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글자의 화두1993년 가을이었다. 1993년은 국가가 ‘책의 해’로 정한 해였고, 그때 마침 나는 ‘책의 해’ 행사를 주관해야 할 출판문화협의회의 기획 · 홍보담당 상임이사를 맡고 있었으므로 종로 한복판 경복궁 동쪽 문 앞에 자리 잡은 출판협회에 매일 출근하고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협회 회관 바로 옆에 있는 법련사의 청학(靑鶴) 스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법정(法頂) 스님께서 만나고 싶어 하시니 시간을 좀 내달라는 말씀이었다.그날 밤, 다 쓰러져가던 납작집 법련사 뒷방에는 법정 스님, 헌화 스님, 청학 스님, 그리고
1.2000년대는 새천년에 대한 대망에서 출발했다. 뉴 밀레니엄의 첫 세기로서 21세기는 지난 시대를 지배해 왔던 가치와 담론을 수용과 변화로 갱신하면서 새로운 천년을 시작했다. 특히 정보혁명으로 ‘새로운 제3의 물결’이라고 불릴 만큼 비약적인 문명을 이룩한 이 시대는 컴퓨터의 공급과 인터넷의 발달을 통해 본격적인 디지털 사회를 열었다. 21세기의 문학은 ‘인문학의 위기’라는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탈장르와 융복합을 표방한 담론들이 생산되었다. 한국문학을 이분화했던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은 다양한 문학적 담론의 스펙트럼으로 분화되고 탈경
흔히 ‘초기불교’ 혹은 ‘남방불교’ ‘상좌부’ 등으로 불리는 테라와다(Theravāda) 불교전통은 지역적으로는 남아시아 전역에 분포된 불교전통을 지칭한다. 이들의 대표적인 언어는 빨리(Pāli)라 불리는 성전 언어체계이며, 경-율-논을 포함한 삼장(三藏)은 물론 이를 근본 텍스트로 삼은 방대한 주석서와 해석을 담은 논서들도 보유하고 있다. 삼장은 빨리 언어체계로 전승되고 있는 반면, 주석서와 논서들은 빨리뿐만 아니라 지역 언어들로도 제작 · 전승되고 있다. 이 불교전통이 지닌 기본적인 세계관은 삼장을 통해 전해지고 있지만, 사실
1. 생애월폴라 라훌라(Walpola Rāhula, 1907~1997)는 1907년 5월 9일 스리랑카 남부, 갈레(Galle) 지역의 월폴라(Walpola)라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헷띠고다 가마게 돈 헨드릭 드 실바(Hettigoda Gamage Don Hendrick De Silva)였다. 그는 어린 시절 마을 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그는 학교에서 장난쳤다고 체벌을 가하겠다는 선생님과의 의견 차이로 학교를 떠났다. 교장은 체벌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어떤 체벌도 거부해서 그의 학교생활은 끝났다.그 후
1. 머리말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것은 서한(西漢)의 무제(武帝)에 의하여 ‘실크로드’라고 칭해지는 서역과의 교통로가 개척되어 상인들이 왕래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불교를 받아들이고 신앙하게 된 것은 동한(東漢) 시기에 시작된 일이니, 최소한 백 년 이상의 잠복기를 거친 셈이다. 이렇게 불교가 중국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원인에는 선진(先秦) 시기 이전부터 형성된 ‘이하지방(夷夏之防)’의 의식이 작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중국은 척박한 지역에 거주하는 주변 소수민족들의 비옥한 중원을 노린 침
어린 시절 내가 자란 곳은 소백산 아래 풍기다. 5백여 년 전 양주에서 홍건적의 난을 피해 남으로 피란해온 곳이 영주시 장수면 토계. 송가만 사는 집성촌이다. 50여 집이 종씨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경찰 간부로 있었던 아버지가 공직을 그만두시고, 외가댁과 친구분이 많은 풍기에 안착하였다.어렸을 때, 간혹 기억이 나는 것은 대여섯 살 때쯤 절에 갔던 일이다.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소백산 죽령 중턱에 있는 백룡사(白龍寺) 신도였다. 백룡사는 소백산 죽령 도로 밑, 큰 바위와 바위 사이에 있는 작은 절이다. 나중에 들은 말로는 우리 집에
에드워드 콘즈의 삶과 저술한국 불교학계는 1980년대에는 주로 일본 학계의 연구성과를 수용하였고, 그와 함께 영어권 연구도 학계에 소개되었다. 일본 학계의 연구성과는 기본적 설명이 충실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거시적 관점과 자신의 분명한 주장에서 무언가 아쉬운 점이 있었다. 그런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것이 영어권 연구성과라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영어권 연구성과에서 대표적 인물의 한 사람인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 1904~1979)의 삶과 학문적 성과를 간단히 검토하고자 한다. 콘즈는 독일 사람이지만, 영국 런던에
1. 들어가는 말‘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참으로 쉬운 것 같으면서도 난해한 문제이다. 따지고 보면 붓다의 가르침이란 이 물음에 대한 깨달음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자 한 것이 아니겠는가. 중국 선진시대(先秦時代) 사상가 묵자(墨子, B.C. 468?~B.C. 376?)는 ‘서로 함께 나누는 사랑과 이로움’으로 살아야 한다고 단언한다. 나와 남을 분별 짓지 않고 아낌없이 사랑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갈등과 대립, 다툼에서 벗어나 인간답게 살 수 있으며, 척박하고 곤궁함 속에서도 남과 이로움을 공유할 때 비로소 참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
1. 죽음이라는 것강릉여중 3학년 시절이었다. 매일 아침 이른 새벽 동틀 무렵이면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 아 이슬같이 죽겠노라.” 하고 젊은 군인들이 노래를 부르며 ‘하나! 둘!’ 구령에 맞추어 훈련하는 소리를 듣고 선잠을 깨고는 했다. 창설된 사단 신병들의 훈련 소리였다. 어느 날 누군가 ‘담요를 준비해 학교를 지키러 오라’는 전갈을 보내왔다. 38선이 가까운 강릉은 일찍 포위되어 날벼락 같은 6 · 25사변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에는 문교부 산하 ‘학도호국단’이라는 학생군단이 전국적으로 조직되어 있었는데 여학교에도
깔루빠하나(David J. Kalupahana, 1936~2014) 서구불교학 한계, 도전적으로 비판하다 깔루빠하나(David J. Kalupahana)는 1936년 스리랑카 남부 갈레(Galle) 지역에서 태어났다. 1959년 실론대학교(University of Cylon)에서 문학석사를 받은 후 영국으로 유학하여 1966년 런던대학교(University of London)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의 학위논문은 〈빨리 니까야와 중국 아함경에 구현된 초기불교 인과론의 중점 분석(A Critical Analysis of the
암베드까르(B. R. Ambedkar, 1891~1956)현대 인도불교의 부흥을 이끌다인도를 붓다의 나라이자 불교의 발상지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불교가 현재 인도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종교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2011년 실시된 인도의 종교인구 조사에 따르면 현재 인도의 불자 인구는 7,955,207명이며 이는 전체 인구 중 1%에도 미치지 못하는 0.7%에 불과한 숫자이다. 불교는 발생지인 인도에서 13세기 초에 거의 사라져버렸는데, 그 이유를 두고 많은 주장이 있다. 인도에서의 불교 멸망에는 여러 가지의
1. 불교와 마르크시즘, 공통점과 차이2015년 필자는 고 백기완 선생께 졸저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와 대화》의 추천사를 부탁드리러 초고를 가제본하여 병문안을 하였다. 선생은 앉은 채로 그걸 무릎 위에 놓고는 표지를 열어보지도 않은 채 꽤 오랜 시간을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병실에 침묵이 흘렀다. ”도대체 이 두 사람이 어떻게 연결이 될 수 있는가를 한참 생각한 게야.”라고 말씀한 후에야 표지를 넘겼다. 이때의 생각을 추천사의 서두에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라는 이름으로 갓 꾸린(가본) 글묵(책)을 손에 든 때
고향 강릉에서 불교를 만나다내 고향은 강원도 강릉이다. 강릉시 금학동에는 강릉포교당 관음사가 있다. 강원도 3본사(유점사, 건봉사, 월정사)가 연합하여 영동지방의 중심도시 강릉 지역의 포교를 위하여 1922년 강릉포교당을 개원하면서 창건된 사찰이다. 관음사는 부설 유치원도 함께 개원해 운영했다. 1923년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그 명부가 발견되어 이곳이 우리나라 유아교육의 남상지(濫觴地)임을 입증했다. 이 절에 강릉불교학생회가 있었다. 중 · 고등학생 불자들의 모임이었다. 1963년 나는 중학생이 되면서 학생회의 일원이 되었
1.1990년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냉전체제 아래서 강제 분단된 독일의 통일은 단순한 국가 간의 통일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역사가 해체되는 것과 동시에 공산권의 파산을 의미했다. 독일 통일 이후 소련연방 국가들이 해체되며 공산 진영 자체가 무너져 버림으로써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세력 사이의 냉전체제는 완전히 종식되었다.이에 따라 이데올로기라는 거대 담론이 점차 논쟁적 지위를 확보하지 못하면서, 한국사회에서도 진보 진영의 사회변혁적 이념이 소멸해 갔다.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하고 이어서 1998년 국민의 정부에 이르는 민주화 정착
1. 1980년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신군부, 쿠데타, 민주주의, 민중, 자유, 검열, 노동자, 저항, 올림픽 등이다. 그만큼 1980년대 한국사회는 1970년대까지의 군부독재 몰락으로 시작된 정치적 격동과 변혁의 시대로 기록된다. 1979년 10 · 26사태로 인한 박정희의 죽음과 동시에 등장한 신군부 세력은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등에 업고 반공 이데올로기를 통해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한 정치적 탄압과 구속을 이어갔다. 이런 가운데 자유와 민주화를 염원하며 신군부의 폭거에 저항하던 국민의 희생은 급기야 5 · 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1. 어우양젠(歐陽漸)과 금릉각경처근대 중국불교는 불교라는 시점에서만 이해할 수 없다. 청말 혼란기에 불교는 일종의 대안 사유였고 서구 근대사상과 결합하거나 혹은 충돌하면서 새로운 사상으로 변화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주요한 배경은 불교 지식을 부단히 생산하고 전파한 집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집단은 양원후이(楊文會, 1837~1911) 거사가 설립한 금릉각경처(金陸刻經處)와 양원후이의 제자 어우양젠(歐陽漸, 1871~1943)이 설립한 지나내학원(支那內學院)이다. 양원후이는 청 동치(同治) 5년(1866) 10여 명의 동인과 각경
강산(糠山)절강산절. 우리는 그 절을 그렇게 불렀다. 내가 우리 나이로 다섯 살 때 약 여섯 달 동안 생활했던 절이다. 어머니가 앞장서고 머슴의 지게에 얹혀 산길을 십 리나 걸어서 들어간 절이었다. 전라남도 무안군 해제면 신길리 강산이라는 산속에 묻힌 절. 지금 생각나는 건 거의 없다. 조그만 대웅전과 풀이 무성한 마당 건너에 요사가 있던 작은 절. 절 뒤편의 옹달샘에서 개구리 알을 막대기로 헤집었던 기억이 있을 뿐. 나중에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로는 내가 태어날 때 포대기를 뒤집어쓰고 나온 탓에 절에 목숨을 팔아야 했고, 아버지가
얼마 전에 작고한 세계적인 신학자 겸 종교학자 한스 큉(Hans Küng, 1928~2021)은 이웃 종교에 대한 기초적 연구가 없으면 종교 간의 대화가 있을 수 없고, 종교 간의 대화가 없으면 종교 간의 평화가 있을 수 없고, 종교 간의 평화가 없으면 세계 평화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한국의 양대 종교인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관계에서 상호 간의 원만한 이해와 대화를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우선 불교인으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가 되는 성경에 대해 기본적인 것을 알고 있는 것이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박사는 일본이 배출한 ‘인도철학 불교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동시에 아시아에서는 최초라 할 수 있는 비교사상 연구 개척자로서도 명성이 높은 학자이다.나카무라 박사는 1912년 11월 28일, 일본 남부 시마네현 마쓰에시 토노마치에서 출생했다. 마쓰에 지방 관청 관리직 출신의 집안이었다. 나카무라 박사는 출생하자마자 집안 사정으로 인해 도쿄도 분쿄구 동경대학 근처로 이사해 살게 되었는데, 평생토록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더 없이 사랑한 인물로도 널리 알려졌다. 이 같은 평판으로 인해 1989년 ‘동양사상 연구의
역사적 · 사상적 배경중국 근대 시기에 불교가 맡은 역할은 매우 독특하다. 아편전쟁(1840년)과 청일전쟁(1894년)으로 대변되는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과 그로 인한 동서 문화의 충돌이라는 상황 앞에서 불교는 서양철학에 대항하는 사상적 무기로서 역할과 동서 문화 교류의 계합점이라는 이중의 역할을 수행하였다.서양 사상이 새로운 시대사조로 대두하게 되자, 근대 이전의 사회 이데올로기로 강력한 영향력을 지속해온 주자학에 눌리고 있던 불교가 부흥하게 되었다. 주자학은 세계와 인간을 동일한 영역으로 파악하고 동일한 메커니즘인 이(理)의 실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