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봉 황성기의 생애고봉 스님(속명 황성기, 1919~1979, 이하 존칭 생략)은 1919년 11월 19일 강원도 고성군에서 부친 평해(平海) 황씨 필홍(弼弘)과 모친 성천(成川) 라씨(羅氏) 순길(順吉)의 5남 1녀 중 5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오길(五吉)이며, 가정은 염전을 생업으로 하였다. 그의 불연(佛緣)은 어린 시절 건봉사(建鳳寺)로 출가하면서부터이다.여기에서 고성공립보통학교를 다니며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을 마쳤고, 이 시기부터 자연스럽게 출가 생활과 세간 생활을 병행하게 되었으며, 보살의 서원도 싹틔우게 되
1. 눈 없는 세계와 맞닥뜨리다 저 사람은 끝났다고내게 찍힌 깊숙한 낙인서울로 부산으로 쏜살같이차들은 달리는데……한 점 바람의 무게로고속도로 위에 떠 있는나는 한 마리 하얀 나비.고익진은 1934년 김여화 보살의 4남으로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다. 1955년, 그는 전남대 의대 의예과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한 그해 가을, 고익진은 류머티스성 심내막염이라는 병으로 광주적십자 병원에 입원했다.한 병원에서 5년간 병실 속에서 보낸다는 것은 참으로 지겹고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나마 5년이라는 세월로 병이 낫는다는 보장도 없었습니
1. 생애장봉(壯峰) 김지견(金知見) 선생은 1931년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출생하였다. 어렸을 때는 전담 훈장을 통해 사서삼경을 배웠으며, 한국전쟁 당시 군에 입대하여 제대한 후 출가하였다. 김지견은 1952년 선암사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하여 1953년에 석호(石虎, 西翁 대종사의 법명)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법명은 우진(雨震)이다. 그 뒤 동산(東山) 조실이 지도하는 범어사 금어선원(金魚禪院)에서 안거를 시작하였다.이때 김지견의 학문적 재능이 발휘되었다. 예를 들어 《금강경오가해》에 나오는 글자 한 자의 차이에 대해서
호남불교의 거목 현공묵암(玄空默庵)선사. 호남 사람들은 해박한 불교 이론가이자 적극적으로 포교 활동에 헌신한 윤주일(尹柱逸, 1895~1969, 이하 현공)을 그렇게 불렀다. 그의 자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라서 그런지 모른다. 그렇지만 육조혜능의 말을 적용하자면, 사람은 영남인과 호남인으로 나눌 수 있을지 몰라도 불성에는 어찌 영호남이 따로 있으며, 불법이 꽃피는데 경계가 어디 있겠는가. 시절인연 따라간 것이다. 단지 그의 위법망구 위공망사(爲法忘軀 爲公忘私)의 덕으로 불연(佛緣)이 더욱 깊어진 은혜를 잊지 못하기에 이 지역
1. 기상(奇想)의 질문필자는 혜안(慧眼) 서경수(徐景洙, 1925~1986) 교수(이하 존칭 생략)에 대한 평전적 글을 이미 몇 편 썼다. 그런데 필자와는 너무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이분에 관한 자료집을 모을 때(《서경수 저작집》 I, II 편) 그의 학문적 업적 이외에 그의 행위를 주목해 달라는 요청으로 서문을 썼고, 다른 두 편은 지극히 맥락적(contextual) 상황에서 썼다. 곧 한 편은 재가 불자들에 대한 활동을 부각하는 강연 원고로서 이분을 재가불자들이 본받아야 할 하나의 표본으로 삼아 썼고, 또 다른 한 편은 ‘불
1. 시작하며현강(玄岡) 김인덕(金仁德, 1935~1999) 선생은 필자의 지도교수이다. 필자가 선생을 처음 만난 건 아마 대학원에 입학하고 난 후 두 번째 학기를 맞이했을 때일 것이다. 그때 나는 선생의 화엄학 수업을 듣고 있었다. 불교한문을 처음 마주쳤기에 단순한 문장도 쉽게 넘어가지 못할 때였지만, 발표 준비를 하면서 또 선생의 《화엄경》 강의을 들으면서 새로운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다. 이 즐거움 덕분에 필자는 선생님을 지도교수로 모시게 되었다.이후 필자는 중관학 수업 시간에 경전을 읽었던 화엄학 수업 때와는 달리 논서를 읽는
전통 불교학에서 근대 불교학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불교학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한 학자들이 적지 않다. 그중에서 특별한 행로를 걸어간 학자의 한 사람이 운제(雲霽) 이영무(李英茂, 1921~ 1999)이다.인문학에서 불교학은 학문의 영역 및 성격이 광대무변하고 특수하다. 그래서 불교학을 온전하게,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학자에 이르는 길은 간단치 않다. 즉 불교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남다른 자질, 열정, 소양 등이 어우러져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영무는 불교학자가 갖추어야 할 제반 조건을 두루 갖춘 학자가 아닌가 생각된다.우선 그는 10
1. 나의 스승 김상현 교수필자가 김상현 교수님을 처음 뵌 것은 대학 3학년이던 1997년 3월이었다. 그때 교수님은 한국교원대학교에 계시다가 동국대 사학과로 부임해오셨다. 필자는 당시 늦은 나이에 복학하여 후배들과 함께 ‘한국불교사 연구회’라는 스터디를 운영하고 있었으므로 한국불교사 전공 교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에 매우 반가워했다. 당시 사학과 내에는 한국 고대사 전공 교수님이 계시고, 또 동국대 불교학과에 불교사 전공 교수가 있는데, 왜 사학과에 불교사 교수가 오느냐며 불만의 목소리도 있었다. 교수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강의하는
《불교평론》으로부터 현대 불교학자 시리즈 중 법운(法雲) 이종익(李種益, 1912~1991) 박사에 대한 집필을 의뢰받았을 때, 필자가 제일 먼저 떠올렸던 것은 보조사상 연구와 원효 연구의 개척자 중 한 분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막상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필자는 법운 이종익 박사에 대한 집필자로서는 너무나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연구 영역도 그의 활동 영역도 필자가 정리해내기에는 너무나도 방대했기 때문이다. 해서 본 글은, 그의 삶과 학문세계 전체를 탐색하여 소개한다는 생각보다는 그의 삶과 학문에 대한
1. 우정상의 생애와 학연소산(疏山) 우정상(禹貞相, 1917~1966) 선생은 동국대학교의 교수로서 해방 후 한국불교사 연구의 불모지를 개척한 1세대 학자였다. 그는 1917년 2월 6일 경상남도 사천에서 단양 우씨 덕춘(德春)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8년 사천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33년에 졸업하였고 다음 해인 1934년 통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20세가 되던 1936년에 양산 통도사에서 구암(龜巖)을 은사로 득도하였고 출가자로서 학승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38년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서 전통적 승려교육 과정인 사교과
1. 머리말국내에서 화엄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현곡(玄谷) 김잉석(金芿石)의 기념비적 저서인 《화엄학개론(華嚴學槪論)》을 읽어보았을 것이다. 이 책은 단기 4293년, 서기 1960년 3월 25일에 발행되었는데, 당시는 현대적인 의미의 불교학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기였다. 다시 말해 ‘불교학’뿐만 아니라 ‘화엄학’이란 용어조차 생소했으며, ‘불교학 연구방법론’은 물론 ‘화엄학 연구방법론’이라는 말조차 어색했던 시기였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간과한 채 오늘날의 잣대로 이 책을 평가하는 것은 무모하지만 후학으로서 반성적
1. 항상 쉬지 않고 전진하는 학자필자는 어렸을 때 부친을 따라 조선조 명재상 방촌(尨村) 황희(黃喜, 1363~1452)의 시제(時祭)를 참관한 적이 있었다. 황희의 묘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황의돈 선생의 묘와 비석을 보고 감회에 젖었던 기억이 난다. 그분이 바로 동국대 사학과에 재임하셨던 해원거사(海圓居士) 황의돈(黃義敦, 1890~1964) 교수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당시 유명 서예가 배길기(裵吉基) 동국대 교수가 집안 어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동국대에 관심이 가던 터였다. 선생의 후학이 남긴 글에 의하면, 해원 선생은 늘
미산(米山) 홍정식(洪庭植, 1918~1995)은 고아한 인품과 세련된 불교학자의 이미지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새겨져 있다. 동국대학교 교수로 22년을 재직하는 동안 그는 전통적인 불교학에 현대를 맞대어 잇는 학문적 노력으로 그 역할을 다하였다. 또한 정년퇴임 후에도 일반대중을 위한 불교교육의 저변확대에 힘쓰고 불교학계와 후학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근대 이후의 한국불교학을 일구며 마치 노학(老鶴)과도 같은 모습으로 고고하고 유연하게 평생을 살다 간 그의 학덕은 이 시대에도 아직 향훈이가득하다.1. 중앙
1. 포광의 전집 《한국불교사상논고》포광 김영수(包光 金映遂, 1884~1967, 이하 경칭생략) 박사를 알면 한국불교 연구의 역사가 보인다. 최근세의 격변하는 사회상황 아래 학교교육 제도가 시행·정착하는 과정에서, 그는 전통사찰 강원의 강주에서 시작하여 대학 강단을 개척하고, 학문연구의 터전을 닦아 불교사학의 지평을 열었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의 사조에서 보면 최근세는 개혁불교기로 불린다. 그것은 조선 후기의 백파긍선(白坡亘璇, 1767~1852)과 초의의순(草衣意恂, 1786~1866) 간에 시작된 선(禪)의 본질 논쟁이 가져온
1. 퇴경 권상로와 근대불교 이해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잠시 학문적 영역과 거리가 있는 방송국 자료실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그곳 기증 도서 가운데 근대에 발간된 불교계 잡지가 있었다. 1924년 7월 창간 이후 1931년 5월 제83호까지 권상로가 편집 겸 발행인으로 있던 월간잡지 《불교》였다. 이후 1933년 8월 제108호까지 편집 겸 발행인은 한용운이었다. 필자가 퇴경 권상로(退耕 權相老, 1879~1965)를 알게 된 것은 이때 《불교》를 접하고서였다. 그가 편집한 잡지를 읽으면서 근대 불교계의 활동이 어제의 일처럼 느껴졌다.
1. 서론효성 조명기(曉城 趙明基, 1905~1988)는 한국불교의 연구지평을 넓히고, 불교총화론을 통해 새로운 불교관을 제시하고자 한 인물이다. 그는 24세(1928) 때에 통도사에서 출가하고, 불교전수학교를 졸업하였다. 30세(1934) 때에 일본 동양대학 불교학과로 유학을 가서 1937년에 졸업을 하고, 1939년에 경성제국대학 종교학 연구실 전공과(대학원)로 진학하였다. 그는 1945년에 혜화전문학교(다음 해 동국대학으로 변경됨) 교수가 되었다. 조명기는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소 소장(1962~1964), 동국대 부총장(1960
1. 불연 이기영의 살아온 여정1) 탄생에서 유럽 유학(1922~1960)불연 이기영(不然 李箕永)은 1922년 2월 20일 황해도 봉산군 만천면 유정리에서 태어났다. 부 이종준(李鍾駿), 모 한순애(韓順愛)의 2남 4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광주(廣州). 1941년 4월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예과에 입학하였다. 1944년 동 대학 법문학부 사학과를 수료하였다. 1944년 일제(日帝)의 학병으로 징용되어 태평양전쟁에 참전하였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구사일생으로 생환하였다. 곧이어 공산당 치하가 되면서 대지주의
1. 장원규 교수의 논문을 읽게 된 사연필자가 매헌(梅軒) 장원규(張元圭, 1909~1995) 교수의 존함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83년도이다. 당시 나는 연세대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었다. 송명(宋明) 이학을 전공하던 나는 당시의 사상가들이 인간 행위의 당위성을 어떤 방식으로 논증하는지에 관심이 많았다.주렴계·소강절·장횡거·정이천·정명도·주자·육상산·왕양명 등등의 문집을 많이 읽었다. 그 과정에서 《주역》(왕필 주), 《노자》(왕필 주), 《장자》(곽상 주) 등 위진시대의 3현학도 부지런히 읽었고, 주자의 《사서집주》와
한국의 불교학은 근대 한국학의 변천과 마찬가지로 전통적 교학에서 근대적 학문으로 변화해 왔다. 그러나 최근까지 전통 강원(講院) 교육이 유지되어 왔고 아직도 선원(禪院)의 선 수행은 전통적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일반 학문 분야보다는 전통적 경향이 강하게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20세기에 활동한 한국의 불교학자 중에서 전통식 교육에 오랫동안 종사했던 이들은 전통과 근대 학문의 접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이런 경우 전통과 근대적 학문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성과에 머문 경우도 많겠지만
1. 들어가는 말무현(无見) 심재룡(沈在龍) 선생은 1943년 인천에서 출생하여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고, 평생 헌신적으로 3남매를 길러낸 편모슬하에서 성장하면서 어려운 청소년기를 보냈다.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하여 서울대 3대 천재의 하나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남다른 재치와 총명으로 많은 화제를 남기기도 했다. 졸업 후 잠깐 기자 생활을 거친 후, 학창 시절에 특별히 흥미를 갖던 언어분석철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자 하와이대학교 동서문화센터에서 지급하는 장학금을 들고 1969년 하와이대학교 철학과로 유학길에 올랐다.석사 학위를 마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