수로서 해방 후 한국불교사 연구의 불모지를 개척한 1세대 학자였다. 그는 1917년 2월 6일 경상남도 사천에서 단양 우씨 덕춘(德春)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8년 사천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33년에 졸업하였고 다음 해인 1934년 통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20세가 되던 1936년에 양산 통도사에서 구암(龜巖)을 은사로 득도하였고 출가자로서 학승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38년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서 전통적 승려교육 과정인 사교과
1. 머리말국내에서 화엄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현곡(玄谷) 김잉석(金芿石)의 기념비적 저서인 《화엄학개론(華嚴學槪論)》을 읽어보았을 것이다. 이 책은 단기 4293년, 서기 1960년 3월 25일에 발행되었는데, 당시는 현대적인 의미의 불교학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기였다. 다시 말해 ‘불교학’뿐만 아니라 ‘화엄학’이란 용어조차 생소했으며, ‘불교학 연구방법론’은 물론 ‘화엄학 연구방법론’이라는 말조차 어색했던 시기였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간과한 채 오늘날의 잣대로 이 책을 평가하는 것은 무모하지만 후학으로서 반성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