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불교. 나의 삶이란 내가 살아온 역사일 것이요, 나의 불교란 나와 불교는 어떤 관계인가를 말하는 것이다.내가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철학과를 입학할 때부터 나는 불교와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이미 나의 자의적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온 역사는 동국대학교의 울타리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동국대학교 생활이 나의 삶의 역사이다. 얼마 동안 다른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한 때가 있긴 하였으나, 그때도 동국대 강사와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있었으니 동국대학교를 떠난 적이 없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척박했던 인도의 불교학 연구20세기를 지나 21세기에 이르러서도 불교학은 ‘세상과 나의 연계’를 근원적으로 해명하고 소통시키는 기제로 인정받고 있다. 유신론적 신관 또는 수행체계로 간주되었던 불교는 20세기에 들어서야 그 역사성이 확인된다. 서구 학계에서 전설적인 존재로 간주되었던 붓다가 실존했던 인물임이 고증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불교는 전 아시아적 문화이자 철학 사조로서 동양뿐 아니라 서구에서도 발군의 석학들을 배출했다. 이들 학자군에 고빈드 찬드라 빤데(Govind Chandra Pande, 1923~2011)를 포함시킨다면
올덴베르크는 1854년 10월 31일 함부르크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71년 베를린의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에 그는 괴팅겐대학과 베를린대학에서 고전문헌학과 인도학을 공부했다. 1875년 그는 베를린대학에서 아르발(Arva) 형제에 대한 연구로 고전문헌학에서 박사학위를 했고, 이어 1878년 《상키야나 그리흐야수트라(Śāṅkhyana Gṛhyasūtra)》의 편집과 번역을 산스끄리뜨 문헌학 교수자격논문으로 제출했다. 1889년 그는 인도철학의 옹호자이며 니체의 친구이기도 했던 파울 도이센(Paul Deussen, 1845~19
-정찬주 불교소설 〈천강에 비친 달〉 외 1. 경전 소설과 비경전 소설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불교소설은 침체의 늪에 빠진다.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의 장편소설 《꿈》(2001, 창작과비평사)이 발표되고, 한승원의 《초의》(2003, 김영사)와 《소설 원효》(전 3권)(2006, 비채) 그리고 정찬주의 《만행》(2000, 민음사), 《아, 관세음보살》(2
1. 몽테뉴의 생애와 사상몽테뉴(Michel de Montaigne, 1533~1592)는 르네상스 당시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성인이며 문필가이다. 그는 남프랑스 페리고르 지방의 몽테뉴 성(城)에서 출생하였다. 보르도에서 포도주 장사로 부자가 된 그의 증조부가 성을 매입했다. 몽테뉴의 부친은 이탈리아 전쟁에서 참전하고 돌아와서 이 성을 확장하고 가꾸어 귀족행
첫 종교 생활 나의 종교 생활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어릴 때 나는 서울의 종로구와 서대문구를 잇는 사직터널이 생기면서 없어져 버린 동네, 사직동의 끝자락에서 살았다. 교회는 사직공원 앞에 있었다. 동네 아이들을 따라간 것이 아니었나 싶다.교회에서 배우는 것은 학교와 달랐는데, 재미있었다. 동요, 동시를 읽을 때였으니 3, 4학년쯤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이 동시를 가르쳐 주시면서 다음에 올 때는 하나씩 지어오라고 했다. 집에 와서 동시를 짓는데 잘 안됐다. 이 책 저 책을 뒤지다가 아주 멋진 동시를 발견했다. 거침
1. 젊은 시절의 공안(公案) 참구일본의 저명한 불교학자로서 서양에 선(禪)을 전하는 데 지대하게 공헌했던 스즈키 다이세츠는 1870년 11월 11일 일본의 이시카와현(石川縣)에서 태어나 95년간 활발발하게 활동하다 1966년 7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본명은 테이타로(貞太郞)이며, 다이세츠(大拙)는 그에게 선을 전수한 스승인 샤쿠 소엔(釋宗演, 1860~ 1919)에게서 받은 호(號)이다. 《도덕경(道德經)》 45장에 나오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을 줄인 ‘대졸(大拙)’이란 말은 선어록의 백미인 《벽암록(碧巖錄)》 제100
외젠 뷔흐눕(Eugène Burnouf)을 찾아서파리-벨빌 건축학교는 건축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자 하는 젊은이라면 한 번쯤 거쳐 가길 원하는 그런 학교다. 건축 이론과 인접 학문과의 협업을 동시에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일 터인데, 뛰어난 명성으로 이제 한국의 건축학도들에게는 꽤나 친숙한 이름이 되었을 것이다. 필자가 동양의 고전건축에 약간의 관심을 가지고는 있지만, 파리를 다시 방문했을 무렵에도 일부러 이곳을 방문할 만큼 건축에 목을 매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메트로를 타고 내가 이 학교 근처를 찾아가 배회했던 것은 단지 이 학교
-고은의 《화엄경》과 황충상의 《무명초》를 중심으로1990년대에 발표된 소설을 일별하기 전에 먼저 전제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먼저 1990년대 이전 혹은 90년대에 등단하여 불교소설을 쓰기 시작한 작가들의 모든 작품을 거론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하나의 예로, 1982년에 등단하여 1994년 소설 《유마경》을 쓴 정찬주의 불교소설을 유보할 수밖에
1. 《대학(大學)》이라는 책 《대학》이라는 책은 그것이 독립된 책으로 출현하는 데부터 불교와 연관이 되어 있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어 온 뒤 수, 당대를 지나면서 그야말로 전성기를 맞게 된다. 화엄 사상 등 중국화된 불교의 교리 체계가 자리 잡고, 중국의 지성사에 큰 획을 긋는 발전을 이룩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이 중국의 유자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상황
1. 나의 아버지 백운암 거사 나의 아버지는 평생 염주를 걸고 사신 가라월(거사)이셨다. 법호를 백운암(白雲庵)이라 했다. 우리 집안은 내 조부 대까지는 볏백이나 거두는 유족한 집이어서, 할아버지는 독사장(獨師丈)을 모셔놓고 외아들인 내 아버지에게 사서삼경을 가르치게 하셨다. 그런데 문제의 아버지였다. 20대 초반부터 가출을 해서 낭인 생활을 한 것이다. 수소문해서 찾아다 놓으면 또 나가곤 했다. 집에서 농감이나 하고 있으면 가족과 당신이 편할 것인데, 온 집안에 걱정을 끼쳤다. 편한 것을 귀찮게 여기는 젊은이였다.아버지가 주로 머
들어가는 말남방 테라와다 불교국가인 스리랑카는 걸출한 학승들을 배출해온 승가의 존재만으로 세계불교의 무대에서 입지를 탄탄히 구축해왔다. 뿐만 아니라 학자, 사상가, 사회운동가, 명상 지도자로서 국제적 명성을 얻은 재가자들의 존재도 그러한 입지를 구축하는 데 큰 몫을 해왔다.그러한 재가 불교학자들 가운데 한 명이 바로 구나팔라 피야세나 말라라세케라(Gunapala Piyasena Malalasekera)이다(이하 말라라세케라로 호칭한다). 사실 그를 불교학자로만 규정하기에는 애매한 점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불교학자일 뿐만 아니
1. 들어가는 글오늘날 일본은 세계의 어떠한 나라보다도 불교에 대한 다수의 연구성과가 방대하게 쏟아지는 가히 불교학의 메카와 같은 나라이다. 도쿄대학을 비롯한 국립대학뿐만 아니라 각종 불교종단에서 건립한 많은 사립대학에서 매년 다량의 연구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연구는 자국은 물론 동아시아의 불교 전통으로서 한문에 의거한 문헌뿐만 아니라 산스끄리뜨어, 빨리어, 티베트어 등 다양한 불교 원전 언어에 의거한 문헌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그렇다면 이러한 불교학의 메카로서 다양한 불교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
1980년대는 국내 정치사상 간과할 수 없는 격동의 시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민주화 이행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사건, 이한열 열사의 사망, 그리고 5 · 18 광주민주화항쟁으로 인해 정치적인 혼란과 함께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어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던 시기였다.이 시기 작단(作壇)의 판도는 월남전,
* 이 글은 필자의 논문인 〈쇼펜하우어와 불교의 인간 이해의 비교연구: 쇼펜하우어와 원효의 비교연구를 토대로〉(《현대 유럽 철학연구》 32권, 2013.10)를 참고했음을 밝혀둔다. 1. 쇼펜하우어와 불교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는 서양 철학자들 중에서 불교를 가장 긍정적으로 보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사상과
1.꼭 그런 건 아니겠지만 여느 평균인들도 믿음/신앙에 드는 데는 나름의 계기가 있다. 물론 모태신앙의 경우는 다를 수 있다. 집안 전래의 깊은 신앙 속에서 그 분위기나 믿음에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할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가 아닐 때는 나름의 계기가 있다. 예컨대 자식을 일찍 가슴에 묻은 어머니의 경우도 그 한 예일 터이다.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장년의 나이에 그만 하세한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절에 다니기 시작했다. 막막한 기댈 데 없는 마음을 기대기 위해 그니는 부처님을 찾았던 것이다. 아들이 죽은 뒤홀어머니는
1. 청송 선생 학문의 선행연구계간지 《불교평론》 편집위원으로 봉사하는 서재영 박사로부터 청송(聽松) 고형곤(高亨坤, 1906~2004) 선생에 관한 원고청탁을 받았다. 나는 청송 선생을 뵌 적이 없다. 그렇다고 독일 관념론이나 현상학 분야 글을 써 본 적도 없다. 며칠 말미를 받아 고민하면서 수년 전에 동국대 김종욱 교수가 건네준 《개정 번역판 선(禪)의 세계》(고형곤 지음, 동국대학교출판부, 2005)를 다시 펼쳐보았다.오래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연세대 교수 되던 이듬해, 지금은 고인이 되신 연세대 철학과 박영식(朴煐植,
-조정래의 〈대장경〉과 김성동의 〈만다라〉1970년대 우리 사회는 다각적으로 진행된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자유화 투쟁이 전개되고, 경제적으로 급속한 산업사회 이행과 함께 문화적으로는 소비문학적 현상의 하나로 상업주의소설 혹은 이른바 ‘호스테스 소설’이 팽배하였던 시대이다.이러한 사회풍조를 70년대 소설은 반영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과는
1. 머리말한 인물은 인물 자체만으로도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는 물론 이후 미래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인물의 개인에게만 한정되어 평가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까닭에 인물은 개인의 행장을 중심으로 인물이 누렸던 당시의 사상적인 동향과 시대적인 추이 등이 종합적으로 감안되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특히 20세기 한국이라는 국가는 어느 시대보다도 그리고 어느 국가보다도 굴곡이 여울진 시대였던 만큼, 그 가운데서 생존했던 사람들의 면모는 그 시대성을 벗어나서는 생각할 수가 없다. 20세기 한국의 종교지형은
1. 탄허의 생애와 모습 : 유생(儒生)에서 불승(佛僧)으로탄허(呑虛, 1913~1983)는 근현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고승이다. 스님은 1913년 2월 20일(음력 1월 15일) 전북 김제 만경에서 독립운동가 율재(栗齋) 김홍규(金洪奎)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서 1983년 6월 5일 71세를 일기로 오대산 월정사에서 입적했다. 속명은 김금택(金金鐸), 자(字)는 간산(艮山), 법명은 택성(宅成, 鐸聲), 법호는 탄허(呑虛)이다. 스님은 6세부터 16세까지 조부와 부친, 그리고 향리의 선생들로부터 사서삼경을 배웠고, 결혼(17세)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