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북미의 불교학계에서는 문헌자료를 중심으로 텍스트에 담긴 교리와 철학을 연구하였던 고전적이고 규범적인 불교학을 뒤로 하고,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불교학이 대세가 되었다. 루이스 고메스(Luis O. Gómez, 1943~2017)는 북미 불교학이 포스트모더니즘, 역사주의, 탈식민주의의 불교학으로 변화하던 시기에 그 변화와 발전의 선두에 있었던 학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적 불교학은 ‘불교’란 다양하므로 같은 표준으로 잴 수 없다는 생각, 즉 세속의 불교 전통들은 서로 본질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다른 것이므로 이들에게서
1. 현대 스리랑카가 낳은 불세출의 불교 철학자쿨라팃사 난다 자야틸레케(Kulatissa Nanda Jayatilleke, 이하 자야틸레케)는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탁월한 철학적 해석’으로 회자되는 《초기불교의 지식론(Early Buddhist Theory of Knowledge, 이하 EBTK)》이라는 책으로 세계적 인정을 받은 불교 철학자이다. 자야틸레케의 학문은 제자이자 후배 학자들인 데이비드 칼루파하나(David J. Kalupahana), 파드마시리 데 실바(Padmasiri de Silva), 구나팔라 다르마시리(Gun
자유의 전성시대최근 들어 부쩍 자유를 언급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이에 관한 논쟁도 치열해졌다. 거기에는 촛불을 든 사람도, 태극기를 든 사람도 있고, 도로를 점용한 사람도, 이로 인해 불편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다. 새로 정권을 잡아 의기양양한 사람들도 있고, 억울하게 정권을 잃었다고 분개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자리의 자유를 외치는 사람도, 기업의 자유를 외치는 사람도 있다. 에스컬레이터가 나를 더 자유롭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래도 계단을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성의 자유, 결혼의 자유, 반려동물의
어머님의 깊은 불심나는 1944년 1월, 서울 성북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경성의전병원(京城醫專病院, 현 서울대학병원)에서 의사와 간호사로 근무하던 중 결혼하셨다. 그 뒤 아버지께서는 충남도립병원장을 거쳐 고향인 충북 음성군 금왕으로 이사하고, 영제의원(寧濟醫院)을 창업했다. 나는 부모님을 따라 금왕에 있는 무극초등학교와 무극중학교를 다녔다. 나의 제2의 고향은 어린 시절 15년간을 살던 금왕인 셈이다.어머니 고원만심(高圓滿心) 보살은 신심이 깊은 분이었다. 어머니는 평생 세 군데에 절을 지으셨다. 첫 번째는 금왕부인회의
1.우이 하쿠주(宇井伯壽, 1882~1963)는 근대화의 격랑이 일던 1882년 6월 1일 아이치현(愛知縣) 호이군(宝飯郡) 미토정(御津町) 에서 평범한 농부였던 아버지 우이 젠고(宇井善五)와 어머니 몬(もん) 사이에서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단카(檀家)로서 사찰과 사회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부친이 6 세에 사망했기에 편모슬하에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을 것으로 추측된다.아마도 이 두 가지 이유가 결합해, 당시 막 의무교육화가 이뤄졌 던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 초등학교 저학년에 해당)
1. 들어가며“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멀리 서부터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 도 노여워하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이는 《논어》 〈학 이편〉에 나오는 첫 문장이다. 대학에 다닐 때 이 구절을 접하고서, ‘학(學)’과 ‘습(習)’과 ‘열(說=悅)’의 관계 그리고 ‘기쁨(悅)’과 ‘즐거움 (樂)’과 ‘노여워하지 않음(不慍)’의 차이에 대하여 깊이 고민한 적이 있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희열(悅)’이야말로 도학(道學)의 첫 관문이 아닐까 하고 생
서른에 부처님을 만나다1938년 음력 동짓달 초사흘, 나는 창원 합성리에서 태어났다. 아 버지는 시골 선비 김기성(金基聲), 어머니는 김대광명(金大光明) 보살로 나는 이 두 분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마을 뒤로는 옥천 (玉川)이라는 작은 시내가 ‘촐촐촐 콸콸콸’ 흐르고 있었다. 나는 이 옥천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백일홍 나뭇가지에 올라 매미처럼 노래 하며 자랐다. 지금도 옥천 물소리는 내 깊은 영혼 속에서 순수한 열 정으로 흐르고 있다.초등학교 5학년 때 마산으로 이사를 갔다. 그때부터 나는 ‘마산 사 람’이다. 마산상고를 졸업하고
1. 들어가며필자가 리타 그로스(Rita M. Gross, 1943~2015)를 처음 만난 것 은 2009년 베트남에서 개최된 세계불교여성대회(샤카디타)였다. 당시 세계는 여성 인권을 위한 성주류화 정책이 강화되고, 여성과 지구 환경 등과 관련한 전 지구적 여성연대가 중시되었다. 불교도 이에 영향을 받아, ‘샤카디타’에서는 동아시아 출가 수행녀들의 열 악한 현실 극복과 티베트불교 비구니 승단의 회복을 위하여 전 세 계 불교 여성들이 연대해서 논의가 활발했다. 그런데 상좌부불교 국가에서 볼 때, 한국 비구니들은 높은 교육 수준과 독자
근대불교학의 도입과 대승비불설일본의 대승비불설의 문제는 불교가 아카데미 내에서 근대적인 학문으로 정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서구의 불교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 방법으로 문헌적 역사적인 연구가 도입됨에 따른 것이다. 불교에 대한 전통적인 수학은 수행과 신앙을 위한 불교 성전에 관한 훈고학적인 연구였다. 대승불교에 대한 비불설은 에도시대에 최초로 토미나가 나카모토(富永仲基)의 《출정후어(出定後語)》에서 제기되었지만, 당시의 풍조 속에서는 단지 배불논서(排佛論書)로 수용되는 것에 그쳤다. 나카모토는 ‘가상(加上)’이
1. 서구인 최초의 공식 불교 신자이 글은 19세기 후반, 신지학(神智學, Theosophy)에서 출발하여 불교로 개종한 후, 남아시아에서 불교 연구와 불교 근대화 운동에 헌신한 헨리 스틸 올코트(Henry Steel Olcott, 1832~1907)의 삶과 사상을 ‘종교불학(宗敎佛學, Buddhology of Religions)’의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의 생애는 동서문화의 만남과 변화의 경계선에 있던 한 서구 지성인이 자신의 속한 전통의 테두리를 벗어나 보편적인 진리 지평을 향해 걸어 나간 구도자의 모습을
1.들어가는 말몽테스키외는 18세기 그의 조국 프랑스를 비롯하여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떨친 정치사상가, 법률가, 역사가, 사회경제학자였다. 그는 1689년 1월 18일 프랑스 남부 보르도 인근의 드 라 브레드(De la Brede)성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1755년 2월 10일 파리에서 생을 마쳤다. 그의 전체 이름 “Charles Louis Joseph de Secondat, Baren de la Brede et de Montesquieu”에서 잘 나타나듯이 귀족 출신인 그는 백부로부터 보르도의 고등법원장을 물려받아 10여 년
불교 입문내가 태어나서 자란 시대는 전반적으로 향학열이 높았다. 그때 유행한 노래 중 하나가 “젊은이는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룩하기가 어려우니 짧은 시간이라도 가볍게 보내지 말라(少年은 易老하고 學難成하니 一寸光陰이 不可輕이라)”는 내용이었다. 나의 부모님도 열성적이셨다. 6 · 25 때 서울에서 낙향하여 시골에 사시던 부모님은 중학교부터는 나를 서울로 유학(?) 보내셨다. 나도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여 열심히 공부했다. 나는 학창 시절에 불교를 접하게 되었다. 부모님을 따라 가끔 절에 갔지만, 의식적으로 종교를 불교로 선택한 건 체
1. 서언인순(印順, 1906~2005) 대사는 20세기 100년을 중국, 홍콩, 대만 등지에 머물면서 불교학 연구, 저술 및 출판, 강의, 후학 양성 등에 매진했다. 대사는 출가 수행자이면서 불교학자이고 동시에 스님과 일반인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일생을 지냈다. 대사가 중국과 대만의 현대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겼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인순 대사는 중국 근대불교를 이끌었던 고승 중의 한 사람인 태허 대사의 인생불교(人生佛敎) 가르침을 바탕으로 인간불교(人間佛敎) 사상을 제시하고, 삶 속에서 이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이
이병욱 교수가 《인도불교사》(라모트 지음, 호진 스님 역) 서평에서 언급한 것처럼 외국어에 웬만큼 숙달되지 않는 한, 외국 서적을 읽고 어떤 학문적 관점을 이끌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 권의 좋은 책이 번역된다는 것은 우리 학계의 수준을 한 단계 올리는 작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호진(浩眞) 스님이 8년여 ‘인고와 보람의 세월’에 걸쳐 번역한 《인도불교사》는 실제로 우리 불교학계의 수준을 몇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 웬만한 불교학 전공자라면 사실 책이나 논문 몇 가지를 참고하여 웬만한 수준의 인도불교사 관련 서적
1. 머리말중국에 불교가 전해진 이후, 외래종교의 사상체계로써 본토의 사상들과 융합이 불가피하였다. 이에 따라 불교는 전래 초기에서부터 본토의 사상인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와의 사상적 융합이 이루어졌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결국 수대(隋代)에 이르러 유불도 3교가 정립(鼎立)되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인도와 서역의 불교와는 다른 중국불교의 독특한 사상이 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 · 도 양가에서도 심각한 사상적 변용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를 모두 논할 수는 없지만, 유학과 불교의 관계에 한정하여 말하면, 불교는 유학의 인성론
나는 늘 이렇게 생각한다. ‘정말 입산하기 잘했다. 내가 만일 시골 촌구석에 그대로 있었다면 무엇이 되었을까? 입산해서 불교를 만나게 되었고, 대석학인 탄허 노사를 만나게 되었고, 학문을 알게 되었고, 천직인 불교출판을 하게 된 것은 내 인생의 최고의 선택이었다’라고. 출가, 입산1965년 12월 4일 아침 8시, 집을 떠나 월정사로 입산했다. 열네 살. 강원도 산골짝엔 싸락눈이 흩날렸다. 다리를 건너 뒤돌아 집을 바라보니 그때까지도 어머니는 마루 끝에 서 있었다. 아마 내가 전나무 숲속으로 사라질 때까지도 거기에 서 있었을 것이다
1. 근대불교의 영욕 속에서근대 일본불교는 음과 양이 교차한다.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세워진 신정부에 의한 폐불훼석(廢佛毁釋)으로 불교계는 절치부심의 심정으로 범교단적인 개혁을 단행한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인재 양성이었다. 불교계는 유럽의 학문 체계를 받아들여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간다. 고대에 유입된 불교가 중세를 거치면서 일본열도에 토착화를 이뤄갔듯이. 이처럼 일본 불교학이 세계적인 학문의 대열에 들어선 것은 근대의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부심 또한 높았지만 오만한 부분도 있었다. 동아시아불교의 중심이 일본임을
1. 들어가며아시아로 전파되어 대표적인 ‘동양 종교’로 여겨지는 불교가 아주 오래전 유럽으로도 전해졌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후 유럽이 기독교화하면서 불교는 유럽에서 진지한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 19세기에 들어서서야 불교는 다시 유럽에서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이때 불교는 소수였지만 지식인들의 관심사였다. 철학자, 극작가, 문인, 종교인들이 낯선 ‘이방의 종교’를 사뭇 진지한 태도로 바라보게 된 것이 그 시작이었다.그러나 이후 1세기도 채 지나지 않아 불교는 눈에 띄게 확산되어
1.아날로그의 몰락과 디지털 시대의 개막을 본격적으로 알린 2010년대는 통신망의 진화로 지구촌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거기에 2007년 출시된 스마트 폰의 대중화가 시작되었고, 아날로그 시장은 점차 소멸하여 기존의 PC 중심에서 모바일 웹 서비스 기반의 디지털 시대가 도래했다. 리얼리즘의 세계관을 조정했던 아날로그 문학은 디지털 시장에 지배되면서 급속도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디지털의 파급으로 문학적 풍토가 바뀌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문학의 존재 방식 또한 다원적으로 재편되었다. 시공간을 넘어 인터넷이라는 가상현실 속에서 창작 네트
1. 머리말불교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는다 함은, 불교의 관점에서 불교와의 동이점을 고려하여 불교적 해석을 시도하는 작업이다. 이는 불교라는 거산(巨山)에서 어느 길을 선택하여 어떻게 등반할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다소 쉽지 않은 등정이다. 고전 자체만 놓고 분석하면 내용 해석은 가능하지만, 사상이 태동한 심층적 사유에까지 이르기는 어렵다. 사상의 지층에 도달하여 강력한 실천 동력을 얻기 위해서는 인물의 삶과 실존적 문제의식을 이해하고 공감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윤리교육의 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삶의 지평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