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일은 모두 잊어버려라내가 처음 큰스님의 서울 거소였던 신사동의 《불교평론》 편집실을 찾은 것은 10년 전 어느 겨울이었다. 출판일을 시작한 이후 어려움을 겪던 내게 불교평론 주간인 홍사성 선배가 편집일로 생계를 꾸려보는 게 어떻겠냐고 배려해준 덕분이었다. 쭐레쭐레 선배의 발걸음을 뒤쫓아 사무실의 문을 연 순간 나는 질겁하고 뒷걸음질 쳤다. 문을 열자마
오현스님 추모
김종현
2019.06.08 00:29
-
무산당 오현 스님과의 인연은 내가 불교계 언론에 막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시작되었으니 벌써 30년이 훌쩍 지났다. 스님은 1988년 내가 막 입사했던 신문사에서 상임논설위원을 맡고 계셨고, 스님의 평생 도반이자 지음인 정휴 스님은 주필을 맡고 계셨다. 스님은 인사동의 한 여관에 장기투숙하면서 신문사로 출퇴근했다. 두 스님은 신문사에 상근하며 일종의 역할분담
오현스님 추모
이학종
2019.06.08 00:28
-
한 그루 키 큰 무영수(無影樹)연전에 김병무, 홍사성 두 시인이 ‘무산선사 송수(頌壽)시집’이라는 표제를 단 《고목나무 냄새를 맡다》(2012)라는 시집을 펴낸 적이 있다. 여기에는 무산 조오현 큰스님에 대한 오랜 경험과 발견의 과정이 시인들의 빛나는 언어를 통해 풍요롭게 갈무리되어 있었다. 편자들은 “스님은 평생 스스로 빛
오현스님 추모
유성호
2019.06.08 00:27
-
내가 스님을 뵌 것은 2012년 무렵이다. 《불교평론》 편집위원으로서 일 년에 두 차례, 만해마을에 있을 때 몇 차례 스님을 뵈었다. 스님을 가까이서 지켜본 것은 아니지만 뵐 때마다 외로운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편의 시로 보여주긴 하셨지만, 스님 홀로 계셨을 그 세계를 우리가 감히 짐작이라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오해에 스님이라고 상
오현스님 추모
명법
2019.06.08 00:26
-
돌이켜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연이라고도 하지만, 나에게 불교 공부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인연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옆에 보이는 다른 길이 늘 더 쉬워 보이고, 그 길을 택하면 더 잘나 보일 것은 같은 그런 갈림길들이 있었다. 그 갈림길에서 엇갈림마다 선택해야 했던 쉽지만은 않은 길이, 나에게는 불교 공부였다. 그런 길에 흔들리지
오현스님 추모
석길암
2019.06.08 00:25
-
2012년 신달자 시인이 한국시인협회 회장으로 계실 때 나는 사무국장으로 회장을 도와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었다. 모처럼 한국시협 집행부가 만해마을로 MT를 갔다. 그때 서울에 계시던 무산 스님께서 전화가 와서는 다짜고짜 다음날 오전 10시까지 국회에 들어가야 하니 빨리 올라오라고 말씀하셨다. 그해 한국시협에서는 큰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예산이 많이 필
오현스님 추모
김지헌
2019.06.08 00:24
-
홀랑 벗고큰스님께서 그날은 다른 날과 다르게 아침 일찍 나를 부르셨다. 허겁지겁 달려가자 막 떠오른 해 같은 얼굴로 환하게 맞이해주셨다. 차 한 잔을 내주시며 ‘우리 함께 욕탕에 가자’고 하시는 큰스님의 말씀에 나는 적잖이 당황하였다. 큰스님께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나의 마음을 알아차리시고는 ‘괜찮다’며 다음에
오현스님 추모
배우식
2019.06.08 00:23
-
2006년 만해축전에서두 선지식께서 만해마을에서 손을 마주 잡으셨다. 종단 살림을 맡으신 가산 대종사님께서 만해사상선양회 총재로서 만해축전 행사에 동참하시면서였다. 깊고 무심한 설악이 오대양 건너 육대주에서 오신 수상자들과 축하 대중으로 야단(野壇)이 법석(法席)일 때였다.그렇게 두 선지식은 서로를 위로하셨다. 서울로 돌아오시는 길에 가산 대종사께서 말씀하
오현스님 추모
고옥
2019.06.08 00:22
-
식사나 한번 하이소 지리산 골짜기 마천에서 ‘80년대 시조’ 동인과 ‘오류’ 동인이 만난 것은 1996년 늦가을로 기억된다. 시조단의 막내둥이였던 1980년대 출신들이 시조의 당면문제가 시급하다는 위기의식으로 마련한 자리였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열린시조》라는 잡지였고 그 책임을 모두 다 내가 져야 한다는 중론에
오현스님 추모
이지엽
2019.06.08 00:20
-
브라질 출장 중이던 지난 4월 15일 저녁(현지시각)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이 불타고 있다는 뉴스를 봤다. 지붕과 벽 등이 화염에 휩싸이고 파리 시민은 물론 전 세계가 경악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브라질 바헤이라스주를 이동 중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인터넷으로 본 화재 장면을 보고 나는 2005년 4월 낙산사 화재를 떠올렸다. 화재 이튿날 한국기자협회 중
오현스님 추모
이상기
2019.06.08 00:17
-
먼 산에 눈 녹고 앞뜰에 꽃망울 맺히니 새봄이다. 절 앞 얼었던 어성천이 풀리고 버들개지는 움을 틔운 지 오래됐다. 이맘때쯤이면 무문관에서 해제를 하고 나온 무산 사형님이 늘 전화로 안부를 물어오곤 했다.“내다. 잘 지냈나. 몸은 우떻고? 벨일 없으믄 됐다. 중은 벨일 없어야 도인이다.”사형님은 늘 그랬다. 종문의 큰 어른임에도 병약하
오현스님 추모
지혜
2019.06.08 00:17
-
삶이 너무도 곤고하여 자살에 이를 사람도 뒷동산에 올라 지친 몸을 기대고 잠시 숨을 돌리며 멀리 바라볼 큰 나무 한 그루만 있으면, 또 그럭저럭 살아갈 힘을 얻는 법이다. 모든 기운과 힘을 남김없이 소진했는데 길마저 잃은 듯하여 털썩 주저앉은 나그네에게 그래도 먼 창공에서 별만 맑게 빛난다면, 또 지친 몸을 이끌고 가야 할 길을 걸을 수 있다. 무산 스님은
오현스님 추모
이도흠
2019.06.08 00:16
-
“나요. 어, 어이……왜, 안 오요. 백담사는 눈에 파묻혀 있는데…… 천지가 하얀데…….” 한 천년이 또 한 천년으로 넘어가며 묘한 설렘과 불안에 휩싸여가던 연말, 출근해 일을 시작하려던 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전화로도 먼 소리인데 펄펄 눈 내리는 소리,
오현스님 추모
이경철
2019.06.08 00:15
-
산호지지탱착월(珊瑚枝枝撐着月)1990년을 전후하여 10여 년간 강원도 강릉포교당에서 대학생불교연합회와 강릉불교청년회에서 지도법사로 경전 강의도 하고 대중방에서 선 수련도 같이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반야심경강론》이란 경전 해설서로 보낸 세월이었습니다. 어느 여름, 불자 회원들과 함께 낙산사에서 수련대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친분이 있던 주
오현스님 추모
송준영
2019.06.08 00:14
-
벌써 25년이 가까워온다. 1996년 가을, 설악산은 단풍이 한창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때 나는 봉정암에서 기도 중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어른스님이 잠깐 내려오라는 전갈이 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백담사로 내려갔더니 ‘이제부터 네가 봉정암 책임을 맡아야겠다’고 말씀하는 것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어리둥절한 나에게 스님은 전후
오현스님 추모
금곡
2019.06.08 00:12
-
어른스님의 고함“야, 이놈아. 너는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찾아올 거냐!”어느 날 오후, 평소 먼저 전화를 주시는 법이 거의 없는 어른 스님께서 수화기 너머로 특유의 카랑한 목소리로 호통을 치셨다. ‘보고 싶다는 뜻이구나’ 하고 속내를 짚은 나는 차를 몰아 만해마을로 갔다. 김모 전 인제군수와 함께 계신 스
오현스님 추모
황우석
2019.06.08 00:11
-
스님과의 인연오현 큰스님과 나와의 인연은 1995년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마을 이장을 맡고 있었던 나는 외딴 지역에 사는 5가구의 진입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백담사를 방문하여 처음으로 큰스님을 찾아뵈었다. 마을 바로 앞의 토지가 백담사 땅이었기 때문이다.사찰 직원을 따라 스님 방에 들어가 인사를 올리고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묻지도 않으시며 &ldq
오현스님 추모
정래옥
2019.06.08 00:09
-
바다를 뒤집고 산을 거꾸러뜨릴 기량2007년 한 일간지가 오현 스님과의 대담기사를 실었다. 신문에는 오현 스님이 자신의 시집을 설명하는 모습의 사진도 실렸는데, 한 손에는 담배가, 다른 한 손에는 라이터가 들려 있었다. 나는 기사 속 오현 스님의 사진을 보고서 옛일이 떠올라서 절로 웃음이 났다.오현 스님은 내 은사이신 영허당 녹원 대종사와 인연이 깊었다.
오현스님 추모
법등
2019.06.08 00:06
-
지난 한 달 사이에 큰스님이 세 번 꿈에 나오셨다. 한 번은 마치 작은 불상처럼 어둠 속 멀리 꼼짝 않고 서 계셨다. 엄지손가락만 하게 보였으니 어떤 표정을 짓고 계셨는지 알 수 없다. 또 한 번은 좀 더 가까이 계셨다. 고개를 숙이고 계셨고 사뭇 엄숙해 보이셨다. 나머지 한 번은 한 일주일 전이다. 모로 누워 계셨는데 어깨가 몹시 아프신 듯했다. 두어 번
오현스님 추모
방민호
2019.06.08 00:05
-
‘수처작주(隨處作主)’. 내 사무실 정면에 걸려 있는 액자의 글이다. 임제 선사의 말씀으로, 국전 서예 부문 심사위원장을 지낸 청남 오제봉 선생이 쓴 글씨다. 25년 전 강원도 설악산에서 무산 스님이 나에게 주셨는데, 그때부터 수처작주는 나의 좌우명이 되었다. ‘어디 가나 주인이 되어라.’ 나는 모든 일에 주인 의
오현스님 추모
손학규
2019.06.08 0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