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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 스님과의 인연은 칼에서 시작되었다.2004년 여름이었다. 만해마을에서 오현 스님을 뵈었을 때, 스님은 칼 두 자루를 만지고 계셨다. 영국왕실에서 받았다는 그 큰 칼들에는 ‘로빈 후드(Robin Hood)’라는 글자와 영국왕실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내가 처음 스님을 만났을 때 성형외과 의사인 내 직업을 ‘칼잡이&rsqu
설악 무산스님
황건
2018.09.02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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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묵부답의 속뜻1984년 전후의 어느 해였다. 오현 스님(그때는 필명인 오현 스님으로 불렸다)이 내가 근무하는 〈불교신문〉에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오셨다. 지난날의 희미한 기억 가운데 스님에 대한 일화가 있다.그 무렵 불교신문사에는 오현 스님 외에 스님이 한 분 더 계셨다. 신문사 경영을 맡은 그 스님은 오현 스님보다 후배였지만 신문사 경력이나 직함은 위였
설악 무산스님
최정희
2018.09.02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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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어데 계신교?” “집입니다.” “뭐하시는교?” “그냥 있습니다.” “펏뜩 오이소.”오현 스님이 계시는 오피스텔과 내 집은 걸어서 10분 거리다. 서둘러 갔더니 스님은 자그마한 방 안에 홀로 동그마니 앉아 계신다.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설악 무산스님
유자효
2018.09.02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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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랐다’ ‘꿈에도 몰랐다’ 등등 다른 표현도 많다. 외람되더라도 할 수 없다. 솔직히 표현하면 ‘속았다’는 게 맞다. 그리 급히 가실 줄은 몰랐다. “보고 싶은 사람들 몇몇 불러서 다 만났다. 임종게도 써놓았다. 그리고 내 행장(行狀)도 맡겨 놨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설악 무산스님
김한수
2018.09.02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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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6일 저녁 무렵 지리산 산행 중에 스님께서 원적에 드셨다는 부음을 들었다. 순간, 사방이 홀연히 무너져내리는 느낌이 들면서, ‘당래의 의지처이신 스님은 어디로 가셨습니까?’라고 속으로 되뇌고 외쳤다.바로 산행을 중단하고 동반 산인들과 헤어져 서울로 올라왔지만…… 당래의 의지처이신 스님은 어디에 계십
설악 무산스님
김희옥
2018.09.02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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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실스님을 처음 뵌 것은 1975년 여름 이맘때쯤 설악산 신흥사에서였다. 그때 나는 불문에 들어 성준 화상에게 어리석은 몸(癡身)을 맡기고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공동생활을 하는 절에서는 각자 소임이 맡겨지는데 나는 성준 화상의 시자(侍者)였다. 시자란 세속 말로 비서라는 뜻이지만 나는 은사 스님의 심부름이나 하는 어린 수행자였다.어느 날 영남에서 스님 한
설악 무산스님
김병무
2018.09.02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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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연설악무산 스님과의 인연은 내 나이 삼십 대 초반 초가을 어느 한 날에 맺어져, 내 나이 오십 대 중반 강릉의 한 병원 응급실까지 이어졌다. 이 질긴 인연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있겠는가.삼십 대 초반 어느 날, 기자 생활이 싫어 잠시 잠수를 탔던 나에게 고 이성선 시인께서 연락을 주셨다. 내설악 백담사의 어느 스님께서 이 시인을 찾으니까 한번 뵙고
설악 무산스님
이홍섭
2018.09.02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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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랑이원래 내 것은 없는 거야. 아무것도 붙들어 둘 수는 없어. 돈도 사람도 집도. 돈은 아지랑이 같은 거야. 잡으려고 하면 안 잡혀. 돈을 버릴 줄 알아야 돈이 들어온다. 돈의 성품이 아지랑이다. 아지랑이. 아지랑이만 아지랑이가 아니라 모든 게 아지랑이다. 사물 자체가 다 그렇다. 설악산을 다 갖고 있은들 무슨 의미가 있느냐. 아지랑인 줄 알면서 열심히
설악 무산스님
홍성란
2018.09.02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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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경북 김천법원에 근무하던 1993년경 금오산 해운사에 계시던 정휴 스님을 몇 차례 찾아뵌 일이 있었다. 그해 연말 강화도 전등사에 갈 일이 있다고 말했더니 기왕 나선 김에 양양 낙산사에 계시는 오현 스님을 꼭 한번 찾아뵈라는 것이었다. 12월 30일을 전등사에서 묵은 다음 몇 시간을 달려서 섣달 그믐날인 31일 오후 3~4시경 낙산사에 도착했다. 종무
설악 무산스님
주호영
2018.09.02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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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의 어느 봄날 오후였을 것이다. 경복궁 동십자각 건너편, 지금은 헐려 새 건물이 들어선 한국일보사 13층의 송현클럽에서였다. 그때 나는 제4회 녹원문학상 평론 부문을 수상하였는데 식후의 간단한 연회에서 한 스님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평범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기품이 있어 보이는 분이었다. 시조시인이자 이 상을 제정한 녹원 스님의 문도(門徒)라서
설악 무산스님
오세영
2018.09.02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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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도반 무산 화상이 떠났다. 우리가 벌써 이렇게 헤어질 때가 되었단 말인가. 돌아보면 아득한 세월이다. 풋중 시절 우리는 얼마나 순진했던가. 그때는 천하가 다 내 품 안에 들어올 것 같았는데, 이제는 그동안 품었던 것들이 하나둘 다 빠져나가고 있다. 이제 곧 나도 그렇게 떠나가야 하리라.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도 이렇게 하늘이 푸르렀다. 1964년 여름이
설악 무산스님
성우
2018.09.02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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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께서 열반하시기 꼭 엿새 전 아침 일찍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만해마을로 오라고 하시면서 차가 없으면 택시를 타고 오라는 것이었다. 무문관 수행에 드신 후 오래 뵙지 못한 터라 반갑기는 했지만, 택시라도 타고 오라고 해서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은근히 걱정도 되었다. 목소리가 언제나처럼 쩌렁쩌렁해서 스님 신변상의 문제는 없어 보였지만 착각이었다. 이날 오
설악 무산스님
장기표
2018.09.02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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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 스님이 입적하신 후 곰곰이 손꼽아보니 나와 스님과의 인연이 40여 년이나 이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스님이 나에게 해준 언행은 하나하나가 큰 가르침이었다.스님과의 첫 만남은 이러했다. 1977년 무렵, 이른바 국책사업, 대통령 역점사업의 일환으로 설악동 정비사업을 추진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무산 스님은 신흥사 주지로 계셨고, 나는 이 사업의 실무 책임
설악 무산스님
김진선
2018.09.02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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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 창가에 능소화가 불타고 있다. 불꽃 같은 기명색 노래를 토하고 있는 능소화에서 스님의 다비식 불꽃을 떠올리다 울컥 목이 멘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던 불꽃들이 잠잠해지고 불씨만 남았던 다비식 현장을 볼 때 나는 주저앉았다. 누가 알고 있는가. 지나가는 새도, 하늘에 떠 있는 백합 다발 같은 구름도, 쑥쑥 깊어가며 한숨짓는 녹음도 다 모른다고 한다. 그래
설악 무산스님
신달자
2018.09.02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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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만남백담사에서 처음 만해축전이 열렸던 해의 일이다. 만해 한용운의 문학을 새롭게 평가하는 심포지엄에서 나도 논문 하나를 발표하게 되었다. 백담사 경내에 들어서면서 나는 만해 한용운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이 산사에서 뜻밖에도 아주 소중한 노스님을 한 분을 처음 뵙게 되었다. 허름한 승려복의 노스님이 절간 마당에 떨어진 휴짓조각을 주워
설악 무산스님
권영민
2018.09.02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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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총통각하(總統閣下)나는 산을 모른다. 겨레의 영산(靈山) 백두산 천지를 일곱 번이나 근참(覲參)했어도 그 천변만화, 불가사의를 어찌 이를 수 있으랴. 중국의 어떤 시인이 “고려 땅에 태어나서 금강산 한번 보았으면(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 하고 소원했다는 금강산을 네 번이나 발걸음했어도 산을 보았다고 할 수가 없으니 그렇다. 어디
설악 무산스님
이근배
2018.09.02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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