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전 세계에는 다시 대공황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미국발 금융 위기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수천만 명이 파산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실업과 기아에 직면하였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욕망을 극대화하고 세계 경제를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고 가난한 자를 더욱 가난하게 하였으며 결국 자신마저 파산하였다. 노동과 자본의 자유로운 거래와 이동은
상전벽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동안은 광우병 쇠고기 문제 때문에 일어난 촛불 잔치가 인터넷을 달구고, 광화문 아스팔트 바닥을 달구었다. 한동안은 특정 종교 장로 출신의 대통령이 진두지휘하는 정부에서 막가파식으로 간단없이 터져 나오는 종교 편향 문제가 다시 산사 법당에서 광화문 아스팔트 바닥까지를 광풍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그 와중에 리먼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요즘 불교계가 많이 어수선하다. 편향, 폄훼 등과 같은 전혀 불교적이지 않은 용어들이 사찰의 현수막과 교계신문의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편향이란 한쪽으로 치우친다는 의미이고 폄훼란 깎아내려 헐뜯는다는 의미이다. 불교는 예로부터 어떠한 극단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를 지향해 왔으며, 남을 깎아내리고 헐뜯는 행동을 열 가지 그릇된 행위(惡業, akuś
출범 당시부터 이른바 ‘고·소·영’과 ‘강·부자’의 합작품이라는 비판을 들었던 이명박 정부가 불과 100여 일만에 급기야 지지율이 10%이하 대로 떨어지고 말았다. ‘고·소·영’은 이명박 대통령의 모교인 고려대와 그가 다니던 소망교
인도 불교인들은 죽음에서 벗어나고자 했는가, 아니면 삶에서 벗어나고자 했는가? 이 질문은 시카고 대학의 불교학 교수인 스티브 콜린스(Steven Collins)가 옥스퍼드 대학 박사학위 심사과정에서 외부 심사자였던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eertz, 현 프린스턴 대학 사회학 교수)로부터 받은 질문이었다. 질문은 단순하며 답도 자명해 보인다. 만약
새 정권이 들어섰다. 그 색깔과 노선에 대한 호불호(好不好)를 떠나, 앞으로 나라 살림을 책임져야 할 정권이기에 임기 동안 순항(順航)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불전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바람직한 국가운영 방안에 대해 조언해 본다. 불전에는 ‘칠불쇠법(七不衰法)’이란 가르침이 있다. ‘나라가 쇠망하지 않게 하기 위한 일곱 가지 국
이 세상에서 불교만큼 다양한 교리와 사상을 가진 종교는 없다. 화엄(華嚴)과 같은 고도한 관념철학을 전개하는 사상이 있는가 하면, 기독교적인 구원을 설명하는 정토교(淨土敎)도 있다. 현대심리학의 정교한 이론을 방불하는 유식학(唯識學), 정신적 안심입명을 추구하는 선(禪)과 같은 수행체계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교리와 사상은 너무나 복잡하다. 처음 불교를 공
불교에서는 예로부터 함께 절차탁마하며 수행하는 친구를 각별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친구를 '선지식(善知識 또는 善友)' 또는 ‘도반(道伴)’이라고 부른다. 선지식은 ‘좋은 벗’이라는 뜻이고 도반은 '함께 구도의 길을 가는 동무'라는 뜻이다. 불교에서 이렇게 친구를 멋진 표현으로 부르면서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은
올해로 봉암사 결사 60주년을 맞는다. 교계 내외 언론들은 봉암사 결사의 역사적 의미를 다양한 기획 특집으로 소개하고 있다. 조계종에서도 올해 20대 핵심사업의 하나로 ‘봉암사 결사 60주년 사업’을 선정하였다. 봉암사 결사는 한국 근현대 불교사 기술에 있어 그 이전과 이후를 구분할 만큼 한국불교의 역사적 전기를 이루는 사건으로 평가된
가정형편으로 자식을 친척집에 맡겼다. 그러나 그 친척마저 어렵게 되자 그 자식을 다시 다른 데로 보내게 되었다. 고아원에 맡길까, 아니면 또 다시 친척의 친척 집으로 보낼까 망설이고 있었다. 이 소식을 알게 된 자식의 어미는 같이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키우겠다며 다시 자식을 찾아 갔다.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가 아니다.
우리에게 2002년 월드컵 이후 응원은 단순히 응원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물론 한국에서 학교 스포츠가 시작된 이후 집단적 응원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고, 그 가운데 고려대와 연세대의 정기전에서의 응원은 다채로운 소재와 함께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문화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 응원이 양교만
다원성은 현대사회의 특징이다. 다양한 문화, 종교, 가치관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하나의 객관적 척도나 기준을 설정한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객관’이란 관점 자체가 일종의 ‘폭력’일 수 있다. 동서를 막론하고 전통사회에서는 하나의 주류 종교가 있었다. 주류 종교는 그 자체로 사회 구성원 대부분의 삶의 척
‘황우석 사태’의 본질은 연구의 진실성 여부다. 그 진실성은 연구자의 심정적 진정성의 문제가 아니라 과학적 사실의 문제이며 객관적인 검증을 통해 밝혀져야 할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세력 음모론’이 등장하고 있다. 일단 음모론이 등장하게 되면 공공적 합의를 통해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욕망은 ‘근대적 인간’의 문제만은 아니다. 고대 종교에서 바라본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이기도 하였다. 에덴동산에서 ‘뱀의 유혹’은 인간의 근원적 욕망에 대한 헤브라이즘적 수사이다.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이브의 욕망과 그 결과는 기독교 신학의 근본적 문제의식이 되었다. 한편, 보리수 아래서 수행자 고타마가 넘어야
'근대화', 또는 '현대화'란 원래 시간과 관계된 말이지만, 우리는 은연중에 이를 공간적, 지리적 개념으로 사용해 왔다. 우리에게 근대화와 현대화는 곧 '서구화'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서구 풍의 복장과 두발만이 현대적인 것이다. 서구적인 건축물만이 곧 현대적인 건축물이다. 현대적 기술은 서구의 기술을 의미한다. 현대의 교육제도나 행정제도 역시 서
천성산 고속철도 관통을 막기 위한 지율 스님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거두었다. 지율 스님은 2003년 2월 1차 단식을 시작한 이래 2005년 2월 3일까지 네 차례에 걸친 총 241일 간의 단식 투쟁을 벌였다. 이에 따라 여론 악화에 몰린 정부가 마침내 지율 스님이 요구한 환경영향 재평가를 약속한 것이다. 지율 스님의 ‘도롱뇽 살리기&rsquo
최근 한국불교의 정체성이 다시 문제가 되고 있다. 통불교가 한국불교의 정체성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지금까지 주로 학계 내의 논쟁으로 국한되어 왔으나, 최근 조계종 종단의 세계화 종책과 관련하여 한국불교의 통불교 정체성이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정체성' '전통' 그리고 '특성'이란 문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근대 이래 인간의 생명권은 '인격 개념'에 의해 정당화되어 왔다. 살생이나 신체 손상의 금지 원칙의 근거는 '자연적, 생물학적 차원'이 아닌 '권리주체로서의 인격'이라고 하는 '법적, 도덕적 차원'에 있다고 본 것이다. '생명권'에 관한 근대적 개념 정의가 함의하고 있는 것은 종교와 철학의 구분, 형이상학적 존재론과 도덕의 구분이라는 근대
종교는 인간의 궁극적 관심의 표현이다. 그 관심은 구체적으로 진리의 추구와 선의 추구 그리고 아름다움의 추구로 드러난다. 이 가운데서 가장 보편적인 것은 진리나 선이 아니라 이름다움이라 할 것이다. 진리라든가 선이란 것은 언어를 통해 드러나는 것으로 문화라고 하는 일정한 컨텍스트를 지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 또한 문화적 컨텍스트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