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실한 기독교인인 대학 시절의 은사는, 내가 불교를 신봉한다는 것을 아시고, “불교는 아무리 생각해도 허무주의야.”라고 말씀하셨다. 인생을 고해(苦海)로 보고, 세상을 무상하다고 하니, 허무주의 아니냐는 말씀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이 적지 않다.명철한 사회학자였던 내 매형은, 말년에 노인 우울증이 오자, 죽음의 공포와 앞날에 대한 불안 때문에 종교를 가져야겠다고 말씀하셨다. 평소 기독교에 비판적이었던 분이라, 원불교 교당에 나가보시라고 권했다. 그러나 그분은 가톨릭 성당에 나가셨다.뜻밖의 결정이라 그분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분
‘오지랖’과 ‘금도(襟度)’라는 그 좋은 말이 오남용되고 있다. 오지랖이나 금도는 겉저고리 옷자락에서 나온 말로 감싸는 포용력, 도량이 넓다는 뜻. 그런데 요즘은 ‘오지랖이 넓다’는 ‘주제넘게 이일 저일 간섭하려 든다’는 뜻으로, 금도는 ‘벗어났다’는 비난으로만 잘못 쓰이면서 사회가 날로 강퍅하고 무서워지고 있다.정치도 그렇고 사회에서도 오지랖이나 금도가 넓은 사람보다는 좁은 사람들이 판을 치고 있는 것 같다. 상대방은 아랑곳없이 목소리가 송곳 같은 사람만이 득세하며 우리네 가없이 넓고 깊은 삶을 둘러볼 여유를 못 갖게 하는 것 같
시아버지는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다. 동시에 가족 중에서 가장 먼 사람이기도 하다. 부모시니까 호적으로는 가깝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조금 다르다. 가족 밥상에서 내 자리와 아버님의 자리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종종 내가 앉는 밥상과 아버님의 밥상은 다르기도 하다. 어머님이 맛나게 드시는 게 무엇인지는 어머님이 직접 말씀해주셨다. 그런데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반찬과 싫어하시는 반찬은 어머님의 입을 통해 건너 들었다. 어떤 옷을 즐겨 입으시는지, 신발 치수는 어떻게 되는지도 직접 듣지 못했다. 아버님은 원래 말씀이 거의 없으시고 하
우연한 기회에 이완우 선생이 40여 년 가까이 공들여 수집했다는 임진강 돌들을 보았다. 아마 그것은 단순히 우연이라기보다는 오래전 예비해 두었던 하나의 만남이었을 것이 이 또한 어떤 알 수 없는 인연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었을 것이다.천태만상의 인간적 형상을 지닌 수십여 점의 돌을 바라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1991년 8월 일본 경도 용안사(龍安寺)의 ‘돌의 정원’에서 보았던 돌들이다. 그 당시 나는 미국에서 한국 현대시 특강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고 오랜 친구의 권유로 잠시 일본 경도를 방문하여 불교사찰을 순례하고 있었다.
며칠 전 시집 해설을 쓴 일이 있다. 작품은 “소녀가, 18, 저만의 시니피에를 던지고 간다.”라고 시작되고, “면은 공간의 프레임을 만든다. 때론 어설픈 말보다 한 컷의 눈이 불립문자를 이룬다 해도.”라며 끝을 맺는다.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여러 형상을 ‘기호’라고 한다. 기호는 ‘기표’와 ‘기의’로 구성된다. 언어적 기호에 있어서 기표는 말의 소리고, 기의는 그 말에 의해 의미 되는 개념을 말한다. ‘18’이라는 아라비아 숫자는 민족과 국가를 떠나 누구에게나 ‘열여덟’이라는 수를 나타내는 기의를 갖는다. 그러나 이를 한국
내가 김성동을 처음 만난 것은 1990년대 말 여의도 홍기삼 선생님 댁에서였다. 내가 선생님 댁에 들어섰을 때 그는 이미 크게 취해 있었다. 술잔을 들고 꾸벅꾸벅 졸다가 문득 눈을 뜨면 술을 마셨고, 무언가를 얘기하고 싶어 했다. 그런 김성동을 홍 선생님은 잘 다독이다가 택시를 불러 집에 보냈다. 김성동은 서라벌고등학교 재학 시절 홍기삼 선생에게 배운 제자였다. 홍기삼 선생은 가끔 고교 시절의 김성동을 떠올리며 그의 재주를 아까워했다.얼마 뒤 인사동에서 홍기삼 선생과 함께 김성동을 마주쳤다. 놀랍게도 그는 나를 기억했고, 또 술판이
흔히 불가에서는 언어를 통해 진리를 계시할 수 없다고 한다. 물론 이는 현묘한 진리의 세계에 대한 가없는 신뢰를 표현하는 일종의 역설적 사유 방법일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언어 너머의 언어를 통해 가닿는 진리 체계 곧 말을 한없이 삼가고 줄이면서 그 너머의 참의미에 도달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 된다. 말을 공부해가는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규정은 무릎을 칠 만한 언어의 본질론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는 모든 경계가 지워진 마음 곧 ‘무위심(無爲心)’을 통해 이르는 경지야말로 일체의 분별이나 호불호가 사라진 상태임을 강조한다. 가령
오랜만에 안동 도산서원을 찾았다. 일찍이 겸재 정선이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에 담았던 고즈넉한 산수풍경이 가을 단풍으로 반짝이고 있다. 도산서원에 들어서자 초입에 이황이 직접 설계하고 지은 도산서당(陶山書堂)과 함께 농운정사(隴雲情舍)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농운정사는 퇴계의 제자들이 공부하며 기숙하던 공간이다. 퇴계는 농운정사의 구조에 대해 직접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舍)가 모두 여덟 칸인데, 재(齋)의 이름은 시습(時習)이요, 요(寮)의 이름은 지숙(止宿)이요, 헌(軒)은 관란(觀瀾)이라 하고, 합(合)하여
오늘 아침 꿈은 어지럽고도 사나웠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어떤 꿈이었는지 가늠해볼 겨를도 없이 대전 병원에 전화를 했다. 동생이 근무하는 병원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코로나에 걸린 채 같은 병실에 입원해 계셨다.며칠 전 병원 입원해 계신 아버지를 간병하시던 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던 노인이 열이 높아 코로나 검사를 했는데 확진으로 나왔다고 하셨다. 그분은 서둘러 다른 데로 옮기고 어머니, 아버지도 코로나 검사를 받으셨다고 했다.하루 반을 기다린 끝에 결과가 나오기를, 두 분 다 양성 반응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당
‘한국불교종단협의회 부설 법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모임 풍경소리’가 지하철과 철도에 풍경소리 게시판을 운영하는 우리 단체의 풀네임(full name)이다. 풍경소리는 1999년 9월 28일에 창립되었다. 당시는 1998년 조계종 분규 후 한 해도 지나지 않은 때여서 교계의 여러 부문에서 분규의 상처가 남아 있었고, 불교계는 사회의 이미지를 바꾸려 노력하던 때였다. 종단분규로 인한 개인적 피해는 분규 당사자였던 스님들뿐만 아니라 동조하여 참여했던 재가자들도 그에 못지않았다. 정화개혁회의에 참여했던 필자를 비롯한 재가자들은 불교정화라는
바람이 잦으면 비가 온다고 하였다. 무슨 일이 있기에 앞서 그 일이 일어날 만한 조짐이 있다는 말이다. 자연현상에서 비가 오려면 대기의 변화가 있어야, 기압골의 변화로 찬 공기가 더운 공기를 만나든가 하여 바람이 세차게 불고 비가 오게 된다. 대기의 변화가 발생하는 이유는 지구가 멈춰 있지 않고 쉼 없이 운동하기 때문이다. 자연만이 아니라 사람살이에도 그런 조짐이 있기 마련이다. 다만, 자연과 달리 사람이 모여 이룬 사회라는 곳은 그 조짐이 단순치가 않다. 자연에는 주관적 의지가 작용하지 않지만 사회는 인간의 의지가 상당한 영향을
가슴에 구멍을 뚫으면 피리가 되지몇 개를 막으면 노래가 되지 노래에 구멍을 뚫으면 춤이 되지자면서도 멈출 수 없는 춤떼 지어 다녀도 늘 혼자인 춤 구멍이 다 막히는 날노래도 춤도 다 막히고,막이 내리지 다음 공연은 아직 미정 — 시집 《우리가 끝나면 주황물고기》(천년의 시작, 2022) 정채원1996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나의 키로 건너는 강》 《슬픈 갈릴레오의 마을》 《일교차로 만드는 집》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수 없지만》 등. 한성유문학상 수상.
이 책을 쓴 일차적 의도는 비록 재가의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마음만으로라도 출가를 해야 불자일 수 있다고 할 때, 과연 ‘출가’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그다음 이차적 의도는, 스님들, 특히 젊은 스님들에게 출가를 감행하는 일이 갖는 높은 가치, 출가자의 자부심(프라이드), 그리고 그에 따르는 책임감 등에 대해서 전달하고자 해서입니다. 《출가정신의 전개-붓다에서 법정까지》는 2017년에 펴낸 《결사, 근현대 한국불교의 몸부림》(씨아이알)의 후속작입니다. 애당초 ‘결사’와 ‘출가’는 함께 추
《조론(肇論)》과 이 책의 저자인 승조(僧肇, 384~414) 스님의 이름을 1990년대 초반에 처음 들었다. 고려원에서 우리말로 번역 · 출간된 《조론(략주)》을 읽었다. 내용이 잘 이해되지는 않았다. 4세기 말 5세기 초의 중국이라는 시 · 공간에 살다가 ‘31세에 요절한 한 젊은 지성인’이 쓴 글이라는 점에 왠지 마음이 심하게 끌렸다. 고전 한문을 익혀 내용을 직접 파악하는 것이 제일 좋겠다고 생각했다. 북경에서 공부하던 2011년 봄 무렵 ‘중국어가 나름의 수준에 도달됐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한번 《조론》 읽기에 도전했다
이 책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서양철학을 전공한 학자가 불교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느꼈던 여러 가지 상념을 논리적으로 서술한 글이다. 이 책을 번역하게 된 것은 불광출판사에서 의뢰가 왔기 때문이다. 번역을 시작하기 전에 저자인 지지엔즈(冀剑制)를 검색하고는 상당히 놀랐다. 그것은 저자가 대만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상당히 많은 책을 출판하였으며, 발표한 학술논문도 수십 편이 검색되었고, 더욱이 논문의 주제들이 본인의 전공인 서양철학 이외에 유학과 도교 등 상당히 광범위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중국에서는 화범(華梵)대학에서 건학이념
통계청의 종교인 전수조사를 들지 않더라도 피부에 닿는 공기에서도 불교가 정체되어가는 것을 느낀 터에, 2015년 통계청 조사는 실제로 이를 확인시켜 준 계기였다. 불교를 위시해 기독교, 천주교 등 종교 모두가 큰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전 국민의 56.1% 이상이 무종교인이라는 것은 모든 종교인에게 충격이었고, 2020년에는 61% 이상이 종교가 필요 없다고 답했다. 더 심한 것은 ‘종교가 이제는 더 이상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에는 전 국민의 82%가 동의한 것이다. 21세기의 판을 뒤엎는 최첨단 과학기술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이 책은 ‘서울대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 시리즈 중 하나로 출간되었다. 뇌를 이해하는 것이 시대의 화두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의 뇌는 심장이나 허파와 같은 세포로 이루어진 몸의 장기의 하나이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나를 나답게 만드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심장이나 허파와 같은 생명 유지를 위한 장기와는 다른 의미가 있다. 물론 뇌는 우리가 생명 유지를 위해 숨을 쉬고 호흡하며 조절해야 하는 수많은 생리학적 현상을 통제하는 기능을 하므로, 뇌가 정지하면 우리의 생명은 정지한다는 점에서 필수 장기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이 책은 필자의 2021년 동국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붓다의 입멸 에피소드에 관한 통시적 연구〉를 보완해 출판된 책이다. 붓다의 마지막 공양 · 수명 · 입멸과 사후존속 · 교단 유훈에 관한 초기불교 · 부파불교 · 대승불교의 견해를 고찰한 것이다. 이러한 통시적인 관점에서 불타관 · 열반관 · 불멸 후 교단 유지에 관한 견해가 어떻게 전승 또는 변화하는지를 조망한 연구서이다. 붓다의 입멸은 정각과 함께 불교사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이다. 정각을 이룬 붓다는 불사(不死)의 열반을 성취했다. 열반은 인간이 꿈꾸는 죽음이 없고 고통이 없
이 책에서는 초기불교에서부터 동아시아불교에서 찬술된 문헌에 이르기까지, 고대인도에서부터 중국을 거쳐 한국과 일본, 동남아에 이르기까지 불교의례 설행의 교의적 근간을 이루는 지옥 사상과 아귀 사상, 그리고 아귀 상태로부터의 구제를 위해 실천되는 불교의식에 대해 들여다보고 있다.이 책의 3분의 1 분량을 차지하는 ‘지옥’ 관련 서술은 2017년 한 해 동안 〈법보신문〉에 매주 ‘지옥을 사유하다’라는 주제로 47회에 걸쳐 연재했던 칼럼의내용을 다시 정리한 것이다. 불교문헌 속의 아귀도 관련 교설은 2019년에 연구재단에서 받은 시간강사
불교와의 첫 인연은 우연히 찾아왔다. 예비고사를 끝내고 독서 토론을 지도하던 선생님과 산사를 찾았다. 당일로 다녀오려던 일정이었지만 눈이 많이 내려 차량 운행이 일찍 끊겼다. 본의 아니게 산사에서 하루를 머물게 되었다. 다음 날 새벽 여명에 창호지가 비취색으로 물들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황홀감이 찾아왔다. 그 순간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불교를 공부해 보겠다고 생각하였다. 그해 마지막 달력이 떨어지기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생각조차 못 했던 죽음이 눈앞에서 일어나자 무엇인가 의지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산사에서 느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