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금명보정(錦溟寶鼎, 1861~1930)은 학계는 물론 불교계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전통적 학술 방식에 의해 불교사 서술을 시도한 근대의 학승이었고 강학의 전수를 통해 평생 후진 양성에 매진하였다. 또한 송광사 주지를 역임하면서 당시 교단 내에서 위상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대외 활동도 활발히 펼쳤다. 청허계와 함께 조선 후
1. 근대불교의식과 ‘찬불가’의 탄생찬불가는 말 그대로 부처님과 그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글의 ‘찬불가’는 현재 음악학계의 정의대로 근대 이후 서양음악의 영향을 받아 오선보로 작곡된 불교노래를 의미한다. 1910년대에는 ‘불교창가’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1920년대 중반
1. 머리말 최남선(1890~1957)은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 ‘출판계, 문학계, 사학계, 언론계, 정치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친 근대인이다. 그러하기에 그를 간단히 ‘누구’로 규정하기는 힘들다. 중국의 경우라면 계몽사상가이자 학술가였던 량치차오(梁啓超)에 비견할 만하다. 하지만 최남선은 량치차
이번 글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승려 이회광(李晦光, 1862~1933)은 조선조 말과 일제강점기에 걸쳐 활동한 인물로 ‘불교계의 이완용’ ‘매종역조(賣宗易祖)의 친일승’ 등과 같은 수식어가 붙는다. 이회광은 조선조 말에는 강백(講伯)으로 명성을 떨친 승려였지만, 일제강점기에는 극렬한 친일 활동으로 강대련(姜大蓮),
근대는 혼란의 시대다. 국가나 사회가 요동치니 그 속에 갇힌 개인도 방황했다. 방황 속에서 그들은 속절없이 침몰하기도 했다. 이제 나를 주재하는 건 내가 아니라 시대였다. 그렇다고 시대가 나를 책임지지도 않았다. 지식인들은 이런 혼란 속에서 자신이 걸어야 할 방향을 찾아 헤맸다. 그 방향이 집단적 가치에 기반했든 극히 개인적
1. 근대불교 최고의 포교사‘대중불교’ 또는 ‘불교대중화’는 한국 근대불교계에서 보편적으로 파급된 논리로, 대중불교운동의 전개는 근대 이전의 한국 불교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징 중의 하나로 지적할 수 있다. ‘대중불교’는 “산간에서 도시로, 승려에서 대중으로”를 지향하고
진호석연(震湖錫淵), 즉 안진호(安震湖, 1880~1965)는 일제강점기 가장 유명한 승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본산 주지를 역임하거나 역량 있는 말사 주지를 역임하지도 않았고, 또한 불교계의 중심인물로 의제와 담론을 주도한 인물도 아니었다. 물론 안진호와 안석연 및 소백두타(小白頭陀) 또는 만오생(晩悟生)이라는 필명으
1. 들어가는 글 이미 흘러간 유행가처럼 되었지만, 1990년대에 문화유산 답사가 붐을 이룬 적이 있었다. 어느 베스트셀러 답사기에 잘 드러나듯이 불교는 문화유산 가운데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하지만, 거기서 불교란 한 마디로 일상에서 살아 있는 종교가 아닌 미학의 대상으로 전락된 것이었다. 일반 독자에게 불교란 사라진 것, 돌과 나무를 비롯한 유형물에 미
1. 이동인 자료 찾기한국 근대불교의 전개 과정에서 이동인(李東仁, 1849~1881?)은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근대사회의 격동기였던 1877년 무렵 어느 날 별안간 등장하였다가 1881년 갑자기 사라졌다. 불과 4년간의 짧은 활동이었지만, 30대 중반 나이의 이동인은 근대불교의 형성과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필자가 대학에서 불교를 철학으로서 공부할 때, 그 대상으로서 불교는 지역적으로 인도불교, 중국불교, 한국불교이거나, 시기적으로는 대개 초기불교부터 고려시대 불교였다. 여기서 불교는 문자로 전해진 경전 속의 불교로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보편적 진리였지만 필자에게는 그만큼 추상적인 진리이기도 했다. 학위를 마친 뒤 우연히 다른 전공 분야의
1. 들어가면서내가 석전영호(石顚映湖)를 처음 만난 것은 동국역경원 최철환 선생 방에서였다. 그때 최 선생은 등사본으로 된 《계학약전(戒學約詮)》을 내밀었다. 결국 1년 넘게 공을 들여 2000년 《계학약전주해(戒學約詮註解)》를 출판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석전 박한영의 《계학약전》과 역사적 성격〉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나는 그때 스님의 해박한 지식과