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청송 선생 학문의 선행연구계간지 《불교평론》 편집위원으로 봉사하는 서재영 박사로부터 청송(聽松) 고형곤(高亨坤, 1906~2004) 선생에 관한 원고청탁을 받았다. 나는 청송 선생을 뵌 적이 없다. 그렇다고 독일 관념론이나 현상학 분야 글을 써 본 적도 없다. 며칠 말미를 받아 고민하면서 수년 전에 동국대 김종욱 교수가 건네준 《개정 번역판 선(禪)의 세계》(고형곤 지음, 동국대학교출판부, 2005)를 다시 펼쳐보았다.오래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연세대 교수 되던 이듬해, 지금은 고인이 되신 연세대 철학과 박영식(朴煐植,
1. 머리말한 인물은 인물 자체만으로도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는 물론 이후 미래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인물의 개인에게만 한정되어 평가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까닭에 인물은 개인의 행장을 중심으로 인물이 누렸던 당시의 사상적인 동향과 시대적인 추이 등이 종합적으로 감안되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특히 20세기 한국이라는 국가는 어느 시대보다도 그리고 어느 국가보다도 굴곡이 여울진 시대였던 만큼, 그 가운데서 생존했던 사람들의 면모는 그 시대성을 벗어나서는 생각할 수가 없다. 20세기 한국의 종교지형은
1. 탄허의 생애와 모습 : 유생(儒生)에서 불승(佛僧)으로탄허(呑虛, 1913~1983)는 근현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고승이다. 스님은 1913년 2월 20일(음력 1월 15일) 전북 김제 만경에서 독립운동가 율재(栗齋) 김홍규(金洪奎)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서 1983년 6월 5일 71세를 일기로 오대산 월정사에서 입적했다. 속명은 김금택(金金鐸), 자(字)는 간산(艮山), 법명은 택성(宅成, 鐸聲), 법호는 탄허(呑虛)이다. 스님은 6세부터 16세까지 조부와 부친, 그리고 향리의 선생들로부터 사서삼경을 배웠고, 결혼(17세) 후
1. 무시선(無時禪)의 여정그를 길에서 본 지가 오래되었다. 아니 이미 천화(遷化)한 지 벌써 3년이 지났다. 늘 하늘을 보며, 먼 곳을 응시하던 그의 모습. 인사를 하면 “허허.”라는 말이 먼저 나온 그의 너털웃음. 그립다. 선자(禪者)치고는 너무나도 평범했던 그의 그림자. 겨울바람이 부는 이때쯤, 그가 좋아했던 학교 교정의 건물 모퉁이로 바람을 타고 돌아서 가는 뒷모습이 지금도 아련하다. 어디쯤 가고 있을까.그의 한국불교사, 선학 연구, 고경 읽기 시간은 오래전 조사들의 풍모를 대하듯 설레었다. 편안한 개량한복을 입고 교단에 서
1. 할머니의 신행에서 비롯된 선택의 삶한국 근현대의 격변하는 사회상황은 생민을 도탄에 몰아넣고 있었다. 서구의 열강제국이 한국을 전장으로 삼아 세력을 과시하며 혈투하는 가운데, 사직은 무너지고 드디어는 이국의 침탈로 모든 것을 빼앗기면서 식민지 시대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이 굴곡진 시대의 종교사상을 크게 셋으로 나누어보면, 첫째는 전통사상의 근대적 변모로, 고유신앙 사상 위에 전개된 불 · 유 · 도 삼교의 변화된 상황에 대처한 새로운 구세이념의 선포이다. 둘째는 서구사상의 전래와 수용으로, 서구의 정치 · 사회사상과 함께 들어온
1. 들어가는 말열로(悅路) 박선영(朴先榮, 1941~2018) 선생은 불교와 교육의 관계를 학문적으로 정초하고 불교교육학의 체계를 세운 대표적인 학자이다. 불교학자와 교육학자로서 살아온 그의 인생은 구도자로서 불교적 삶과 활동가로서 교육적 실천을 온몸으로 구현해 온 자리이타행(自利利他行)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교육학도로서 불교학과 철학, 그리고 교육학의 세계를 넘나들다 보니 때로는 길을 잃고 망연자실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학문의 대해에 뛰어들어 헤엄쳐 가면서 고독과 무력(無力)을 쉴 새 없이 느껴왔다. 가도 가도 끝도 없는
1. 인연을 돌아보며아시다시피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불교와 사회복지의 상관성을 주목한 연구물이 그리 많이 발표되지 않았다. 당시 필자도 그런 분야에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참고할 만한 선행연구물을 찾느라 고군분투하던 중에, 송산 스님이 번역한 책과 글들을 접하게 되었다. 목마른 사람이 감로수를 발견한 심정으로, 너무나 반갑고 감사해서 서울의 세곡동 법수선원으로 직접 스님을 찾아갔던 기억이 있다. 햇수를 까마득히 잊었는데 이번에 글을 쓰기 위하여 법수선원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스님이 주지로 재임하던 1983년 전후였을 것 같
1. 머리말동리(東籬) 이재창(李載昌, 1930~2017)은 필자의 은사이다.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에서 필자는 동리 선생의 지도로 〈일천제의 성불에 관한 연구-열반경을 중심으로〉(1982년도 석사학위 청구논문)와 〈원시불교의 사회 · 경제사상 연구〉(1992년도 박사학위 청구논문)라는 학위논문을 썼다. 선생께서 정년 퇴임한 후, 외람되게도 필자가 그 빈자리를 이어 앉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이런 인연 때문이다.선생과 필자의 인연은 197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교양
1. 효당의 생애1) 개요효당 최범술(曉堂 崔凡述, 1904~1979)은 불교계의 원로로 독립 운동가이며 교육자로, 또 사천군에서 제헌 의원을 지낸 정치가이며 현대 한국 차도(茶道)의 중흥조로 알려졌다. 원래 젊은 시절 이름은 영환(英煥), 당호는 금봉(錦峯), 법호는 효당(曉堂)이다. 그는 1904년 음력 5월 26일 진시에 경남 사천군 서포면 밤섬(栗浦)에서 태어나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국내외에서 동지들과 함께 열렬한 항일투쟁을 하다가 일제 총검하에 무려 수십 회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고 전한다.해방이 되어서는 1947년
1. 감포에 건립된 미술사학자 추모비2018년 4월 7일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 앞 바닷가에는 호불(豪佛) 정영호(鄭永鎬, 1934~2017)의 사거(死去) 일주기를 맞이해 추모비 제막식이 열렸다. 가족과 친지를 비롯한 학계를 대표하는 많은 인사가 참석해 선생을 기렸다. 이곳은 일찍이 1974년 10월 우현 고유섭 선생의 서거 30주기를 맞이해 한국미술사학회에서 건립한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비문이 새겨진 우현 선생의 추모비가 건립된 지역으로, 고고미술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정신적인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이처럼 상
1. 승려로서 불교와 문학평론으로서 문학필자의 불교 이해 수준은 깊지 못하다. 불교와 문학에 만남에 대해서, 불교문학에 대해서,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현대 한국문학 작품 속에 나타난 불교사상에 대해서 관심을 있을 뿐이지 불교에 대해서는 지식이 일천하다.김운학 교수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필자가 동국대 국문학과 3학년 때로 기억한다. 학과목에서 특히 고전문학을 공부할 때마다 우리 문학작품을 꿰뚫는 문학사상이 불교사상임을 실감했고 동국대 문맥이 불교임을 알았을 때, 불교대학 승가학과 교수였던 김운학 스님을 국문학 후배 2명(시
구름아 구름아 임자도 화나면 벼락 치는가말을 하자면 말은 한이 없다. 모를 때에는 이미 아는 게 있고, 알 때에는 이미 모르는 게 있다. ……중략…… 미안한 말씀입니다만 아신다면 안 읽으셔도 아시고 모르신다면 읽어도 모르실 책이 이 책입니다.1. 학문적 삶을 위한 준비한국 인도철학의 본격적인 역사는 1964년에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에 인도철학과가 설과(設科)된 이래 시작되었다. 인도철학은 요가의 경우로 입증되듯이, 학문의 경계를 넘어 생활과 문화의 영역에서 새롭게 그 영향력을 발휘해 가고 있다. 이 같은 인도철학의 현실적 응용력은 학
1. 들어가며처음 글을 청탁받고 나서 안옥선에 대해 알아보다가 놀란 것은 그분이 필자의 학부 시절 은사인 안기섭 교수의 여동생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 후 자료 조사하다가 다시 한번 놀랐는데, 그동안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것보다 안옥선의 학문세계나 그 지향성이 무척 깊고, 선구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유고집 서간문에 나타난 안옥선은 어린 조카에게 세심하고 다정하게 엽서를 보내는 이모이기도 했고, 여동생에게도 늘 격려와 지지를 보내는 언니이기도 했다. 또한 개인적으로 접촉해 본 전남대 강사 시절의 제자들도 하나같이 안옥선
들어가는 말현실에 존재하는 권위에 맞서고 잘못을 바로잡는 일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닐 터이다. 만성화된 오류를 지적하기 위한 명분은, 이미 오류에 속한 자신의 삶조차 비판적으로 직시하고 고친 후에야 얻어질 수 있다. 여기 암울한 불교계의 현실을 마주하고 이를 개혁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을 감내하고 실천한 사람이 있다. 승려 혹은 강단의 학자로 생을 마감하지 못하여 이제 거의 기억해 주는 이 없는, 그러나 행적을 더듬다 보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인물, 거사 이재열(李在烈, 1915~1981)이 있다.1. 불화 이재열의 생애불화(
나암 장충식(羅庵 張忠植) 선생은 정년을 1년 남기고 2005년 4월 30일 불과 65세에 이승을 떠나셨다. 선생은 투병 중에도 강의를 계속하셨고 마지막까지 몸가짐을 흐트러트리지 않았던 범상치 않은 수행자와 같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선생과 가까이 있던 분이 고인을 추모하면 남긴 글이 여전히 생소하지만 이미 12년이란 세월이 흘러버렸다.갑작스런 부음이어서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하지만 이렇게 헤어질 수 있는가. 고인은 후덕한 성품과 성실한 생활태도로 칭송의 대상이었다. 그의 삶 속에서 수행승과 같
1. 머리말초우 황수영(蕉雨 黃壽永) 선생은 한국 미술사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잘 알다시피 초우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하고 개성박물관장을 지낸 우현 고유섭(又玄 高裕燮, 1905~ 1944)을 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았으며, 우현의 사후 그 유고를 정리하여 간행하였다. 그리고 선사(先師)의 길을 따라 평생을 미술사학 분야의 연구에 매진하였고, 그러한 노력은 개인의 연구 성과를 넘어 한국 미술사학계의 토대를 마련하고 나아가 한국 미술사학을 정립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특히 초우 선생이 연구를 집
1. 머리말일붕(一鵬) 서경보(徐京保, 1914~1996) 박사는 한국 승려박사 1호, 세계 최다 박사학위 소유자, 세계 최다 저술가로 《기네스 월드 레코드(Guinness World Record)》(이하 《기네스북》으로 표기함)에 등재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국내 불교계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보다는 부정적 시각이 더 많았다.특히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그의 이름을 거명(擧名)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조계종을 떠나 1988년 ‘대한불교일붕선교종(大韓佛敎一鵬禪敎宗)’을 창종(創宗)했기 때문일 것이다.반면 그의
1. 머리글필자는 2012년 한국교육방송(EBS)에서 제작하는 〈세계테마기행〉에 출현하여 부탄을 여행한 적이 있다. 이 방송이 공중파를 타고 방영되고 나서 재미있게 잘 봤다고 제일 먼저 연락해 온 분이 미천(彌天) 목정배(睦楨培, 1937~2014) 박사였다. 필자가 처음 대학에 들어갔을 때 금강불교대학의 사무보조를 맡았다. 내가 기거하는 곳이 목정배 박사의 댁과 같은 방향이라 차를 함께 타고 귀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늦은 시간 차 안에서 자는 내 모습을 보고 한창 공부할 나이에 잡일을 시킨다고 종단에 건의하여 공부에만 전념할
* 인도철학회에서는 2014년 11월 28일, ‘한국 인도철학 50년의 회고와 전망’이라는 주제로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에 재직했던 제1세대 학자들의 업적을 고찰하고, 그 발표문을 논문으로 개정하여 《인도철학》 제42집에 게재하였다. 이 글은 필자가 여기에 게재한 논문을 《불교평론》의 기획에 부합하도록 개편하고 일부 내용(특히 서두)을 추가한 것이다. 편집자 주1. 드러냄 없이 드러난 삶향운(香雲) 정태혁(鄭泰爀)은 1922년 10월 23일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오도리에서 연일(延日) 정씨 가문의 장손으로 태어나서, 2015년 4월
1. 서론성진(性眞) 심재열(沈載烈, 1932~2012)은 재야학자로서 평생 불교학 연구에 매진한 인물이다. 그는 김범부(金凡夫) 선생의 문하에서 동양학을 공부하고, 대각회에서 활동하면서 이종익(李鐘益, 1912~1991) 선생을 만나 불교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보조사상》 5 · 6합집(이종익 박사 추모논문집)에 제자를 대표해서 추모사를 쓰기도 하였다. 그는 고려대 정치학과를 수료했고, 재야학자로서 원효사상연구소를 개설하여 연구와 포교에 헌신하였다.심재열의 생애에 관한 기록이 없어 필자는 그의 부인 이여영 여사와 인터뷰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